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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 너머의 의미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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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식 [goodactor] 쪽지 캡슐

2024-05-27 ㅣ No.231580

0.05%의 관심과 동력

0.05%, 이 정도의 질과 양으로, 또는 무게와 규모로, 이 정도의 관심과 동력으로 과연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과연 무얼 이루어낼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본다면 아마도 대체로 부정에 가까운 결론이 나올 것이다
대부분 뭔가의 타이틀이 걸려 있는 일들이나 사업에는 전심전력, 혼신, 사력, 온 힘을 다해 하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그런 일들이 힘들고 어려울수록 사투를 벌인다느니, 죽을 고비도 넘겼다느니, 하며 여간 어려웠던 일이 아님을 강조하기도 하고, 그런 만큼 그런 사실이었을 거라는 이해를 하기도 한다
우리 삶의 모든 일이 그런 일들의 연속이라면 우리 모두는 벌써 지쳐 쓰러져 버렸거나 움직이지도 못할 지경에, 그 긴장감의 연속으로 피가 말라 일찌감치 죽어 나갔을 지도 모른다
우리 삶의 많은 일들은 우리가 육체를 지니고 사는 만큼 그 생리에 대부분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먹고 싸고, 자고 쉬고, 그런 기초적인 신진대사를 위한 일은 우리가 함께 사는 사회 속에서 또한 이루어진다
우리 사회의 시스템은 우리 존재만큼 뭔가 대단한 지평에서 구축되고 건설되는 것처럼 보이지만(시멘트 건축물들의 육중한 무게와 부피가 느껴지는 것처럼) 실상은 상하수도, 위생, 유통, 시장, 주거, 교통 등의 기본적 실생활과 이에 대한 지원과 대책을 담당하는 사회적 인프라와 산업들로 대부분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사회 속에서 기인하고 발생할 수 밖에 없는, 그렇게 형성되고 고착된 여러 문제들, 빈부격차라든가, 기회의 불평등이라든가, 고물가와 고용불안이라든가 하는 문제들, 그리고 사유재산의 인정과 동시에 사회구성원들 각자가 책임지고 살아야 할 각자의 삶과 생계, 그리고 그 토양에서 빚어지는 경쟁 아닌 경쟁, 협력 아닌 협력, 공동이면서 사적이어야 할 연대 아닌 연대, 그런 뭔가의 불합리와 부조리를 품고 있는 삶의 현장에서는 때론 각자들이 한 만큼, 무리 짓고 연합한 시너지만큼, 각자들이 사사로이나 패거리차원에서 그 각자와 그 집단적 영리나 이익의 계산과 획득만큼, 그 목표와 목적만큼, 그렇게 결탁되고 유착된 만큼, 그런 과정과 와중에 벌이는 비위와 비리, 부정과 부패 만큼 그 결과들의 산출과 양산들은 또한 사회 전반이나 그 저변의, 기저의 많은 부분들에 영향을 끼치고 그 현상을 만들며 때론 사회의 전체나  부분부분들을 좌지우지하거나 흔들어 대기도 한다
당근과 채찍
인간에게 뭔가를 다룰 줄 아는 능력, 뭔가를 다스려야 된다는 의무가 부과된 것은 아주 오래 전, 기원전의 역사부터일 것이다
인간들에게 계급과 위계, 서열이란 그런 뿌리도 있는 것이다
사회라는 공동체를 필연적으로 이루고 살 수 밖에 없는 운명은 운명 공동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이 땅에 인간이란 이름으로 태어난 모든 이들에게 그 삶의 당면한 사실을 살라고 하는 것이다
인간들에게 자치권을 맡겨둔 것처럼 스스로의 삶들, 그 공동체의 삶은, 오랜 역사 동안 많은 시행착오와 문제들을 겪으며 언제나 그 최선이 뭔지에 대한 생각들과 확신들을, 신념들을 동시에 키워왔다
대체로 정의라든가, 합리라든가 하는 최선에 가까운 표지가 있는가 하면 불의, 부조리, 불합리 등과 같은 그 표지와 반대되는 성격과 범주에서의 불법, 범법, 위법, 불평등, 불공정, 부정부패, 비리, 비위 등이 파생되는 그 모든 것과 모든 일을 다 겪으며 말이다
그리고, 좋다 나쁘다, 선하다 악하다 정도의 의식적 판단과 분별, 감정적 호감도와 호불호를 가지고 있는 인간성의 성격상, 그 표지들은 보다 분명하고 확실한 댓가를 산출해 낼 수 있는 보상체계와 대응체계를 가지고 있어야 했다
그렇게 정의는 법체계를, 합리는 삶의 양식과 관습을 효율적이게(사회가 원활하게 돌아가고 각 구성원들의 삶의 활성화가 유기적일 수 있도록) 구축되도록 그 목표를 상정하고 그 목적을 정당화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의식과 감정을 가진 존재들, 그렇게 지성을 뿌리로 한 감각들을 가지고 있는 존재들인 인간들이 함께 산다는 것은 본능에만 맡겨둘 수 있는 차원은 분명히 아니었던 것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고대근동 지방의 법원칙은 그 원리가 단순한 이해로도 충분한 법정신이었다
등가의 원리는 모든 자연법칙 뿐만이 아니라 인간삶과 사회생활에 있어서도 당연히 정의의 근본원리로서 부족함이 없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대체로 국힘당 곽상도 같은 인간에게서 그 불의와 부정을 심하게 느끼는 것은 바로 그런 법정신의 뿌리가 이미 인간성 안에 깊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것은 정의가 인간의 양심과 얼마나 깊이 연관되어 있는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하기도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대체로 리오넬 메시 같은 축구 선수가 수천억원의 돈을 받으며 선수생활을 하는 것에 그리 큰 부당함을 느끼지 않는 것은 뭣 때문일까
무엇이 그것을 일반적이지 않은 특별함의 범주로 인정하고 그 선수에 열광하고 갈채를 보내게 하는 것일까
분명 그것 자체의 가치를(노동가치, 교환가치에만 주안점을 두고서도) 산정하는 것은 그 산업시스템의 당사자들과 종사자들일 것이다
사람들은 단지 그 결정과 행태만을 볼 뿐이다
그러나 축구를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그 즐거움만큼의 가치가 매겨져 있다고 여길 수도 있다
누가 얼마를 받고, 그게 천문학적 액수이고 하는 것은, 보는 즐거움에 비해 크게 상관할 일은 아니라고, 니가 얼마를 받든 나한테는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여기는, 바로 그런 심리가 문제의식으로까지 비약되거나 비화되지 않고 타당한 관객, 팬의 입장을 만드는 주요인일 것이다
그런 사회상들은 정의에 대해, 인간 의식과 감정선에서의 판단들과 이해들의 관점(관념)이나 정의감 같은 것에 의해 좌우될 수 있는 현상적인 정의의 현실태를 조장하기도 하는데, 결국 예외없는 빈부격차와 괴리가 그런 인간들 스스로들에 의해서도 파생된다는 파괴적인 결과들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되기도 한다
지구상의 모든 한정된 재화들을 두고 말이다
당근과 채찍이란 말은 관리의 효율성을 말할 때 쓰는 말이다
사람들은 오랜 역사 동안 말을 도구로 부려왔는데, 말에게는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적절히 써야 말을 효과적으로 부릴 수 있다는 것에 빗대어 나온 말이다
그리고, 그 당근과 채찍은 이제 말이 아니라 인간들에 대한 관리?에 있어서도 그런 효율성이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인간행위에 대해, 장려의 차원이나 증진할 필요가 있을 때는 보상도 과감해야 한다는 의식이 있고(때론 수여자나 하사자가 기분 내키는 대로 어마무시할 수도 있는) 제한이나 차단의, 금지의 차원에서는 마땅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관점에서 그것은 매우 유효적절, 시의적절한 논리라는 것이 지금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통치율로 자리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이 과연 관리만 받아야 하고, 관리만 받고 살아야 하는 존재인가는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관리라는 것은 체중관리니 피부관리니 하는 말에도 쓰이듯이, 인간 스스로가 최상의 상태라 여기는 지점의 지속가능함을 위해 해야 할 필요성으로 하는 행태일 수도 있고, 식단이니, 운동이니 하는 행태도 거의 마찬가지의 관점으로 행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들이 함께 사는 세상에서는 거의 모든 삶의 영역, 모든 분야에서 대체로 그 관리라는 것이 안들어가면 살 수 있는 삶도, 할 수 있는 일도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시스템도, 제도도, 체제도, 조직도, 집단도, 공동체들도 꾸며지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럴려면 무엇보다 인간 스스로들이 체중관리니, 피부관리니 하는 것만큼, 식단이니, 운동이니 하는 것만큼, 그 관리의 핵심, 무엇 때문에 그 관리라는 것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의식이 없이는 그 모든 일이 결국 관리를 위한 관리, 관리 아닌 관리로 그칠 공산이 크다는 것은, 결국 헛일과 헛짓거리의 경지로 빠질 위험이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할 일이다
겨자씨 한 알에 대한 오해
사람들은 때론 말을 끝까지 들어보라고 하기도 한다
그 이전에 그 말을 판단하는 것은 이해하는 게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보통 겨자씨 한 알, 씨앗 중에서도 가장 작은 씨앗인 겨자씨는 그 싹이 트고 자라나면 거의 제일 큰 나무 가운데 하나로 자라난다
작디 작은 까만 씨만을 봐서는 그게 실제로 뭔지 알 길도, 알 리도 없는 게 사람이다
보통 청원기도에 자기 바램 한 가지 정도 안 담아서 기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예수는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만 있으면 저 앞에 높은 산 두 개가, 아니 세 개, 네 개, 지리산도, 백두산도, 한라산도 다 옮길 수 있다고 말한다
어디로 옮겨야 할 필요가 있다면 말이다
지리산을 저 수도권 한 복판이나, 서울 한 복판에, 저 백두산을 인천 앞바다에 내리 꽂아두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한라산을 부산 오륙도 옆에 영도처럼 심어둘 필요가 있을 때 말이다
대체로 그런 큰 일을 바랄 때, 겨자씨 한 알 만큼은 정말 콩알 만큼 그 적당함이 못 된다
적당하지 못하다
안 맞다, 안 된다
될 리가 거의 없다
예수는 과장법을 즐겨 사용하는 랍비였던가
과연 그 모든 일을 바라며 하느님께 기도할 땐, 진정 그 콩알보다도 작은 좁쌀보다도 더 작은 겨자씨 한 알만큼의 믿음만 있으면 그 모든 일이 다 보장된다는 말인가
그런 대비, 대조는 무얼 강조하기 위한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대체로 그 겨자씨 한 알에 대한 오해를 가지고 있다
때론 하느님의 하해같은 자비로 여기기도, 하느님이 알아서 판단할 일로 말이다
그러나 기도는 무엇보다 하느님과 통할 만한 구석이 있어야 한다
곧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하느님의 전능과 함께 이루어질 하느님의 역사가 가능할 만큼의 뭔가가 통할 모든 것이 그 기도에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겨자씨 한 알이 자라나 큰 나무가 되면 많은 새들이 깃들인다고 했다
그리고 나무는 대체로 자라나기만 하면 인간들에게 특히 좋은 것이다
배나무, 사과나무, 감나무처럼 달달한 열매들을 맺는 나무들 뿐만이 아니라 오동나무, 느티나무, 삼나무까지 거의 모든 나무는 유용하고 쓸모있고, 가치가 있다
그런 겨자씨인 것이다
기도는 바로 그렇게 하라는 것이 그 기도의 가능성이나 그 기도의 성취보다 앞서 있는 진성성 있는 의미가 아닐까
겨자씨 한 알
사랑의 씨앗, 사랑의 씨앗만 있다면 하느님과 함께 그 씨앗은 그 사랑을 이룰 것이다
굳이 기도한다고 동네방네 다니지 않아도, 사람들 잘 보이는 데서 유세떨듯이 하지 않아도 말이다
마음 한 가운데 진심으로 그 사랑의 씨앗이 있다면 말이다
정의의 씨앗, 정의의 씨앗만 있다면 하느님과 함께 그 씨앗은 그 정의를 이룰 것이다
굳이 기도한다고 온 동네를 싸돌아다니지 않아도, 사람들 앞에서 일장연설을 퍼부어대지 않아도 말이다
마음 한 가운데 진심으로 그 정의의 씨앗이 있다면 말이다
하느님만이 영원히 찬미받으실 하느님이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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