2024년 7월 2일 (화)
(녹)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자유게시판

봄이 오는 어느 아침의 단상(斷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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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현정 [annateresa] 쪽지 캡슐

2003-02-21 ㅣ No.48508

 

20대 초반의 건장한 청년인 "나"는

친구와의 약속 시간에 늦어 허겁지겁 지하철 계단을 뛰어내려갑니다.

 

그런데 계단 바로 아래에서는 휠체어를 탄 젊은 여자 장애인이 혼자서

계단을 올라가지 못해 쩔쩔매다가

가까스로 용기를 낸 듯

계단을 뛰어내려온 "나"에게 도와줄 것을 청합니다.

 

그런데 "나"는 친구와의 약속 시간에 늦었다는 이유로

그 말을 못들은 척 하고 지나쳐가버립니다.

"나 말고도 도와줄 다른 사람이 많이 있겠지." 하면서요.

 

그러나 마음 한 구석이 매우 찜찜합니다.

 

지하상가 안에서 친구와 만나 잠시 지체하다가

밖으로 나가기 위해 다시 지하철 출구 계단 쪽으로 향했는데

아까의 그 장애인이 아직도 그 자리에서 쩔쩔매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수없이 지나치는 그 많은 사람 중에

그녀를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입니다.

 

"나"는 친구를 쿡쿡 찌르며 네가 가서 좀 도와주라고 합니다.

그러나 친구 역시 머뭇거리면서 선뜻 다가서지를 못합니다.

 

장애인에게 다가선다는 것 자체가 두려움이고

어쩔 수 없이 남의 시선을 끌어야 한다는 것이 창피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 청년은 그녀로부터 되도록 멀리 떨어져

외면한 채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때, 한 백발의 허리 구부러지신 할머니가

이제 눈물까지 글썽거리고 있는 그녀 앞으로 다가서십니다.

 

할머니는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시고는

당신 몸 하나 추스르기도 벅차 보이시는 힘 없는 팔로 그녀를 부축하고

어떻게든 휠체어까지 가지고 계단을 올라가보려 애를 쓰십니다.

 

그러나 두말할 것도 없이 역부족.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던 "나"와 친구는 동시에 달려들어

한 명은 그녀를 부축하고 한 명은 휠체어를 들고 계단을 오릅니다.

 

할머니는 웃으며 "아이고, 착한 총각들이네~" 하십니다.

 

"나"와 친구는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할머니와 장애인 여성을 보낸 후, 한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키며 길을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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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에 읽었던 글의 내용을 제가 요약한 것입니다.

자기의 일상생활을 유머러스하게 각색해서 글을 자주 올리는 청년인데

이번에는 어지간히 자신이 부끄러웠는지,

글의 어조가 유쾌하지 않고 무척이나 가라앉아 있더군요.

 

저 글을 읽으니 언젠가 출근길에 보았던

아주 짧지만 인상적이었던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버스의 앞문 바로 뒷자리,

그러니까 운전석 뒤쪽이 아니라 그 반대편의 맨 앞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역시 20대 정도로 보이는 한 중증 뇌성마비 여자 장애인이

가족인 것 같은 한 아주머니의 부축을 받으며

아주 힘겹게 버스에 올랐습니다.

 

휠체어는 타지 않았지만 지팡이에 의지해 뻣뻣한 몸을 간신히 움직이는 터라

그냥 평지를 걷는 것도 아니고 계단을 올라오는 그 모습은

보기만 해도 "어머... 어쩌면 좋아..." 하고 어쩔 줄 모르게 될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주머니는 다른 사정이 있었는지, 그녀를 차에 태워주기만 하고

"잘 갔다와~" 하고 인사하며 자기는 도로 나가 버립니다.

 

그녀는 운전석 뒤의 맨 앞자리로 간신히 올라가 앉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기도 인사를 합니다.

 

대체 어딜 가는 걸까... 무슨 일로... 어떻게 다니려는 걸까...

저런 사람을 혼자 어디론가 보내다니...

 

이런 생각을 하면서 한참 가고 있는데

저만치 앞에 한적한 버스 정류장이 보이고

그 길 한가운데 서서 담배를 붙여 무는 한 청년이 보입니다.

(입구 쪽의 맨 앞자리라서 전망이야 가장 좋았지요.)

 

그 청년의 얼굴과 몸은 차도 쪽으로 향하고 있었지만

무슨 차를 타려는 목적으로 서 있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왠지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이고 연기를 후~ 내뱉는 그 표정이

뭔가 세상에 대한 불만으로 찡그려져 있는 듯

그리 밝지는 않아 보입니다.

(마침 그 때, 버스가 정류장에 정차했기에 얼굴이 잘 보였지요.)

 

그런데 아까의 그 장애인 여성이 비틀비틀 일어나

열린 앞문으로 내리려고 합니다.

마침 타는 사람도 없는 한적한 정류장이어서 복잡하지 않아 다행이긴 했습니다.

 

문제는 그녀 혼자서 계단을 내려가기가 어려워 보였다는 거지요.

 

그런데 그녀는 정말이지 용감하고도 당당했습니다.

 

저만치 길에서 불만스런 표정으로 담배연기를 날리고 있는 낯선 청년에게

망설임 없이 큰 소리로 외칩니다.

 

"저기요. 좀 붙잡아 주실래요~~~"

 

뇌성마비 환자라서 발음도 세살박이 어린아이처럼 굉장히 부정확했습니다.

원래 부정확한 발음에 너무 취약한 저의 청력으로는

그 말을 즉시 못 알아듣겠더군요. (그래서 평소 사오정이라는 말도 많이 듣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청년, 그녀의 외침을 듣자마자,

한 모금밖에 안 피운 그 길쭉한 담배를 아낌없이 내던지고

총알같이 빠르게 그녀 앞으로 달려와 손을 잡아 줍니다.

 

찡그려져서 험상궂어 보였던 그 얼굴이

삽시간에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표정으로 바뀌니 정말이지 선해 보입니다.

누가 봐도 "착한 총각" 이라고 할 것입니다.

 

또 그녀의 표정을 보면, 당연히 무척 고마워하기는 하되

도움 받는다는 것을 부끄러워하거나 미안해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힘든 처지에서 어쩌면 저토록 비굴하지 않고 당당할 수가 있을까요?

몸은 병들었지만 마음은 병들지 않은, 멋진 여성이었습니다.

 

그 두 사람을 생각하며 오늘 하루를 시작합니다.

기분... 괜찮네요...^^

 

 

(희생되신 분들과 유가족들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이 마음에 먹구름이 끼게 되지만...

 그래도 산 사람은 눈물을 닦고 열심히 살아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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