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일 (화)
(녹)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자유게시판

대략난감 / 김복희 자매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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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갑회 [kaglara] 쪽지 캡슐

2010-07-04 ㅣ No.157088


자매님의 글 중에 모호하게 느껴지는 부분들이 있어 몇 자 적어봅니다.
주일 낮 교중미사 시간에 이런 글을 쓰자니 조금은 죄스러운 느낌입니다. 저희 부부는 어머님 병환 이후부터는 주로 토요일저녁 특전미사나 주일 저녁미사에 참례하기 때문에 주일 낮에 시간이 좀 생겨서 몇 자 적기로 했습니다.

자매님 말씀 중에 “자가 선전(대리선전?)이 웃겼다”는 말도 있고, “자가 선전이라고 보는 것은 개인적인 사견이니 무시하셔도 됩니다.”라는 말도 있는데요, 세상의 모든 글이 사실은 자기선전 아닐까요? 자매님의 글들도 실은 다 자기선전이 아닐까요? 특히 “그리고 저의 양심. 무슨 글이건 글을 올리기 전에 반드시 주님께 여쭌 후에 올립니다. 만약 제게 들려주시는 말씀을 제가 잘못 알아듣고 있다거나 제가 이곳에서 하는 말과 행동이 주님의 뜻에 어긋난다면, 주님께서 저를 치실 겁니다. 기다려 보시면 알게 되겠지요.”라는 말은 좀 우스운 자기선전이 아닐까요?

남을 증오하고 헐뜯고 상처 입히는 글을 써서 올리기로 작정을 하고 나서 하느님께 기도를 하십니까? 그런 글에 하느님께서 응답을 하십니까? 자기 편의대로 하느님을 파는 건 아닐까요? 어떤 일에 그렇게 함부로 하느님을 끌어들이고 팔아대는 것은 올바른 신앙행위가 아닐 것 같은데요. 안 그렇습니까?

‘자가 선전’이라는 보는 것은 개인적인 사견이니 무시하셔도 된다고 하셨나요? 왜 그렇게 개인적인 사견을 함부로 공적인 게시판에 올리십니까? 그런 사견은 사적인 자리에서나 말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공적인 게시판에 올려놓고 나서 개인적인 사견이라고 하면 우스운 말아닙니까?

“특정 신분/직업과 관련된 호칭 사용에 거부감을 느껴서입니다. 일테면 교수님, 작가님이라는 칭호 사용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왜냐하면, 이곳은 신분을 내세워도 괜찮은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셨죠? 그럴 듯해 보이는 말이면서도 억지가 숨어 있다고 느낍니다. ‘형평’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환경미화원을 끌어들이는 말도 했는데, 사실은 그런 말이 더욱 그분들을 곤혹스럽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드십니까? 겉으로는 그런 직업을 가지신 분들을 배려하는 모양새지만, 그런 언급 자체가 그분들께는 오히려 더욱 모멸감을 안겨줄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요하 막시모씨는 상황에 따라 작가 신분을 밝힌 적들은 있지만 작가로 불러달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대접해 달라고 한 적은 더욱 없습니다. 독자들 중에는 그를 작가님으로 부르기도 하고, 선생님으로 부르기도 하고, 형제님이나 씨로 부르기도 합니다. 그건 누구나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일입니다. 작가는 일정 부분 ‘공인’ 신분이지만, 지요하씨가 대접을 받기 위해 굿 뉴스 게시판에 글을 올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편리한 대로 호칭을 사용할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지요하씨가 김복희 자매님에게서 대접을 받기는 원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 역시 자매님 자유입니다. 하지만 대접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 그렇게 증오심과 엮어서 방출하는 데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습니다. 자신의 관점만을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지요하씨의 글을 좋아하는 분들, 감동하고 공감하는 분들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행패에 가까운 독단이라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더는 님의 글에 관여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관여해봤자 소용없다는 판단에. 비슷한 사람들이 부부가 되는지 아니면 살다 보니 닮아지는 건지 모르지만, 두 분 성향이 참 많이 비슷하십니다^^”라는 너는 유치해서 언급하기 싫지만 그래도 몇 자 적어봅니다.

‘관여해봤자 소용없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도대체 무슨 소용을 원하셨는지요? 왜 그렇게 자기 멋대로 관여를 하고 소용을 원하시는지요? 물론 사람은 자기 멋에 산다고들 합니다만, 너무 주제넘은 짓이 아닐까요? 어떤 사안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전후좌우 맥락을 살펴서 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 주관에 따라 함부로 관여를 하고 또 소용이 없다고 하시니, 쓸데없이 혼자서 장구치고 북치는 거 아닙니까?

우리 부부, 성향이 비슷한 거 맞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늘 일치를 이루며 살고 있습니다. 그게 잘못된 겁니까? 부부는 서로 닮으면 안 되는 겁니까? 또 우리 부부의 성향이 나쁜 겁니까?

우리 부부는 하느님 신앙 안에서 일심동체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나는 개신교 신자로 살아오다가 지요하씨와 만나 천주교 신자가 되었습니다. 지요하씨를 만나 천주교 신자가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다행스러운지 모릅니다. 또 천주교 신자로 성가정을 이루고 착실히 신앙생활을 하는 삶에서 큰 보람을 느낍니다.

나도 노처녀 딱지가 붙은 처지이긴 했지만 나이가 마흔이나 된 사람과 결혼을 할 때는 큰 이유가 있었습니다. 가진 것도 없고 잘 생기지도 못하고 확실한 직장 직업도 없는 사람에게 마음을 준 동기는 그의 작품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소설들을 읽고 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가슴을 뭉클하게 하고, 콧마루를 찡하게 하고 눈물을 핑 돌게 하는 감동 때문에, 평생 동안 그의 삶을 돕고 그의 문학을 돕고 싶은 마음으로 결혼을 결심했던 거지요.      

      
이렇게 감동적인 이야기를 지어내는 사람은 가슴이 그만큼 따뜻하고 치열하고 아름다울 거라는 그 기대와 확신을 확인하며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는 늘 자신의 신앙과 삶을, 또 문학과 삶을 일치시키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는 내게 하느님 사랑과 정의의 관계를 설명해 주었고, 정의를 모르거나 외면하는 사람, 의분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의 사랑은 위선이고 거짓이라는 말을 하곤 했습니다. 나는 그의 권유에 따라 전교조에도 가입했고, 민주화 운동의 여러 가지 상황도 알게 되었습니다. 또 그의 권유에 못 이겨 고장의 문학단체에도 정식으로 참여하여 글도 쓰게 되었습니다.

최근에는 그를 따라 오체투지 순례기도에도 참여했고, 용산미사에도 여러 번 참례했습니다. 그런 일을 함께 하면서 남편을 더욱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도 갖게 되었고, 부부일체, 일심동체의 실감을 얻기도 했답니다. (어제 기말시험을 끝낸 조카아이가 큰집에 오는 주말만 아니었다면 우리 가족은 모두 서울광장의 ‘4대강 사업 중단을 위한 범국민대회’에 참가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우리 부부의 그런 성향이 김복희 자매님의 눈에는 못마땅하게 보이시는 모양이죠? 그러시면 그렇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게 더 옳지 않을까요? 사실은 바로 그것인데, 괜히 호칭이 어떠니 굿자만사가 어떠니 하며 뭔가를 가장하는 것은 너무 속보이는 짓이 아닐까요?

글을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한 가지 묻겠습니다. 김복희 자매님이 게시판에 무슨 글을 올릴 때마다 하느님께 기도를 한다고 하고, 또 지요하씨에게 ‘가슴에 손을 얹고 주님과 함께’ 생각해 보기를 권하셔서요, 저도 같은 말을 해드리면서 한 가지 묻겠습니다.

얼마 전 지요하씨가 쓴 글 중에 이런 구절이 있었지요.

【선한 의지를 가지고 쓴 글을 부정하는 것이야 개인의 성향이나 취향에 따른 일일 수도 있겠지만, “글만으로 신앙을 말하기란 얼마나 쉬운 일인지요. 향기를 맡을 수 없는 행위는 위선까지는 아니더라도 하느님을 기만하는 게 아닌지요.”라고 한 말은 아무래도 지나친 망발 같습니다. 내 글이 재미없어 읽지도 않는다는 분이 무엇을 근거로 내가 하느님을 ‘기만’했다고 하십니까? 그 기만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명확히 적시할 수 있습니까? 말을 그렇게 함부로 해서는 안 되지 싶습니다.】                

그 구절을 소개하면서 묻겠습니다.
무엇을 근거로 지요하씨가 하느님을 기만했다고 하셨습니까?
그 ‘기만’의 근거를 구체적으로 명시해 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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