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일 (화)
(녹)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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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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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연 [communion] 쪽지 캡슐

2003-07-05 ㅣ No.54295

꽤 오랫동안 힘들었습니다.

뭐 하나 제대로 되는 일도 없고.. 이것 저것 우환만 가득하고..

조금만 더 참아보자. 조금만 기다려보자.

그렇게 마음 먹다가 어느날 문득 독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님. 정말 저를 사랑하신다면 한 가지만이라도 증거를 대보세요.

딱 한 가지만 좋은 일이 일어나게 해주세요. 그럼 주님을 사랑할게요.

 

코믹 영화 ’부르스 윌마이티’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고 합니다.

"신은 돋보기를 손에 쥔 악동. 나는 그 돋보기에 타 죽는 개미."

얼마 전까지의 제 심정이 이랬습니다.

왜 나여야하냐고.

한 가지만이라도 행운이 찾아온다면 주님을 믿겠다는데 그 작은 일을 하나 못 해주시냐고.

그 정도는 주님에겐 아무 것도 아닌 일이 아니냐고.

내가 그렇게 힘든 순간에 주님은 뭘 하셨냐고. 다른 사람을 축복하고 계셨냐고..

 

그렇게 제 영혼은 한껏 웅크린 채로 숨죽이며 기다렸습니다.

제게는 한참이라 느껴질만한 시간동안 말입니다.

그런데도.. 아무런 응답이 없더군요.

 

꽤 오랫동안 활동하던 성당 봉사활동을 쉬기로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마음 속으로 항변하기를 잊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내게 보여주시지 않으니 그만 두는 거지, 내 잘못이 아니라고.

그렇게 애써 기도하지 않았냐고.

 

성당활동을 쉬기로 결정하고 다른 단원들에게 그 결심을 알린 날..

지도 신부님께 여쭤봤습니다.

- 신부님. 자신이 힘들 때는 주님을 찾고 상황이 나아지면 나몰라라 하는 것이랑..  자기 사정이 편할 때는 성당에 다니고 힘이 들 때는 그만 두는 거랑.. 어느 게 더 나쁜가요?

신부님께서는 저를 바라보시며 말씀하셨죠.

- 나쁘다기보단.. 나중의 경우가 더 위험하지.

그리고 헤어지는 순간에 신부님께서 말씀하시더군요.

- 너.. 조금만 쉬어야 한다. 너무 오래 쉬면 안돼. 가을까지 성당에 안 나오면 너희 어머님께 압력넣을 거야. 빨리 성당 내보내시라고.

그 말씀에 저는 쓸쓸하고 허전한 웃음으로밖에 대답해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뒤돌아서 나오면서..

오히려 후련하단 느낌이 들었습니다.

꼬박 15년 동안 이것저것 성당 단체 활동을 하면서..

이제껏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거든요.

오랫동안 생각해서 내릴 결정이었던만큼 아쉬움은 없었습니다.

 

너무 지쳐서 제 안에 에너지가 조금도 남아있지 않음을 느끼며..

또 다른 신부님께 메일을 보냈습니다.

- 신부님. 정말 쉬고 싶어요. 저 당분간 성당 안 가도 돼죠? 그 동안 열심히 다녔잖아요.

그 신부님께선 이런 답메일을 주셨지요.

- 강해지기 위해서라면 굳이 말리지 않겠습니다. 무엇보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어떤 일이 있어도 신앙만큼은 포기해서는 안되며 힘들수록 기도해야 한다는 모범정답같은 답메일이 올 것이라 생각했던 저로서는.. 신부님 말씀은 정말 의외였죠.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언젠가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시는구나. 하지만 나는 어떤 장담도 하지 못할 만큼 너무 지쳤는걸.’

 

그런데..

이제 내게 신앙은 예전처럼 소중한 것이 아니라고 마음먹은 바로 직후..

오랫동안 기다렸던 좋은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1년 6개월만의 일이었죠.

 

사람이라는 것이 참 묘합니다.

그 좋은 소식을 들었을 때..

두려운 마음이 먼저 들더군요.

지금의 제 모습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하느님을 믿으며 계속 기대하느니 차라리 하느님을 바라보지 않고 불행을 내몫으로 받아들이겠다고.. 그래야 억울하지 않을 것 같다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기보단 차라리 대결하며 사는 것이 편하다고..

세상 사람들 모두가 그렇게 살아도 다 나보단 행복하지 않냐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런 행운이라니..

오히려 좋은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리고 다음 순간..

제 자신에 대해 무척 실망스러웠습니다.

비참할 정도였죠.

 

언젠가.. 지도신부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를 보면 욥기가 생각 나. 그렇게 진실한 신앙을 보였던 욥도 큰 고통을 겪었지. 시련이라는 것.. 사람을 크게 자라게 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단다. 이 시간들을 잘 겪으면 큰 사람이 될 수 있을 거야.

 

그 말씀이 생각나더군요.

그리고 후회가 밀려왔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릴 걸..

조금만 더 꿋꿋하고 의연한 모습을 보일 걸..

 

결국 시련이라는 기회를..

이렇게 속절없이 놓쳐버렸구나..

그 가운데 성장하지 못하고.. 결국 이 정도 그릇밖에 되지 못했구나..

졸음을 못 이기고 때를 놓쳐 혼인잔치에 참석하지 못한 어리석은 처녀의 꼴이 됐으니..

 

이젠 고통의 순간들을 즐겁게 받아들이겠습니다.

하느님께 등을 돌려도.. 그것조차 축복하시는 하느님께..

한번 배신한 사람은 또 배신하기 마련이라는.. 그런 실망을 안겨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눈물을 주신 후에 웃음을 지어주시고..

그 후에 부끄러움을 느끼게 해주시고..

그럼에도 용서받았음을 확인시켜주시는 분..

이렇게 해서 주님을 알게 되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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