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일 (화)
(녹)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자유게시판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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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연 [communion] 쪽지 캡슐

2002-05-24 ㅣ No.33885

어떤 분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다’

제 글에서 그런 느낌을 받으셨다구요.

처음엔 우헤헤.. 하며 우쭐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왠지 황송한 마음에.. 곰곰히 생각해 봤습니다.

과연 내가 법 없이도 살 사람이던가..

근데 제 결론은..

저란 사람은..

법이 없이도 살 사람이 아니라.. 법이 없어야 살 사람이더군요.. =^^=

 

전 소박한 목표를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악세서리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제가..

늘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이 있는데요.

바로 제 견진대모님께서 주신 묵주반지입니다.

 

워낙 덜렁거리고 칠칠치 못해, 허구헌 날 물건을 잘 잃어버리는 저인데도..

주신 분의 마음이 깃들여져서 그런지..

이상하게도 이 묵주반지만큼은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잠시 잃어버렸다 해도 신기하리만치 제게 돌아오곤 하구요.

처음에는 빡빡해서 돌아가지도 않았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차츰 부드러워지고 헐거워져서...

지금은 손에 익을 정도로 정이 들었지요..

 

그 묵주반지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만천하에 내가 가톨릭 신자임을 알리고 다니는데..

적어도 이 묵주반지에 부끄러울 일은 하지 말자..

 

그래서 가끔은 이런 상상을 합니다.

제가 어떤 선행을 베풀었을 때.. 혹은 칭찬 받아 마땅한 자랑스러운 일을 했을 때..

누군가 제게 "어떻게 그런 훌륭한 일을 하실 수 있어요?"라고 물으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묵주반지를 만지작거리는 거죠.

그리고 한껏 겸손한 어조로 말하는 겁니다.

- 아유.. 별 말씀을.. 전.. 가톨릭 신자거든요.

 

그럼.. 제게 질문한 그 사람은..

아!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역시 뭔가 달라도 다르구나..

새삼 이런 깨달음을 얻을 것이고.. 무척이나 감동받겠죠..

(하긴.. 이런 상상을 하는 걸 보니.. 전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은 밥말아 먹었나 봅니다. 대체 겸손은 눈씻고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다니까요..)

 

여하튼..

아무리 좋게 마음을 먹었다가도..

원체 타고난 성격은 개차반인지라..

작심삼일은커녕 작심삼초가 못 됩니다..

돌이켜보면.. 딱히 생각나는 선행이 좀처럼 없거든요.

아니, 오히려 제가 한 행동에 은근히 뒤가 켕겨 슬그머니 묵주반지를 빼놨던 기억이 더 많습니다.

그리고 묵지반지를 기억하며 딴에는 의롭게(?) 나섰다가 무참하게 봉변을 당한 적도 있구요.

 

아!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일이 하나 있네요.  

 

 

그리 오래 된 일은 아닙니다..

한 동안.. 제 근황을 볼작시면..

고추장 먹은 쌈닭이 따로 없었죠.

이것 저것 모든 게 불만스럽고 마음에 들지 않아..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한놈만 걸려라’ 주문을 외고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명동성당으로 미사를 드리러 가던 길이었습니다.

가끔 명동에서 평일 미사를 드리곤 하거든요.

 

모든 분들이 아시는 것처럼..

대중교통, 그 중에서도 지하철을 이용하다 보면..

인생의 희노애락을 골고루 경험하게 됩니다.

 

: 지하철을 탔는데 자리가 남아돌 때..

: 눈대중으로 대강 자리가 있겠거니 하고 탔는데, 앞 사람까지만 자리에 앉고 나 혼자 서서 갈 때..

: 겨우 자리 잡고 앉았는데, 다음 정거장에서 할머니 타셨을 때.

: 자리 양보하고 기특하단 소리 들었는데, 얼마 안 가 할머니 내리시고 그 자리에 도로 앉을 때..

 

여하튼..

그 날은 앞의 경우 중 ’노’에 해당하는 날이었습니다.

정말로 짜증이 나더군요.

그럴 때면 좌석에 좌정한 모든 승객들이 라이벌로 보이지 않습니까.

한껏 툴툴거리며 서 있는데..

제 앞.. 경로석에 이제 겨우 스무살이나 됐을까 싶은 양아치가 앉아있는 겁니다.

삐딱한 자세로 껌을 짝짝 씹으면서.. 그것도 모자라 한쪽 다리를 달달 떨고 있는데..

아주 눈꼴 시더군요.

 

근데 얼마 못 가서.. 어떤 할머니께서 타시는 겁니다.

젊은 녀석이 떡하니 경로석에 앉아 있는 것이 상당히 아니꼽던 차에..

속으로 ’쌤통’을 외쳤습니다.

 

그 양아치.. 할머니를 흘끗 쳐다보더군요..

아니.. 그런데.. 세상에 이런 일이..

세상에서 가장~~ 태평한 표정을 지으며 아랑곳하지도 않는 겁니다.

 

불의를 보며 참을 수 없었던 저는 계속 그 양아치를 째려봤습니다.

몇 차례 눈이 마주쳤죠.

근데도..

뭘 보냐.. 는 식의 불손한 표정으로 계속 쳐다보면서도 전혀 눈치를 못 채는 겁니다.

어라.. 너 이놈 잘 걸렸다.. 그러잖아도 몸이 근질거리던 차에..

 

그래서 정의감에 불타는 저..

참다 못해 결국 한 마디 했습니다..

- 경로석인데 어지간하면 양보하시죠. 할머니께서 타셨는데..

 

그러자 그 양아치.. 갑자기 눈에 빡~~ 힘을 주더니..

오히려 잘 걸린 건 그 양아치가 아니라 저라는 듯이..

- 이 씨XX.. (한동안 욕설이 이어짐..) 어디서 야리고 XX이야.. 죽으려고.. (런닝타임 약 3분간..).

 

힉.. 아무래도 잘못 건드렸다.. 역시 양아치는 무서워..

흠칫 놀란 저.. 비칠비칠 뒷걸음을 쳤죠..

엄한 데 성질 부렸다가.. 찍소리 못하고 잔뜩 쫄았습니다..

 

물론 지하철 안의 승객들은 모조리 딴전을 피더군요.

누구 하나 거들어 주는 사람 없었습니다.

정말 세상이 비정하다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대체 정의는 어디를 갔단 말인가.. 불의의 세상이여..

 

그래서 저는 일보 후퇴하기로 했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씀드리면 삼십육계 줄행랑이었죠.

전 목적지에 이르기도 전에.. 두 정거장쯤 가서 황급히 내렸습니다.

 

하지만 어디 제가 그대로 물러날 사람입니까..

내리고 나서 문이 닫힐 때쯤..

나름대로 보복이랍시고 확 뒤를 돌아봤죠..

그리고 턱을 치켜들고 눈을 내리깔면서 한마디 질러줬습니다.

- 저런 버르장머리하곤..

물론 문이 닫힐 때쯤 타이밍을 맞췄죠..

하지만 어찌나 무서웠던지.. 조마조마해서 심장 터지는 줄 알았다니까요..

 

그러고나서 생각하니 어찌나 열이 받고 억울한지..

그저 힘 약한 게 죄라고..

격투기라도 배워둘 것을... 정말 분하더군요.

 

머릿 속으로 뭉게뭉게.. 모락모락.. 드는 상상은..

눈 깔아.. 짜샤.. 뭘 잘 했다고.. 내가 첫사랑에 실패만 안 했어도 너만한 아들이 있어.. 어쭈구리.. 뭘 보냐.. 떫냐??.. 너 지금 내려!

이러면서 흠씬 두들겨 팼어야 했는데..

실상의 제 모습은 비굴하기 짝이 없었죠..

삶의 비애가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제 친구에게 했습니다.

입에 거품을 물면서.. 요즘 애들 버릇 없어.. 를 되풀이 하는데..

제 친구가 함께 흥분을 하더니 제게 그러더군요.

- 어휴.. 이 바보야.. 그걸 그냥 보냈냐..

- 그럼 어떡하냐.. 도저히 힘으로 안될 상대였다니까...

- 어떡하긴.. 지하철 문 딱 닫히면.. 메롱! 이라도 해주지 그랬어...

- ??!! @&^*&%*^%&*#$^ (친구들의 수준이 다 이렇습니다..)

 

이 이야기를 주위 사람들한테 했더니 모두들 그러더군요.

괜히 엄한 데 객기 부렸다가 젊은 나이에 요절하지 말고 그런 건 못 본 척하라구요.

뭐.. 봉변은 당했지만.. 그래도 전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떤 분께서는 제게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 때의 그 양아치도..

지금은 모르겠지만 나중에 세월이 지나면.. 아마 깨달을 날이 있을 거라구요.

(물론 실형을 살고 있지 않다면.. 이라는 조건이 붙겠죠.)

 

.....................

 

그다지 오래 산 것은 아니지만.. 제가 생각하기엔..

삶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잘 살려면 한없이 잘 살 수 있는 것이 인생이면서도..

또 못 살려면 끝간 데 없이 못 살 수 있는 것이 인생인 것 같거든요.

그래서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합니다.

좀 적당히 잘 살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근데 어느 정도가 적당한 정도일까..

 

저 역시 아주 평범한 사람인지라..

하루에도 수십 차례 생각이 바뀝니다.

가끔은.. 햐.. 역시 난 정말 착해. 이놈의 타고난 선량함이란.. 대체 왜 이렇게 착한 거야.. 우쭐거리다가도..

또 가끔은.. 그럼 그렇지.. 나라고 뭐 별 수 있나.. 개꼬리 삼년 묵어도 황모 못 된다더니.. 인간이 고작 이것 밖에 안되니.. 하면서 낙심하곤 합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개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아니지.. 이건 너무 교양 없는 표현인가..)

그럼.. ’그대가 하찮게 보낸 오늘은 어제 죽어간 사람이 애타게 그리던 내일’.. 이라는 말처럼..

현실의 하루하루가 모여 그 사람을 형성하고..

결국 그 나날들로 인해 나중에 자신을 평가받게 되겠지요..

 

하지만 그래도..

때로는 내세울 만한 결정적인 선행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야 나중에 마지막 날이 와도..

하느님 앞에서 의기양양할 수 있을테니까요.

마치 히든카드를 내밀듯이요.

보십시오. 제가 이래봬도 이런 사람입니다... 이렇게요..

 

근데 그것도 곰곰히 생각해보면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 것이...

그런 일들의 리스트를 꼽아보다 보면..

그런 것이 자신의 전부를 희생해야 하는 일이더군요.

자신의 목숨을 버리고 다른 사람을 위험에서 구한다거나..

일생을 바쳐 오로지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봉사한다거나..

 

그래서 가끔은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왜.. 파블로프의 개.. 있잖아요.

조건 반사처럼.. 위급한 극한 상황에서 뒤돌아보지 않고 타인을 생각하려면..

평소에 무지하게 연습을 해둬야겠다..

 

물론 이런 기특한 생각을 하는 건..

하루 중 불과 몇 초에 불과하고..

다시 생활로 뛰어들면..

악착같고 사악한 생활인으로 돌아가게 되는 게 대부분입니다.

늘 그런 것을 기억하며 살았으면.. 하는 마음인데 말이죠.

 

이런..

또 너스레를 늘어놓았군요.

아마 전..

나불나불~~ 실천도 못할 말만 늘어놓는 팔랑개비같은 사람인가 봅니다.

 

그럼.. 즐거운 하루 되시고..

늘 평안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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