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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해드리고 싶은 두편의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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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적 전쟁(Cultural War)이란 생명의 문화(Culture of Life) 대 죽음의 문화(Culture of Death) 사이의 대립과 갈등을 의미합니다.
문화적 전쟁과 두편의 영화
(The Cultural War and Two Films)
조카 켈리와 함께
달라스 대학 철학과 교수 Janet E. Smith, PhD Associate Professor of Philosophy University of Dallas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한 우리 대통령(빌 클린턴)에 대한 대중적이고도 의회적인 차원의 지지를 두고 어떤 이들은 문화적 전쟁의 정치적 전장에서의 패배를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완전히 의기소침해지지 말자는 충고를 받습니다만, 승리에 대한 기대없이 싸울 것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다른 전선(戰線)에 보다 더 역량을 집중합시다 (저는 이를 성체 조배 참여를 의미한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또는 우리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완전한 피난처(예, 홈스쿨)로 은거하고 주의깊게 적과 싸워 나가기 시작해야 한다. 어둠은 더욱 맹렬하게 우리를 덮쳐오고 있습니다. 저는 그렇지 않다고 부정할 수 없겠습니다.
여전히, 빛은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마저 그분을 볼 수 있도록 칠흙같은 어둠 속에서 가장 밝게 빛난다는 사실을 기억하도록 합시다. 대중(大衆)은 공립학교들의 통탄할만한 상태, 혼외임신의 심각한 문제, 영화와 텔레비전에서 끊임없이 벌어지는 대대적인 폭력 묘사에 경각심을 갖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리틀톤(Littleton)에서 발생했던 참극과 더불어 점점더 많은 사람들은 우리 문화에 심각한 무엇, 심각할 정도로 잘못된 무엇이 있음을 인식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무시당했던 카산드라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런 진전이 있다 해도 때로는 그 속도가 너무도 느리기에 거의 감식 불가능한 듯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너무도 지친 나머지 우리가 이러한 전쟁을 자기 홀로가 아니라 우리의 총 사령관이신 성령의 도우심으로 싸우고 있음을 잊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은밀한 요인은 대대적으로 감추어진 놀라운 방식으로 활동합니다. 그들이 대중매체나 엔터테인먼트의 세계 ― 사탄이 즐겨 활동하는 무대 ― 에 등장하게 될 때, 그러한 놀라움은 진정으로 매우 커집니다.
최근에 나온 두 편의 외국 영화는 아버지의 사랑을 특별한 방식으로 기념함으로써 오스카상 후보에 올랐습니다. 보다 유쾌하고 잘 알려진 작품은 오스카상을 탄 이탈리아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Life is Beautiful)"입니다. 이 영화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매우 흐뭇한 마음으로 보셨다고 전해집니다. 이 도전적인 영화는 마치 모든 것이 하나의 게임인 것처럼 아들을 대함으로써 나찌 수용소의 온갖 악으로부터 아들을 보호하는 아버지를 그리고 있습니다.
물론, 실제 있을법한 시나리오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 작품은 성공하고 있습니다. 많은 즐거운 사건들을 통하여 그러한 비개연성을 무마시키고 있다는 것이 한 원인일 것입니다. 꼬리를 물고 벌어지는 놀라운 사건들은 방청객들을 즐겁게 하며 하나의 패턴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 패턴은 우리가 곧 하느님의 섭리라 인식하게 되는 만남들을 포함합니다. 결정적 순간 필요한 아이템의 도착은 기도에 대한 응답같습니다. 적들의 훼방은 그들을 난처한 처지에 빠뜨리지만 아무런 위해도 입히지 못합니다. 놀라운 창조력과 아름다움을 통한 진리 수호는 섭리적인 신적 영감의 징표로 나타납니다. 모든 것은 횡행하는 악의 공포를 초월하는 사랑어린 유머로 수놓고 있습니다.
요약한다면, 초자연적인 분께서 모든 것을 이끌고 계신 듯 보입니다. 처음에는, 아름답고 젊은 여인이 헛간으로부터 남자 주인공의 위로 떨어집니다. 결국 그는 아리아인의 우월성에 대한 우스꽝스러운 패러디를 보여줌으로써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은 후 그녀와 결혼합니다. 목욕하기 싫어 캐비냇에 숨는 그 아들의 장난스러운 버릇은 수용소에서의 파괴행위로부터 그를 구해줍니다. 악당들 ― 고루한 관료, 오만한 교사, 자기애적이고 위험스러운 나찌 ― 은 혐오스럽기보다는 오히려 어리석고도 무력하게 묘사됩니다. 선택된 이들은 가뿐한 마음을 갖고 있고 창조적이며, 무엇보다도, 타인들에 대한 섬세한 배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의 생각과 따뜻한 마음을 기민하게 움직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얼마나 우리 삶의 은혜로운 사건들이 무한한 지혜이시고 사랑이신 하느님 아버지의 손길을 드러내 주는가를 묵상하게 됩니다.
최근 저는 매우 이루어질 것같지 않았던 저의 기도를 응답받았습니다. 저는 동정 성모 마리아께 대한 매우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예식이 포함되어 있는 그리이스 정교회 예식 아카치스토스(acathistos)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있는 쪽에는 환상적인 목소리를 내는 젊은 남성 리드 싱어가 있었습니다. 반대쪽에는 폐첨부에서 울려 나오는 틀린 음을 발성하는 음습한 목소리의 젊은 남성이 있었습니다. 저는 곧 다소 특이한 기도를 했습니다 : 그가 노래를 조금 더 잘 하기를. 그러나 그 앞에 있던 젊은 여성이 뒤를 돌아보더니 그에게 무언가를 말했고 곧 그는 음량을 조절하고 바른 음정으로 노래했습니다. 저는 놀라서 다음날 그 사건을 다른 젊은 남성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제가 서 있는 곳을 보았을 때, 자신도 같은 기도를 했고 그 젊은 여성이 뒤를 돌아보았을 때 무척 놀랐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녀가 너무도 수줍음을 타는 주의깊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불평스럽고 감사롭지 못한 마음을 갖는 저이기에 저는 하느님께서 제가 드리는 너무도 많은 중요한 탄원들 가운데서도 그렇게도 사소한 기도만을 들어 주시는가 궁금했습니다. 차츰 저는,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가 보다 잘 노래 부르고 기도함으로써, 아직까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합창에 참여하고 음정조절을 향상시키며 하느님의 어머니를 온당히 찬양하길 바라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러한 진실은 ’인생은 아름다워’의 아버지가 가까스로 수용소의 음향 시스템을 통하여 아름다운 아리아를 연주하는 영광된 순간들 안에서도 그려져 있습니다. 그 아리아는 수용소의 죽음드리운 어두움을 뚫고 그의 생각 속에 영원히 자리잡고 있는 아이의 어머니에게로 이끌어 갑니다.
두 번째 훌륭한 영화는 센트랄 스테이션(Central Station)입니다. 브라질 영화인데, 보다 어두운 영화입니다. 씁쓸하고도 회의적인 나이든 여성이 등장합니다. 그녀는 문맹자들을 속여 그들의 돈을 갈취해 냅니다. 그녀의 상대는 대부분 비참한 처지의 사람들로서 그녀가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간청하는 편지를 써주길 원합니다. 그 나이든 여자는 그들 대신 편지를 써주고 돈을 받지만, 실제로 부치는 편지는 거의 없습니다. 그녀 안에서는 일말의 인간다움을 발견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충동에서, 아마도 친절심의 발로에서, 그녀는 최근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소년과 친구가 됩니다. 그녀는 재빨리 소년을 악독한 사람들에게 팔아 넘깁니다. 한 친구가 그러한 사악한 행위를 물으며 그녀를 위협하자 그녀는 소년을 다시 구해 냅니다. 그후 그녀는 소년이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를 찾는 것을 도와 주기로 결심합니다. 그녀는 소년의 아버지가 그녀 자신의 아버지같은 나약한 술주정뱅이 류의 인간일거라 믿고 있습니다. 함께 떠나는 여행에서, 소년은 그녀의 부패한 생활방식들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훔치고 무고한 사람들을 등쳐먹습니다.
그러나 도중에, 그들은 진실한 그리스도인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들은 기도와 종교를 대면하게 됩니다. 결국,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었을 때 그들은 다시금 문맹자들을 위해 편지쓰는 일을 시작합니다. 이번에는 그들은 진실하게 편지를 썼고 모든 편지들은 기도 응답을 받습니다. 그 편지들을 정직하게 부치면서 그녀에게는 변화가 시작됩니다. 소년의 아버지는 찾을 수 없었으나 그들은 소년의 형 두명을 찾게 됩니다. 형들은 아버지가 주정뱅이였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형들은 아버지에 대한 깊은 사랑을 표시합니다. 그 순간 나이든 여인은 자기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기억들을 일부 발견하게 되며 자신의 삶이 전적으로 사랑없음과 비참에 빠진 인생은 아니었음을 깨닫습니다. 결국 그녀는 소년을 통해 아버지들의 착함에 대한 믿음을 나누어 갖게 됩니다.
아버지들의 사랑을 그렇게 다른 방식으로 그려내는 데에는 아마도 성령께서 이들 영화들에 영감을 불어 넣어주셨을 것입니다. 올해는 교황 성하께서 성부(聖父)의 해로 선포하신 해이며, 우리는 하느님의 부성(父性)에 대해 묵상하게 됩니다. 서로 다른 색깔에도 불구하고, 그 두 영화에는 요한 바오로 2세의 놀라운 회칙 하느님의 자비에 대하여(Dives in Misercordia) ― 모든 구원 역사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당신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을 확신시키시려는 시도라는 ― 가 근저에 깔려 있습니다. 다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 구원 역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구약과 신약 성서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모든 일들, 교회가 가르치는 모든 것들, 모든 성사들, 성인들이 우리에게 모범으로서 제시하고 계시는 모든 것들은 우리를 하느님 아버지께로 이끌고 있으며,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몸소 그러한 사랑의 정점(頂點)이셨고 그러한 사랑의 육화이셨습니다. 그분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우리가 알 수 있도록, 십자가에 못박히도록 허락하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느님의 자비에 대하여에서 그리스도는 하느님 사랑의 계시라 칭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문화적 전쟁에서 지고 있는 듯 보이고 있는 시점에서조차, 우리 영혼을 잃지 않을 것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 모두를 당신께 되돌아 오게끔 일하고 계십니다. 세상에서 당신의 일을 거드는 역할을 하고 있는 영화를 보시고 하느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셨을까요.
센트랄 스테이션(Central Station)
http://www.spe.sony.com/classics/centralstation/frames.html
우리말 옮김 : 김 신 베드로 http://www.csse.monash.edu.au/~pringle/silent/chaplin/chapli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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