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일 (화)
(녹)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자유게시판

1-3강: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자비넘치는 사랑을 계시하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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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 [kspeter] 쪽지 캡슐

2000-08-20 ㅣ No.13191

 

새천년 복음화 프로젝트

(Millennium Evangelization Project)

 


 

제1-3강: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자비넘치는 사랑을 계시하신다.

(Talk 3: Jesus Christ Reveals God’s Merciful Love)

 


 

1301.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자비넘치는 사랑을 계시하신다.

 

 

본 강좌는 계속해서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대해 묵상할 것입니다.  그 초점은 자비에 관해서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말씀하셨듯이 " ’하느님께서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기까지’ (요한 3:16) 하셨는데도 세상에 죄가 존재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사랑이신’ 하느님 (요한 1서 4:8)께서 당신을 ’자비’로 드러내실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 13)

 

이러한 계시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사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당신의 두 번째 회칙에서 강조하셨듯이 그것은 신앙의 핵심이라 주장할만 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교황의 말씀을 살펴봄으로써 본 강좌를 시작할 것입니다.  우선, 본 강좌가 어떻게 이전의 두 강좌의 뒤를 따르고 있는가 살펴 봅시다.

 

제1강은 우리가 신앙에 대한 질문-답변 접근법이라 부르는 방식을 발전시켰습니다.  우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요한 바오로 2세와 가톨릭 교회 교리서 모두가 믿음이 하느님께서 삶에 대한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 주신 명시적인 답변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제2강에서는 믿음이신 하느님과의 대화의 본질에 대해 심화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제2강은 믿음이란 주님이요 벗이신 하느님께 자신을 의탁하는 행위라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1302. 누가 나를 구해줄 것입니까?

 

 

본 제3강은 모든 질문들 중 가장 근본적인 질문, 죄와 죄의식에 대한 물음에 대해 면밀히 살펴볼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양심의 판단을 체험하며 죄에 대한 의식(意識)을 갖습니다.  이러한 체험은 성 바오로가 하셨던 질문을 불러 일으킵니다: "누가 나를 구해줄 것입니까?"  우리가 죄의식을 느끼는 양심을 가지고 있을 때조차 우리에게 다가올 정도로 지혜롭고 강하며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요?

 

예수께서는 정확히 이러한 질문에 대해 하느님께서 자비가 넘치는 아버지이심을 드러내심으로써 답하러 오셨습니다.  우리를 우리의 죄로부터 구하실 분은 그리스도 뿐이십니다.  오직 그분만이 그러한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1303. 그 모든 것의 열쇠는 무엇인가?

 

 

성서와 교리서에 포함된 모든 세세한 내용을 보면서 어느 누군가가 스스로 다음과 같이 중얼거린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결코 다 배울 수 없을 겁니다."  우리 신앙의 모든 요소를 파악하기는 어려운 일이므로 우리는 핵심적이고 필수적인 것을 발견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신앙의 보물창고를 열 수 있는 열쇠가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바를 이해하는 그러한 "열쇠"는 존재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계명들 중 가장 큰 것은 하느님을 우리 마음과 영혼과 힘을 다 하여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임 (마르꼬 12:29-31) 을 가르치실 때 우리 주님께서는 몸소 그 열쇠를 주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다른 이들을 자신의 몸처럼 대하라는 황금률을 율법과 예언서 (마태오 7:12) 에 담겨있는 모든 내용의 요약으로서 주십니다.  

 

1304. 사랑이 열쇠이다.

 

 

이러한 성서상의 계시와 관련하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하느님께서 사랑이시라는 것이 계시의 중심 진리라 강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이라는 진실은 예언자들과 ’예언자들을 통하여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히브리 1:1) 계시되는 모든 것의 정점(頂點)을 이룹니다.  이러한 진리는 신성한 계시의 전체 내용을 비추며, 특별히 창조와 계약의 실제를 계시해 줍니다. (1985년 10월 2일, 일반 알현)

 

첫 회칙인 인간의 구원자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두 번에 걸쳐 요한 복음 3:16을 인용하심으로써 사랑에 대한 이러한 강조를 발전시키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셨습니다."  교황은 "신앙의 열쇠가 되는 진리", "육화의 으뜸 근본 진리"인 사랑으로부터 성자께서 세상에 나셨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1305.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사랑은 언제나 언제나 다른 이의 선을 사심없이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정의(定義)가 얼마나 정확한지를 알기 위해 자신의 체험을 묵상할 필요가 있을 뿐입니다.  부모는 자신의 자녀가 아프지 않고 건강하길, 따돌림당하지 않고 친구들과 사귈 수 있기를, 학교에서 낙제하지 않고 잘 해나가길 원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삶의 행복과 충만함을 가져오는 선(善)을 바라는 것, 그러한 선이 실제가 될 수 있도록 응당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루까 복음에 나와 있는 우리 주님의 가르침 되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루까 11:11-13)

 

예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위 성서 말씀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우리 자신의 고유한 인식--즉 사랑이란 다른 사람의 선을 바라는 것이라는 인식--에 호소함으로써 시작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안에 엄존하는 죄의 실제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한 인식을 여전히 지탱해 나갈 수 있고 사랑의 행위를 실천할 수 있다면, 무한하고 영원하며 완전하신 하느님께서는 사랑이 무엇인지 더 잘 알고 계시며 더 큰 사랑의 행위를 실천하고 계실 것입니다.

 

1306. 사랑

정의: 사랑은 선을 의지(意志)한다.

예: 선한 것을 주는 것.

가장 큰 선: 성령

 

루까 복음 인용은 청하는 이에게 성령을 주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럼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자신을 증여하시는 것이 됩니다.  성령은 복된 성삼의 제3위격, 하느님 자신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 사이에서 흘러 넘치는 사랑입니다.

 

교리서는 그것을 다음과 같은 식으로 설명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8.16). 그 사랑은 으뜸 가는 선물로서 다른 모든 선물들을 포함한다. 이 사랑은 "우리가 받는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 부어 주신 하느님의 사랑이다" (로마 5,5). (733)

 

이후 제4강에서 우리는 성령의 선물에 대해 보다 상세히 생각해 볼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사랑과 선(善)의 연관성에 초점을 맞춥시다.  이러한 연관성으로 인해 교황께서는 성서의 첫 페이지에서부터 하느님 사랑의 깊은 계시를 보십니다.  매일의 천지창조 작업을 마친 후 하느님께서는, 말하자면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당신의 작업을 경탄하시면서 말씀하셨씁니다.  "좋구나."  교황께서는 바로 이 단어가 "내가 세상을 창조한 동기(動機)는 사랑이다."에 대한 코드가 된다고 이해하십니다.

 

1307. 천지창조와 구속(救贖)

본원적 사랑, 새로운 사랑

 

 

교황께서는 천지창조와 구속 사이에 긴밀한 연관성이 있으며 그러한 연결고리는 하느님의 사랑이라 보십니다.  천지창조와 구속 모두 하느님 사랑의 행위입니다.  하느님 측에서 보자면 구속은 새로운 천지창조 행위입니다.  우리가 죄로부터 구원될 때, 우리는 새로이 창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 바오로께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성 바오로의 말씀은 정확히 어떤 뜻이겠습니까? (고린토 후서 5:17; 갈라디아 6:15)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새로운" 사랑, 구속적이고 치유하는 사랑으로써 사랑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천지창조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생명을 우리와 나눌 수 있도록 우리에게 생명을 주심으로써 당신의 사랑을 계시하셔습니다.  우리를 구속하심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 사랑을 또다시 계시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수난, 죽음, 부활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발을 들여논 죽음을 쳐부수고 우리 죄를 씻어주십니다.  진정으로 우리는 다시 태어나 새 생명을 받습니다.  그럼으로써 하느님의 생명을 보다 깊이 나눌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범죄한 후라도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며 끊임없이 당신 사랑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1308. 구원의 신비

사랑: 신성한 차원과 인간적 차원

 

 

구원의 신비에는 신성한 차원과 인간적 차원이 있습니다.  이러한 두 가지 차원은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히 계시되고 결합됩니다.  또한 이러한 차원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일치를 이룹니다.

 

1309. 구원의 신성한 차원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구원의 신성한 차원은 하느님의 본질이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가지고 계신 사랑을 계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의 생명의 충만함은 성부의 선물입니다.  그리스도는 성부께서 바라시는 모든 것이 되십니다.  그리스도는 성부의 사랑이 성자께 바라시는 모든 선을 받으셨습니다.  따라서, 성부의 사랑은 흡족하게 됩니다.

 

그분께서만 아버지의 영원한 사랑을 채워 드리실 수 있었으며, 세계를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세상의 온갖 부(富)를 주시며 “천사들보다는 못하게 만드셨어도” “하느님의 모습대로 하느님과 비슷하게” 사람을 만드심으로써 태초부터 드러난 아버지의 부성(父性)을 채워 드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첫 계약을 깨뜨리고 하느님께서 “또한 사람들과 거듭 맺으신” 훗날의 계약들을 깨뜨림으로써 어느 면에서 인간에게 거부당했던 하느님의 사랑과 부성을 그분께서 채워 드렸고 또 그분께서만 채워 드리실 수 있었다. (인간의 구원자, 9)

 

1310. 하느님의 영광

"영광은 선의 빛남이요, 모든 완전함의 투영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 『반대의 표적』 Sign of Contradiction)

 

 

아버지께서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명의 충만함은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깊고 넓은지를 드러내 줍니다.  이제 우리는 성 이레네오께서 하느님의 영광은 충만히 살아 있는 인간이라 쓰신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열쇠는 사랑과 마찬가지로 영광이 선의 견지에서 정의된다는 것입니다: "영광은 선의 빛남이요, 모든 완전함의 투영입니다" (반대의 표적, 181).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이라 이야기할 때 그것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선하심을 보여주시는 방식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셔 가장 충만히 그렇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바로 충만하신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골로사이 2:9)  

 

우리가 예수님의 충만함을 받았기 때문에 (요한 1:16), 우리는 하느님께서 사랑으로써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선물들을 받음으로써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는 그리스도의 사명에 참여합니다.

 

1311. 성사: 사랑의 선물

은총을 통한 변모

성사

 

 

성 토마스 아퀴나스께서는 하느님 흠숭이 신성한 선물, 즉 은총을 받음과 전함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가르치십니다.  은총은 성사들, 특별히 성체성사 안에서 탁월하게 흘러 넘칩니다.  성사에서 우리는 자유로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도록 함으로써 가장 완전하고도 명시적으로 "하느님께서 하느님"이시도록 합니다.  성사를 받음으로써 우리는 우리에게 은총의 선물, 즉 첫 선물이자 그 안에 모든 선물들이 담겨있는 성령을 주심으로써 우리를 사랑하시려는 하느님 뜻에 충만히 협력하게 됩니다.

 

주의 기도를 드릴 때 우리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기도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히 빛나게 해드릴" 때, 우리는 아버지의 이름에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심으로써 충만히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그리스도의 행위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의 충만함과 일치되어 생활함으로써 우리도 세상에 하느님의 영광과 거룩하심의 위대한 징표가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구원의 신비의 신성한 차원이 하느님 사랑의 계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구원의 목표는 "언제나 창조계 전체보다 위대한 사랑, 하느님 자신인 그 사랑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구원자, 9)

 

1312. 인간의 구속적 차원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정한 인간이시자 참된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구속의 신비에는 인간적인 차원도 있습니다.  충만히 살아있는 인간으로서 예수께서는 우리 자신에게 우리를 드러 내시며 우리에게 지극히 높은 부르심을 밝혀 주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계시하십니다.  

 

인간은 사랑없이 살 수 없다. 인간에게 사랑이 계시되지 않을 때, 인간이 사랑을 만나지 못할 때, 사랑을 체험하고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할 때, 사랑에 깊이 참여하지 못할 때, 인간은 자기에게도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남게 되며 그의 생은 무의미하다. 이미 말한 바 있듯이 구원자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인간에게 완전히 드러내 보여 주시는” 분이 되시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 이것이 구속 신비의 인간적 차원이다. 이 차원에서 인간은 자신의 인간성에 깃들어 있는 위대함과 존엄성과 가치를 다시 발견한다. 구속의 신비 안에서 인간은 새롭게 “표현되며” 어느 면에서 새롭게 창조된다. 인간이 새롭게 창조된다! (인간의 구원자, 10)

 

1313. 사랑의 신비

"그리스도께서는 … 인간을 바로 인간에게 완전히 드러내 보여 주시고 인간에게 그 지고의 소명을 밝혀 주신다."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헌장, 22)

 

 

구속의 신비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이러한 신비의 두 가지 차원은 사랑의 차원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며 사랑의 본질은 선(善)을 증여하는 것, 선으로 흘러 넘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증여 안에서 당신의 본질인 사랑과 하느님 자신에 충실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선 천지창조 안에서 증여하시며, 다음으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로부터 우리를 구속하시는 새로운 창조 안에서 또 다시 증여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창조되었으므로, 우리는 사랑을 위해 만들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의 생활의 무엇인지 충만히 계시하십니다.  이것이 교황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다음 구절을 결코 지치지 않고 인용해 오신 이유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 인간을 바로 인간에게 완전히 드러내 보여 주시고 인간에게 그 지고의 소명을 밝혀 주신다."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헌장, 22)

 

I. 사랑은 계시의 충만함이다.

1.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하느님은 (ㅅ) _______." (참조, 요한 3:16; 요한 1서 4:8; 자비로우신 하느님, 13)

2. 본 강좌는 (ㄱ) ________ 과 (ㅇ) ________ 문제를 고찰하고 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3.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참조, 마르꼬 12:29-31; 마태오 7:12, ’황금률’)

4.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인간의 구원자에 의하면 신앙의 진리의 열쇠는 무엇입니까?

5. 본 강좌에서 제시된 사랑의 정의는 무엇입니까?  사랑에 대한 자신의 체험을 묵상하고 이러한 정의가 정확한 것인지 생각해 봅시다. (참조, 루까 11:11-13, 로마 5:5) [사랑에 대한 심화된 묵상을 원하시는 분은 요제프 피퍼(Josef Piper)의 책, 『믿음, 희망, 사랑』Faith, Hope, Love , 그리고 C.S. 루이스의 유명한 작품,『네 가지 사랑 이야기』The Four Loves, 또는 쉘던 반 오켄(Sheldon Van Auken)의 『지극한 자비』A Severe Mercy를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6. 사랑에 관한 위의 논의와 관련하여 성삼위에서 성령의 위치는 어떻게 이해 됩니까?

7.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천지창조를 사랑을 통한 구속과 연관시키신 것은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8. 구속의 신비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ㅅ) ________ 과 (ㅇ) ________.

9. 우리는 구속의 신비의 신성한 차원을 어떻게 정의할까요?

10.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어떻게 정의합니까?  이러한 정의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의 비젼에 어떻게 영향을 미칩니까?  성 이레네오께서 하느님의 영황은 충만히 살아있는 인간이다라고 말씀하신 의미는 무엇입니까?  

11. 성 토마스께서는 은총을 어떻게 정의하셨나요?  은총에 대하여 성사는 어떠한 일차적인 역할을 합니까?  인간의 구원자에 의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구속됨의 목적은 무엇인가요?

12. 구속의 신비의 인간적 차원은 인간이 (ㅅ) _______ 을 위해 만들어졌음을 드러내 보여 줍니다.

13. 구속의 신비의 두 가지 차원은 본질적으로 사랑의 차원입니다.  사랑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께서는 … 인간을 바로 인간에게 완전히 드러내 보여 주시고 인간에게 그 지고의 소명을 밝혀 주신다."라는 자주 인용되는 말씀에 대해 묵상해 봅시다.

 

1314. 성서에 담겨 있는 사랑

성서: 러브 스토리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초점은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지식이 성서 안에서 수행하고 있는 핵심 역할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성서를 독서함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알 수 있도록" (458)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사람이 되신 이유들을 우선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를 따를 것입니다.  

 

만일 하느님 사랑의 계시가 성자께서 사람이 되신 주된 목적이라 한다면, 그리고 인간으로서 성자께서 하시는 모든 일이 우리에게 봉사하려 행하시는 것이라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질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이었나?"  아마도 그에 대한 의심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1315. 하느님 사랑을 의심함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은 성서 시작 부분에 있는 아담과 이브의 죄 이야기에서 발견됩니다.  지난 2강에서 인용하였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악마에게 유혹을 받은 인간은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창조주를 향한 신뢰가 죽게 버려 두었으며, 자신의 자유를 남용함으로써 하느님의 계명에 불순종하였다. 바로 여기에서 인간의 첫 범죄가 성립하는 것이다.  그 후의 모든 죄는 하느님께 대한 하나의 불순종이 되고 하느님의 선하심에 대한 신뢰의 결핍이 될 것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397)

 

하느님께 대한 신뢰 부족도 하느님의 실제 이미지를 왜곡시키는 것으로 기술됩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사랑으로 창조하신 사랑의 아버지임을 믿기보다는, 아담과 이브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특권에 집착하시는 분" (가톨릭 교회 교리서, 399) 이라는 뱀의 관점을 받아들입니다.

 

1316. 하느님의 고발함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적대감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설명하십니다:

 

창조주 하느님은 피조물의 정신 안에 의심의 상태, 진정으로 고발의 지경에 처해 있습니다.  인류 역사 최초로 ’의심하는 천재’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피조물은 절대선이신 하느님을 왜곡시키려 합니다.  바로 창조 사업 안에서 표현할 수 없는 방식으로 증여하시는 자체로 선, "보눔 디퓨시붐 수이"(bonum diffusivum sui)로서, 창조적 사랑으로 드러난 하느님을 왜곡하려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 Dei Verbum, 37)

 

1317. 선은 자신을 증여한다

 

 

보눔 디퓨시붐 수이는 잘 알려진 철학 명구입니다.   그것은 선은 자신을 확산시킨다 즉, 스스로 넘쳐 흐른다는 뜻입니다.  제1강에서 논의하였던 전기 충전과 같이 전파되는 성질을 갖고 있는 거룩함처럼 자신을 증여하는 것이 선의 본질입니다.  

 

이러한 자기증여가 정확히 하느님, 지고지선한 하느님께서 행하시는 바입니다.  인간을 당신 모상대로 창조하시고 그들과 당신의 우정으로 인간을 세워주신 하느님은 아담과 이브에게 당신 자신의 생명에 참여하는 선을 즈여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의 지혜와 권능의 충분한 증거를 주시며 그들을 사랑으로 섬기심으로써 그들이 자신을 하느님께 의탁할 수 있도록 합니다.

 

이러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꾐하는 자의 도움으로 아담과 이브는 하느님의 사랑을 의심합니다.  악마의 계략은 하느님 자신을 왜곡시키는 것입니다.

 

1318. 십계명은 억압적이다?

그렇지 않습니다.

 

불순종은 하느님의 사랑을 의심한 결과입니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이러한 의심은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의 자유의 원천과 선의 충만함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하느님의 한계를 보려는" 경향을 가져옵니다. (주님의 말씀, 38)  

 

여기에 어떠한 논리적 작용이 있습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사랑이 아니시라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유익을 마음에 두지 않으실 것이며 당신의 계명들은 소위 "우리를 하느님의 엄지 손가락 아래 묶어 두는" 억압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이러한 왜곡된 관점은 불순종으로 이어집니다.  그에 비추어 보았을 때 계명들은 우리가 행복으로 다가가는 것을 저해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을 자신의 특권을 빼앗기지 않으려 조바심내는 하느님으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 계명은 우리를 제한하고 강요하며 유폐시키는 것으로 보이게 됩니다.  그러나 십계명을 사랑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으로 본다면, 그 계명이 우리를 해방하는 지혜임을 깨닫게 됩니다.

 

1319. 계명들은 해방적이다

하느님의 10단계 프로그램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의심이 불순종으로 이어진다면, 순종은 하느님께서 사랑이심을 인간에게 재확신시킴으로써 회복될 수 있습니다.  인간 안에 하느님의 진정한 이미지를 다시 불어넣고, 하느님에 대한 진리를 알 수 있도록 우리를 돕는 것, 이것이 정확히 성서가 드러내는 계시의 목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노예같은 순종을 바라시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인가를 자유롭게 받아들이기를, 우리가 당신께서 우리에게 소망하시는 생명의 충만함으로 인도하는 길 안에 살게 되기를  열망하십니다.  십계명은 자유라는 하느님의 선물 안에 머물기 위하여 우리가 해야 할 것과 해서는 안될 것에 대한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1320. 사랑의 시작점들

 

계  약

해  방

계  명

자유 수호

창조

무(無)

그 열매를 따먹지 말라.

죽음의 노예

아브라함

이교

떠나라, 할례하라, 이사악을 바쳐라

다른 신(神)들의 노예

탈출

이집트의 종살이

십계명

부정의의 노예

구속

죄에 얽매인 종살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

죄의 노예

 

 

하느님께서 사랑이시라는 진리를 계시함으로써 예수께서는 특별히 도덕성과 계명에 대한 그리스도적 이해를 주고 계십니다.  이는 하느님과 당신 백성들 사이의 계약 안에서 식별 가능한 유형으로 나타납니다.

 

천지창조는 아담과 이브를 무로부터 존재로 이끌어 내시는 하느님의 전적으로 자유로운 행위로 시작됩니다.

 

마찬가지로, 아브라함과의 계약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버지의 땅을 떠나 알 수 없는 약속된 땅으로 여행하라 부르심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러한 계약은 아브라함을 한 분이시요 진실하신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설 수 있도록 해주며 그를 이교도의 공허함으로부터 구해 줍니다.

 

탈출은 당신 백성을 이집트 종살이로부터 해방시키시고자 하느님께서 행하신 기적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구속도 전적으로 하느님 사랑의 작업입니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공통된 유형은 모든 계약이 전적으로 자유롭게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작은 우리의 자유로 이어집니다.  오직 그 이후에만 하느님께서 계명을 주십니다.  이러한 순서는 계명의 목적이 전적으로 은총의 선물인 자유를 수호하는 것임을 말해 줍니다.  우리는 계명을 지킴으로써 해방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계명은 우리가 자유라는 선물을 수호할 의무를 지고 있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1321. 하느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신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 저를 버리셨나이까?

 

 

 

그리스도인로서의 실존에서 하느님께서 사랑이시라는 확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이러한 진리는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은총의 선물을 잃지 않기 위해 응당 해야 할 바를 가르쳐주는 해방하는 지혜로서 자유로이 받아들이게 합니다.

 

하느님 사랑의 풍부한 증거로 둘러 싸여 있기는 했지만 아담과 이브는 여전히 하느님께서 사랑이시라는 사실을 의심하고 하느님께 불순종합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예수께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압도적인 증거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래서 종종 하느님께서 무심하신 듯한 경우와 고통을 체험하는 우리는 여전히 하느님께서 사랑이시라는 사실을 충실히 견지해 나가게 됩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절규하십니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  이는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버리신 것으로 들리며, 고통을 받고 있는 우리 많은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보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단순히 계시지 않는다, 만일 하느님께서 계시다면 상관하지 않고 계신다, 또는 만일 하느님께서 계시고 염려하고 계시다면 하느님께서는 어떠한 행동을 취하기에는 충분히 강하지 않으시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사랑이시라는 믿음에 항구함으로써 그리스도처럼 하느님을 증거하는 위치에 있게 되는 것은 정확히 우리 자신이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상황에서입니다.  이러한 인내는 세상에 대한, 수난에 대한 우리의 승리입니다.

 

1322. 두려워 하지 말라.

당신을 도우려 내가 왔소.

 

 

우리는 해방자로서의 하느님이라는 주제가 성서 곳곳에 깃들어 있음을 보았습니다.  또다른 보편적인 주제는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창세기는 금지된 열매를 먹은 후 아담과 이브는 하느님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하느님으로부터 도망쳐 숨으려 했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반응은 아담과 이브가 하느님에 대해 새로이 갖게 된 왜곡된 관념, 즉 사랑의 아버지가 아니라 자신의 특권을 고집하는 신(神)에 불과하다는 관념과 완벽히 일치합니다.  자신의 권능과 지혜를 섬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통제하고 억압하기 위해 사용하는 그러한 신에게는 분명히 이해와 용서를 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숨으려 한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아담과 이브의 모든 아들 딸들에 상존합니다.  우리는 욥이 하느님께서 그로부터 눈을 돌려 주시길, 그를 홀로 내버려 두시길 요청하고 있음 (욥 7:16, 19; 14:6) 에서 그것을 봅니다.  그리고 우리는 베드로가 처음으로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까 5:8) 라고 반응한 데에서 그것을 발견합니다.  한 주석가는 이러한 반응은 병자가 의사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고 설명합니다: "가십시오, 저는 병들었습니다!"  죄인들은 자신이 하느님과 가까와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1323. 하느님 사랑의 목적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로마서 5:8)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생각으로 인하여, 죄를 짓고 하느님의 영광을 떨어뜨린 모든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의 계시를 필요로 하게 되었습니다.  성서는 그리스도께서는 수난하시고 죽으셨음을 끊임없이 상기(想起)시킴으로써 우리가 하느님 사랑의 목적임을 알 수 있게 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로마서 5:8)

 

이렇게 그리스도의 희생에서 드러난 우리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계시의 절정을, 충실한 가톨릭 신자들은 성체성사의 희생의 모든 봉헌에서 체험합니다.

 

1324. 성체 성사의 사랑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성체를 사랑의 견지에서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신 분으로서 성체성사 안에 현존하심으로써 우리 가운데 계속 신비롭게 머물러 계시며, 이러한 사랑을 표현하고 전해 주는 표징 안에 계신다." (1380)

 

지고(至高)한 사랑의 행위는 성체 안에서 우리와 더불어 현존합니다.  이러한 사랑은 하느님께 다가가는 데에서 발생하는 어떠한 두려움이라도 극복하고 하느님께 대담한 확신을 가지고 가까이 다가가라 호소하는 신약 성서 말씀의 기반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되었다는 것은, 우리도 그분처럼 이 세상에서 살고 있기에 우리가 심판날에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서 드러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 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요한 1서, 4:16-18)

 

1325. 사랑의 확실성

 

 

우리는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 (가톨릭 교회 교리서, 2778) 속에 살도록 부르심 받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히 드러난 계시에 기반한 신앙 자체의 확실성입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신앙은, 우리가 범죄하였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 때조차, 우리가 "담대함(parrhesia), 단순 소박함, 자녀다운 신뢰, 기쁨에 찬 자신감, 겸손한 대담성" (가톨릭 교회 교리서, 2778) 을 가지고 하느님께 다가갈 수 있도록 해줍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이시라는 진리는 "우리는 하느님 앞에 안심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기 때문입니다" (요한 1서, 3:19-20).  하느님께서 사랑이시라는 진리는 하느님께서 죄인의 죽음을 바라지 않으시고 그가 살기를 원하신다는 확신을 우리에게 줍니다 (에제키엘, 33:11).  하느님께서 사랑이시라는 진리는 하느님께서 결코 부서지고 꺾인 마음을 업신여기지 않으실 거라는 확신을 우리에게 줍니다 (시편, 51:17).  우리는 하느님께서 자비넘치는 사랑이 가득하신 분이며 기꺼이 우리를 용서하고 화해하며 치유하길 열망하시는 분임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하느님의 자비넘치는 사랑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볼 차례입니다.

 

II. 성서의 계시를 개관함

1. 교리서는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사람이 되신 첫 번째 이유들 중 하나가 무엇이라 이야기합니까?  (참조: 가톨릭 교회 교리서, 458)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2. 아담과 이브 이야기는 하느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인간의 모습을 어떻게 예시합니까?

3. 현대 세계는 어떻게 하느님을 고발합니까?  개인적으로 우리는 하느님을 어떻게 고발합니까?

4. ’보눔 디퓨시분 수이’(bonum diffusivum sui) 라는 구절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러한 구절은 우리가 사랑과 선(善)을 이해하는데 어떻게 부합하고 있습니까?

5. 하느님을 보는 두 가지 방법을 무엇입니까?  그리고 이러한 하느님에 대한 두 가지 이미지는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이해하는데 어떠한 영향을 줍니까?

6.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우리에게 당신 계명을 주신에 대해 어떠한 반응을 요청하십니까?

7. 계명들은 본질적으로 우리가 무엇을 책임지고 있음을 이야기합니까?  구원의 경제, 구원의 역사에 대해 묵상하십시오.  하느님께서 역사를 통해 당신 백성에게 허락하신 다양한 자유에 집중해 보십시오.

8. 종종 하느님께서 우리를 버렸다고 느낄 때, 우리는 고통을 받습니다.  이러한 수난의 시간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온당한 반응은 무엇입니까?  수난을 통한 우리의 인내는 신앙과 하느님에 대하여 어떠한 메시지를 전합니까?

9. 두려움은 어떻게 우리를 하느님으로부터 떼어 놓습니까?  주님께 드린 베드로의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참조, 루까 5:8)

10. 하느님 사랑이 드러난 계시의 절정은 무엇입니까?  (로마서 5:8)  가톨릭 신앙인들은 그러한 절정을 어디에서 만날 수 있습니까?

11. 교리서는 성체를 (ㅅ)________의 견지에서 설명합니다.  우리 안의 성체의 현존은 우리의 나날의 생활에 어떠한 영향을 미칩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두려움이 차지할 자리가 있습니까?  (참조, 가톨릭 교회 교리서 1380, 요한 1서 4:16-18)

12.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어디에서 우리는 주제넘은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서 확신에 차 있을 수 있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어떤 일을 결코 하지 않으실까요?

 

1326. 사랑은 죄보다 크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구속의 신비의 신적 차원에 대한 묵상을 끝내시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느님의 사랑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무엇보다도 우선 사랑은 죄보다, 약점보다, “피조물이 제 구실을 못하게 된 것”보다 위대하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사랑은 언제든지 일어나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고, 방탕한 아들을 맞으러 달려갈 준비가 언제나 되어 있으며,“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으로 부름 받은 “하느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늘 기다리며 찾는다. 이 사랑의 계시를 자비라고도 일컫는데 인간의 역사에서 이 사랑과 자비의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체적인 형상과 이름을 취했던 것이다. (인간의 구원자, 9)

 

하느님께서 계시하시는 사랑은 특별한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자비입니다.

 

1327. 자비: 사랑의 또다른 이름

 

 

자비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너무도 핵심적이어서 교황께서는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자비가득한 사랑에 대한 믿음과 동일한 것으로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아들을 믿는 것은 “아버지를 보는” 것입니다. 사랑이 세상에 와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개인과 인류 또는 세계가 연루되는 모든 악보다 강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믿는 것은 자비를 믿는 것입니다. 자비는 사랑 가운데 꼭 있어야 할 차원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자비는 사랑의 별명입니다. 악이 세상에 있고 인간을 좌우하고 사로잡으며 인간 마음속에 스며들어가 인간을 “지옥에 던져 멸망시킬” 수 있는데, 바로 이 악의 실재 앞에서 사랑이 자태를 드러내고 효력을 미치는 특수한 양상이 곧 자비입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 7)

 

이러한 이해는 우리에게 엄청난 도전을 줍니다.  우리가 성바오로와 더불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2:20) 라고 말하고 있다면, 그리고 자비가 그리스도의 사명과 자의식을 정의하는 요소라면, 마찬가지로 그것은 우리의 사명과 자의식을 결정하는 요소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1328. 탕자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의 행동은 다른 무엇보다도 "아버지 된 도리에 성실합니다. 늘 아들에게 쏟아오던 그 사랑에 끝까지 성실합니다"  이러한 사랑은 "아들이 유산을 다 날려버리고 돌아오는데도 서슴없이 집 안에 맞아들이는 행동"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탕자가 돌아온 것이 기뻐서 어쩔 줄 몰라하며 잔치를 벌이는" 데에서 보다 충만히 표현됩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 6).   

 

처음부터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이 성장하여 그의 존엄성의 충만한 진보를 이루기를 원합니다.  "자신에 대한 아버지의 성실함은 잃었던 아들의 인간성, 그의 존엄성에 온전히 집중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이 아들이 돌아온 순간에 아버지가 보였던 기쁜 감정을 설명해 줍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 6)

 

"우리는 아들에 대한 사랑, 부성(父性)의 본질에서 솟아나는 사랑이 어느 면에서 아버지가 자기 아들의 존엄성에 관심을 가지게 만들었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이 배려가 바로 아버지 사랑의 척도"입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 6)

 

1329. 제2의 사랑으로 사랑하기

 

 

탕자의 아버지의 행동과 사랑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자비넘치는 사랑을 우리에게 드러냅니다.  탕자의 아버지는 그를 두 번에 걸쳐 사랑합니다.  우선, 아버지는 아들을 잉태하였던 사랑, "늘 아들에게 쏟아오던" 부성애(父性愛)로 사랑합니다.  아버지 집 밖에서 자신이 규정한 행복을 발견하는데 실패한 아들이 돌아올 때, 아버지는 그를 새로운 사랑으로써 사랑합니다.  이러한 새로운 사랑은 수용, 용서, 복위(復位), 아들이 돌아온 데 대한 기쁨이라는 특징을 갖습니다.

 

이러한 기쁨은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두 번째, 또는 새로운 사랑의 징표이며 우리는 그것을 자비라 부릅니다.  정확히 자비란 무엇일까요?

 

자비는 악으로부터 선을 가져옵니다.  "세계와 인간에게 존재하는 온갖 형태의 악(惡)으로부터 자비가 선(善)을 이끌어내고 선을 촉진하고 회복시켜 줄 때에, 자비는 그 참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 6)

 

탕자의 아버지는 아들의 고통을 완화시키지 못합니다.  오히려 아들은 은총의 도움으로써 자신의 고통을 통하여 아버지와의 관계가 자신의 죄의 영향을 받아왔음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가 체험하는 수난을 통하여 회개와 화해가 오며, 그로써 그는 다시금 아들이 됩니다.

 

1330. 악으로부터 선을 이끌어 내심

 

 

만일 자비가 악으로부터 선을 이끌어내는 것을 의미한다면, 우리는 자비에 대한 교황의 가장 심원한 통찰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교황께서는 우리가 십자가에 목박히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자비심을 가지도록 부르심 받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죄를 피하고 덕(德)을 함양함으로써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수난과 죽으심을 묵상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을 위해서, 우리의 죄로 인해 돌아가셨다는 생각에 이끌려 마음이 움직일 때, 그리고 이러한 생각이 죄를 피하고 덕을 가꾸어 나가려는 선한 결심의 열매를 맺을 때, 우리는 문자 그대로 악으로부터 선을 이끌어 내고 있는 것입니다.  회개라는 선(善)은 우리 주님께서 희생적으로 수난하시는 악으로부터 옵니다.

 

III. 자비는 복음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다.

1.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사랑을 대신하는 특별한 이름은 (ㅈ)_________ 입니다.  이러한 특별한 사랑은 인간의 역사 안에 형상을 취하였습니다.  이러한 형상은 누구가 되었을까요?

2. 어떻게 자비는 세상에 존재하는 악의 실재에 대한 적절한 반응이 됩니까?  어떤 식으로 우리는 자비를 우리 삶을 정의하는 요소로 삼을 수 있을까요?

3. 우리의 삶을 정의하는 요소로서 자비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이해하는데 어떠한 영향을 미칩니까?  결과적으로 자비는 세상에서 아버지된 도리와 인간을 이해하는데 어떠한 영향을 줍니까?

4. 탕자의 이야기와 우리 자신의 삶 속에서 자비는 우리에게 어떠한 역할을 합니까?  다른 사람이 베푸는 자비는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킵니까?  아버지의 자비를 통하여 탕자가 알게 된 것은 무엇입니까?

5.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주님께 어떻게 자비를 베풀 수 있게 될까요?

 

1331. 인간의 존엄성

존엄성.  

명사 1. 본질적 가치 [라틴어 dignitas < dignus worthy.]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가르침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들 중의 하나는 교황께서 인간의 존엄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대담한 방식입니다.  회칙 『생명의 복음』에서 교황께서는 "인간 존엄성의 복음"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인간의 구원자』에서는 인간의 존엄성이 복음 메시지의 중심부가 된다고 가르치십니다.  사실, 교황께서는 복음은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에 대한 그 깊은 경탄이다"라 쓰십니다. (인간의 구원자, 10)

 

1332. 세상에 대한 사명

온 세상에 나가 복음을 전하여라!

 

 

교황께서는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에 대한 이 경탄이야말로 세계 안에서 행하는 교회의 사명을 결정하는 것임"을 강조하십니다.  "선교적 자세는 언제나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을 깊이 존중하는 데서부터 비롯합니다."  이는 새로운 복음화를 수행하는 사람의 자세이고 새천년 복음화 프로젝트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사랑으로부터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에게 선(善)을 전해 오셨습니다.  이러한 존엄성은 하느님의 눈으로 보시기에 너무도 크고 소중해서, 세상이 죄로 인해 훼손되자 그를 회복시키기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속으로 오시고 수난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다른 이들을 어떻게 존중하고 사랑할 것인가를 발견합니다.  

 

그리스도의 생각의 윤곽은 이런 것입니다.  은총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본질을 나누며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듯이 우리도 사랑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에 열중하고 있는 분으로 당신을 계시합니다: 죄를 통해 상실한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도록 돕고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인간에 대한 섬김을 자신의 삶의 중심으로 삼아야 합니다.

 

1333. 전치(轉置)된 중심?

 

 

이러한 강조는 그리스도교의 초점과 중심이 하느님으로부터 인간으로 전치되었음을 의미할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교황의 시작점은 그리스도 안에 계시되신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섬김을 받으러 오시지 않고 섬기러 오셨습니다.

 

교황께서는 하느님 중심의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인간 중심의 사랑의 섬김으로 이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 역방향 역시 진실입니다: 인간에 대한 진정한 섬김은 그리스도 안에 드러난 계시의 충만함에 기반을 둔 것이어야 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충만히 인간에게 인간을 드러내시고 당신의 지극한 부르심을 명확히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찌기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은 충만히 살아있는 인간임에 주목하였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진리를 받아들인다면, 하느님의 이름을 드높이는데 열심인 사람은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증진시키려 노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노고는 마땅히 받으셔야 할 영광을 하느님께 드리는 특전입니다.

 

1334. 그리스도는 나를 구하실 것입니다

 

 

본 강좌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사랑이시라는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충만히 계시하신 복음의 정점(頂點)이요 총합임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랑이 죄로써 훼손되었던 인간의 존엄성 회복에 전적인 관심을 갖는 자비의 사랑으로서 구체적으로 계시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도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신앙의 확신은 우리가 하느님께 다가가고 용서를 추구하는 것을 방해하는 어떠한 두려움으로부터도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자비가 풍부하시다는 진리는 인간이 물을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 즉 죄와 죄의식과 화해에 대한 물음에 응답하고 있습니다.  성 바오로께서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누가 나를 구할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넘치는 사랑을 계시하심으로써 이러한 질문에 대한 결정적이고 풍부한 답변을 주셨습니다.

 

1335. 다음 강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사랑의 성령을 보내신다.

 

 

그러나 구속 작업은 성령을 보내시지 않고는 완결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파견도 역시 하느님의 사랑을 계시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명의 필수적인 부분입니다.  구속의 신비 안에서 성령의 역할은 제4강의 주제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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