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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금 희생된 예수와 성모(한겨레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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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희 [muull] 쪽지 캡슐

2002-09-23 ㅣ No.2376

다시금 희생된 예수와 성모/ 박노자

 

6월의 햇볕 아래 지친 그들의 얼굴이 지금도 기억난다. 그들은 아주 오랫동안 대학 본관과 대문 앞에서 재단과 교직원, 학생들에게 호소했다. 그들은 진지한 교섭에 나서는 사쪽의 ‘성실한 자세’를 부탁했고, 자신들을 동등한 인간으로 인정해달라고 했다. 모두가 온통 들떠 있던 그 6월에, 그들은 사쪽은 물론 일반인과 학생들의 관심마저 끌지 못하고 있었다. 그 뒤 거의 100일 동안 끌어온 파업은, 인간이 인내할 수 있는 이상의 고행이었다. 사쪽이 드디어 교섭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즈음, 몰락해가는 임기말의 정권은 재계의 ‘점수’를 따려는 듯 9월11일 한국판 ‘반노동 테러’를 저질렀다. 사력을 다해 버티고 울부짖는 경희대 의료원의 여성 파업 근로자들은, 카톨릭성모병원 등의 여성 근로자와 함께 ‘전원 연행’됐다. 노동탄압의 ‘실적 올리기’ 시점 선택은 매우 탁월했다. 9월11일 같은 특별한 날에는 외신의 관심을 피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대외적 정책 홍보를 이처럼 빈틈없이() 고려하는 것이야말로, 한국 보수 정객들이 생각하는 ‘세계화’인 것이다.

여성들이 끌려가는 모습을 사진으로 본 순간, 그 ‘작전’을 명령한 자들의 역사에 대한 감각이 너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자랑하는 현재의 ‘풍요’와 ‘발전’은, 도대체 누구의 손, 누구의 인내와 고통으로 가져온 것인가 성병과 미군 범죄에 노출되는 기지촌 여성들이 나라의 중요한 외화벌이 수단 중 하나였던 1950년대에도, 주당 70~80시간을 죽도록 일한 여공의 손으로 수출 경제가 성장했던 1960~70년대에도, 고용 불안·월급 착취를 비롯한 온갖 고통을 감수하며 70%까지 비정규직으로 밀려난 여성의 희생으로 외환 위기가 일시 극복된 1990년대 후반에도, 여성들이야말로 한국 경제의 ‘숨은 저력’이었다. 한국의 ‘전근대적 근대화’를 달리 표현하면, 극소수 특권층 남성 지배의 사회를 위한 대다수 여성의 신체를 착취·희생시키는 과정이었다. 이 사회의 ‘이등 시민’, ‘성장의 밑바탕’으로 취급돼 온 여성을 향해 ‘절차적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는 이 시대에, 1979년의 ‘와이에이치(YH)사건’의 각본대로 야만적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여권 보장이 대세인 시대적 요구에 대한 ‘반역’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시대가 바뀌고 역사가 진보해도 권력자들의 머리 속에 여성에 대한 군사정권의 태도가 아직 ‘정상적인’ 것으로 기억되는 것은 ‘유사(類似) 민주주의’ 사회의 불행한 현실이다.

 

이번의 야만적인 행각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마음 아픈 화두를 던진다. 과연 제도권의 종교조직들을 우리가 계속 진정한 의미의 ‘종교’로 불러도 되는가 카톨릭성모병원 노동자 탄압에 있어 그 병원의 ‘주인’들과 경찰이 어떤 방식으로 ‘협력’했는지 아직은 충분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병원 내 성당에의 경찰 진입은 어떤 형태로든 담당 성직자의 동의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성모마리아의 이름을 딴 병원 안에서 환자들을 위해 ‘병원 공공성의 강화’를 요구하면서 성당의 십자가 밑에서 경찰들에게 짓밟힌 여성 근로자의 얼굴들은, 옛날 성상에서 볼 수 있는 성모마리아의 아름답게 슬픈 얼굴과 어딘가 닮아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짓밟히게끔 수동적인 협조 내지 적극적인 유발을 한 성직자들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예수가 못박힐 때 앞장섰던 유태교의 성직자라고 밖에 말할 수 없지 않은가

 

정권과 제도권 종교단체, 사학재단으로부터 당한 배신과 야만적인 폭력은, 한국 노동운동의 발전을 막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 밑에서 짓밟히는 ‘민주주의’의 모습은, 보수 정객들이 이끄는 ‘민주화’가 아직까지 얼마나 공허한 것인가를 증명한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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