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일 (화)
(녹)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자유게시판

박은종신부님의 외로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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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훈 [blue0118] 쪽지 캡슐

2000-02-19 ㅣ No.8773

현주님의 글을 읽으며 많은 부분을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방식으로든 그 분을 알 게 된 우리주님의 자녀들은

함께 그 분을 위해 기도하고 기억하며 잊지 말아야 합니다.

"더 이상 외롭지 않게"

 

저는 개인적으로 오래 전부터 좋은 글을 스크랩 해 놓았습니다.

그 글중에 박은종 신부님이 서울 주보에 쓰신 글이 있었습니다.

그 분의 정신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여러분과 공유하는 길도 그 분을 잊지 않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어

올립니다.

 

서울 주보(제 725호): 1991년 10월 20일자

 

말씀: 하늘과 땅이 맞닿아 있는 까닭 (박은종/시흥동 본당 보좌)

 

  높고 청정한 하늘이 사람들의 눈을 무척 재촉했던 가을 날 오후, 소박한 다짐들과 바람

이 아직 채워지지 못했는지 사람들은 바쁘게 땅만 쳐다보고 걷습니다. 아직은 하늘을 쳐

다볼 때가 아니고, 하늘을 차지할 때가 아니라고 하는 것처럼 애써 외면하고 얼굴에 잔뜩 심각한 표정을 짓는 것입니다.

  지금은 힘들게 수고할 때이고, 적당히 죄지을 수 밖에 없는 때이고 남에게 만만하게 보

여서는 안될 때인 것입니다.

  그런데 먼 곳을 보노라면 우리의 깨끗하지 못한 발이 딛고 서 있는 땅과 그와 전혀 어울

릴 것 같지 않은 하늘이 잇대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자연은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고자 하는 것일까요?

 

  *예수의 곁에서 받게 될 고통의 잔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이 영광된 자리에 앉게 될 때 그 좌우에 자신들을 앉혀

달라는, 두 제자에게 그들이 청하는 것이 사실은 영광이 아니라 고통의 잔임을 일러주십

니다. 그리고 그래도 그것을 원하느냐고 묻습니다.

  "예, 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분명하고 확신에 찬 대답이 뒤따릅니다.

  우리 모두는 한 번 이상 그 같은 대답을 하느님과 당신의 백성들 앞에서 했습니다. 세

례와 혼인 때에, 그리고 서품식과 서원 때에...

  우리는 오늘 복음의 두 제자처럼, 땅을 박차고 치솟는 비행기처럼 그렇게 출발했습니다.

"어떤 사람도, 그 어떤 고난도, 나의 발을 땅에 붙들어 맬 수 없을 것입니다. 나는 기꺼이

내 앞의 고통을 마주 할 것이며, 또 그것을 뛰어 넘어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갈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내 앞을 가로막는 것들은 왜 이리 강한가! 내 안의 탐욕, 게으름, 미움은 수그러들 줄을 모르고, 생활고와 사회라는 거대한 벽은 나를 뒤흔들어 놓는다. 예수의 잔

을 기꺼이 마시겠다고 했던 그 맹세가 부끄럽다.  좋은 게 좋은 거다. 유치하고 멍청하게

굴 필요는 없다. 일부러 악한 일을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난 다만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예수와 멀어져 갑니다. 어떻게 다시 그분께로 다가갈 수

있을까? "우리의 사제는 연약한 우리의 사정을 몰라 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와 마찬가지

로 모든 일에 유혹을 받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용기를

내어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받아서 필요한 때에 도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히브 4, 15

-16).

 

  *잃음으로 얻고 실패로 성공한다

  제 2독서는 하나의 위로의 말씀입니다.

  유혹이 많은 때입니다. 곳곳에서 우리의 정신을 쾌락에 쏟도록 자극합니다. 옳은 일이

아닌 중 알면서도 이미 거기에 길들여져 있기에 우리의 거부는 힘이 없습니다. 아니 거부

할 의사조차 실은 없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 미친 세상에서 함께 살아 가려면 그런 것에라도 마음을 붙여야 하는 까닭입니다. 그

러나 문득 우리는 하늘이 그립습니다. 자유가 그립습니다. 공허함을 공허로써 메울 수는

없는 법. 우리는 위선과 미움과 쾌락의 자리에서 뛰쳐 나와야 합니다.

  설령 많은 것을 잃어버린다 해도’’’. 소유가 항상 선은 아닙니다. 상실은 그 나름으로

하나의 의미를 던져줍니다. 우리는 잃음으로써 얻고, 실패함으로써 성공하고, 죽음으로써

삽니다.

  환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쫓아다닌 때의 일입니다. 열 분 이상을 만났었는데 나름대로 그

분들의 얘기를 들어 드리려고 애쓴 까닭에 보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한 분만이 내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남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나

는 성직자가 아닌가! 급기야 오기가 난 나는 그분과 토론을 하게 됐고 그분에게 따끔한 충

고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분에게서 나가라는 말을 듣고 말았습니다. 부끄럽고 치욕스러웠던 느낌을 감출 수

가 없었습니다. 완전히 실패였던 것입니다.

  그 환자와 이런 일이 있고 난 뒤 두 달이 지난 어느 날 나는 한 자매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대번에 그때 그 환자분의 부인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내용인 즉, 그분이 그렇

게 거부하던 고통과 사람들을 결국은 받아들이신 뒤 편안하게 선종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

고 자매님은 덧붙이기를, 이것은 모두 다 내가 그녀의 남편을 찾아주고, 또 그렇게 자극을

준 덕택이니 그저 감사할 분이라고.

  어떤 고마운 분이 이 일에 대해 저를 위로하느라고 이렇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우리가 실

패했다고 생각할 때, 하느님께서는 그것은 성공이다."

 

  *그를 따라갈 힘을 간구할 뿐

  우리는 땅을 박차고 하늘을 오르고 싶어합니다. 실패를 거부하고, 고통을 받아 들이지 못

하고, 가난을 두려워합니다. 높음을, 영광을, 성공을, 그리고 부유함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에 지치게 되면 딴 하늘을 찾습니다.

  한참 그것들에 탐닉해 있을 때는 의식하지 못하다가 갑자기 자기를 둘러 싸고 있는 것들

이 더럽다고, 추악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깨끗하고 순수한 것, 거룩한 것을 찾아 보지

만 이 땅 위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내가 있고 그가 있고 그것이 있는 이상 이 곳은 항상 더러운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늘을 봅니다. 딴 하늘을 찾습니다. 사람 냄새 나지 않는 형이상학적 무를 찾는

것입니다. 이제 제대로 하늘을 보기로 합시다. 저 멀리 이 땅과 잇대어 끝난 하늘을 보기로

합시다.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땅인가! 여기에서 하늘을 찾아야 합니다. 실패에서, 고통

에서, 더러움에서, 가난함에서, 비천함에서’’’.

  하지만 그것은 자기가 깨어지는 아픔이 뒤따르는 길, 어려운 길, 십자가의 길입니다.

  복음으로 돌아갑시다. 오늘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또 한번 묻고 계십니다. "너희가 청하

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느나? 내가 마시게 될 잔을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을 고난의 세

례를 받을 수 있단 말이냐?"(마르 10, 38).

  제자들처럼 "예,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기가 두렵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신앙은

차라리 은총에 가깝습니다. 내가 그처럼 대답하는 것은 위선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렇게 합

시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 도와주십시오. 힘을 주십시오. 제가 당신 가신 길을 따라 걸을 수 있도록, 당신이

마신 잔을 피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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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따라야 할 길과 마실 잔에 대해 아주 많이 고민해야 할 것

                같습니다. 더 이상 외롭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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