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일 (화)
(녹)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자유게시판

과기원생 외아들을 잃은 조동길 교수의 슬픔

스크랩 인쇄

지요하 [jiyoha] 쪽지 캡슐

2003-06-27 ㅣ No.54035

 

                 과기원생 외아들을 잃은 조동길 교수의 슬픔

 

    

 

 

공주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국문학과 조동길 교수는 나와 ’문학동지’로 만난 20년 가까운 친구다. 그는 내 소설을 좋아하고, 나는 그의 소설을 좋아한다.

 

나는 그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첨예하고도 치열한 사회의식과 양양한 관조의 여유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매우 안정감 있는 소설미학을 접하면서 그의 조용하고도 다사로운 품성을 떠올리곤 한다. 호수의 잔잔한 수면과도 같이 늘 정갈하고도 평온한 모습을 잃지 않고 사는 그의 내면에서 치열한 사회의식이 굽이치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고 때로는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는 누구보다도 소설을 사랑한다. 소설에 대한 신뢰와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틈틈이 성실하게 소설을 쓸 뿐 작가로서의 명성을 탐하지 않는다. ’민족문학작가회의’와 ’한국소설가협회’에 조용히 참여할 뿐 중앙문단의 이런저런 일에 끼려 하지도 않고 유명 문예지의 혜택을 굳이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지방에서 지면 가치의 높고 낮음을 따지지 않고, 그가 관계하고 있는 지면이나 그의 소설을 원하는 지면에는 정성과 신고를 바쳐 어렵게 지은 작품을 아낌없이 준다.

 

1993년 ’충남소설가협회’를 창립하고 회장의 소임을 맡아온 지난 10년 동안 나는 그의 신세를 많이 졌다. 일년에 한 번씩 작품집을 내는 일에 그는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여했다. 그것도 늘 ’신작’이었다. 언제나 신작으로, 누구보다도 일찍, 그리고 일반회비 특별회비에다가 꼭꼭 ’덤’을 얹어서 보내 주곤 했다.

 

사는 동네가 다르고 거리도 멀어 그와 만나 함께 한 시간은 그리 많지 않지만, 그래도 일년에 서너 번은 만나고 전화통화도 종종 하며 살았다. 그랬으면서도 나는 그의 작품들을 기억하는 것에 비해 ’육성 언어’는 별로 기억하지 못한다.

 

그만큼 그는 말수가 적고 조용한 사람이었다. 자기 얘기를 하기보다는 남의 얘기 듣기를 좋아해서 열 마디를 들으면 겨우 한마디 할 정도였다.

 

그런 연유로 나는 그가 5대독자라는 사실도 여태 몰랐다. 그가 딸 둘과 6대독자인 외아들을 두고 있었다는 사실도 일찍이 알지 못했다. 올해 26세인 그 외아들이 주로 ’카이스트’라고 부르는 ’한국과학기술원’의 박사 과정 연구원이었다는 사실도 최근에야 비로소 알았다.

 

지난 5월 13일 한국과학기술원의 제트추진 실험실에서 폭발 사고가 발생했다. 그 사고로 박사 과정의 26살 청년 조정훈씨가 숨지고 다른 연구원 1명은 두 다리를 잃었다.

 

나는 당시 그 사실을 텔레비전 보도를 보고 알았지만, 그 사고로 숨진 카이스트 연구원이 조동길 교수의 아들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곧 그 일을 잊었고, 그 사건의 후속 보도를 방송에서도 신문에서도 접하지 못했다. 그저 내 생활 잡사에만 파묻혀 살았다.

 

그리고 내가 조동길 교수 댁의 그 비보를 확실히 알게 된 때는 장례식도 끝나고 난 이틀 후였다. 학교에 출근한 아내가 전화로 그 사실을 알려왔다. 동료 여교사 중에 조 교수의 고등학교 교사 시절 제자였던 사람이 있어서 신문에서 보았다는 그 비보를 전하며 이미 알고 있는 줄 알았다고 하더란다.

 

나는 거짓말 같은 사실에 한동안 망연자실했다. 열흘 여 전에 보았던 조 교수의 모습이 왕왕 떠올랐다. 5월 6일 공주의 한 장례식장에서 내 장모님의 장례를 치를 때 나로부터 전화를 받은 그는 즉시 달려왔다. 내 고장의 친척 친지 교우들 그 누구에게도 내 장모님의 별세 사실을 알리지 않은 나는 공주에서 조동길 교수에게만은 전화를 하고 싶었다.

 

나와 잘 아는 동료 교수 한 분과 함께 온 그는 여전히 정갈하고 평온한 모습이었다. 변함 없이 말수가 적고 남의 말을 귀담아 들으며 조용히 웃기만 하는 그에게서 나는 또 한번 호수의 잔잔한 물결 같은 평화를 한 가슴 느낄 수 있었다. 그런 그가 그 날로부터 불과 일주일만에 자식을 잃는 엄청난 슬픔을 겪게 될 줄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나는 어찌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날부터 백화산 등산길에서 조 교수 아들의 영혼과 조 교수의 가정을 위해 묵주기도 5단씩을 하면서도 내가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옳은 일일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뒤늦은 문상은 그 집의 슬픔을 더욱 키워놓는 일이 될 것만 같고, 모른 척하는 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닐 것이고….

 

다음날 아침 천안의 심규식 소설가에게 전화를 걸어 의논을 했다. 심규식 작가는 조 교수의 대학 동기로 무척 자별한 사이임을 내가 알기 까닭이었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조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걸었지만 막상은 할말이 없었다. 할말이 없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는 쓸데없는 생각만 내 뇌리에서 맴을 돌았다.

 

그러나 정작 할말이 없는 쪽은 조 교수였다. 전화기를 잡은 그는 아무 말도 못하고 울기만 했다. 내가 감히 차마 위로할 수조차 없는 그 비통함이 전화선을 타고 내 가슴 가득 전해져 와서 나도 눈물을 삼키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통화를 끝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매일같이 백화산 등산길에서 조 교수 아들의 영혼과 조 교수의 가정을 위해서 묵주기도를 바치면서도, 그리고 조 교수 댁의 그 슬픔에 ’덧슬픔’이 없기를 빌면서도, 그 슬픔에 별다른 현실적인 문제들은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한국과학기술원의 연구원이 연구실에서 실험을 하다가 폭발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면 그것은 당연히 ’순직’일 터였다. 그리고 그가 하는 일은 개인적인 일이기보다는 국가적인 차원의 일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그것은 나라와 공익을 위한 숭고한 죽음일 터였다. 그렇다면 그것에 걸맞게 모든 사후 처리가 온당하고 명쾌하게 진행되고 귀결되어야 할 것이었다.

 

나는 일찍부터 카이스트의 존재와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다. 이공계를 지망하는 젊은이들이 나날이 줄고 있는 심각한 상황 속에서 카이스트의 존재 가치가 더욱 커지는 것도 느꼈고, 과학 기술인들이 별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 이상한 풍토에서도 카이스트는 여전히 선망의 대상이라는 사실에서 다행스러움도 느껴온 터였다.

 

진실로 카이스트의 명성과 존재 가치에 걸맞게 그 과학 기술인들의 조직 안에는 상식과 양식의 틀거지가 잘 마련되어 있고, 지성과 양심이 잘 조화를 이루며 통용될 줄로 알았다. 그것은 기대이고 믿음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지난 21일 저녁 대전 MBC는 ’뉴스데스크’ 시간에 참으로 충격적인 사실을 보도했다. 뉴스 진행자가 "꽃다운 나이의 연구원의 목숨을 앗아간 과학기술원 실험실 폭발 사고가 발생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아직 원인조차 규명되지 않고 있습니다. 또 어느 누구도 이번 사고에 대해 책임지려하지 않아 유족들을 두 번 울리고 있습니다."라고 말하고는 안준철 기자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한국과학기술원 제트추진실험실에서 폭발 사고가 난 것은 지난달 13일. 과기원 박사과정의 26살 조정훈씨가 숨지고 다른 연구원 1명은 다리를 모두 잃었습니다. 실험실에 보관하고 있던 가스통 8개 가운데 수소와 공기를 혼합한 10리터들이 가스통이 갑자기 터졌다는 게 경찰의 분석입니다. 수소와 공기를 혼합한 가스는 경우에 따라 엄청난 폭발력을 갖습니다."

 

(이어 가스안전공사 관계자의 말 소개)

 

"그러나 가스통이 무엇 때문에 터졌는가는 밝혀지지 않았고, 이번 사고 때문에 처벌받은 사람도 아직 한 명도 없습니다. 죽거나 다친 사람만 있을 뿐 책임지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더구나 과기원 측은 사고 진상이 규명되기도 전에 유족들에게 형사처벌 대상으로 지목된 교직원들을 위한 탄원서부터 써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유족들은 탄원서까지 받은 과기원 측이 앞으로의 대책은커녕 사고에 대한 설명조차 해주지 않고 있다며 분통을 터뜨리고 있습니다."

 

이어 화면에 비치는 조동길 교수와 연신 눈물을 닦는 부인의 말을 잠시 소개한 다음 안준철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마무리를 했다.

 

"6대째 외아들이 비명 속에 간 것도 모자라 그의 죽음마저 헛되게 묻혀지는 것은 아닌 지,

유족들은 이번 같은 실험실 사고의 재발 방지를 위해서라도 정확한 진상이 밝혀질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나는 대전 MBC 안준철 기자의 이 보도에 큰 충격과 함께 고마움을 느끼면서 두 가지 사안을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실험실 폭발 사고의 진상이 밝혀지기도 전에 유족에게 와서 처벌 대상자들을 위한 ’탄원서’를 요구한 카이스트 고위 관계자들의 양식 문제와 사건 발생 후 오늘까지 40여 일이 지나도록 아무런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현상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여기에서 또 한번 우리 사회의 몰상식과 비겁함의 심연을 보지 않을 수 없다.

 

카이스트의 고위 관계자들은 숨진 연구원의 아버지가 대학교수라는 사실에 착안하여 ’탄원서’를 요구하는 일을 시도하였을 지도 모른다. 숨진 조정훈 연구원의 품성에 비추어 아버지 조 교수의 성격도 어느 정도 가늠하며 고려를 했을 것이다.

 

또 조 교수는 자신의 품성에 의지하여 같은 교수 신분인 카이스트 고위 관계자들의 양식을 믿는 마음으로, 그리고 책임자들에 대한 가혹한 처벌을 정녕 바라지 않는 마음으로 탄원서를 덜컥 써주었을 것이다. 얼마든지 ’무기’로 삼을 수도 있는 그 일을 그는 손에 꼭 쥐지 않고 스스로 무장 해제하듯 손쉽게 그들에게 내주어버린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조 교수의 품성을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조 교수는 평소 주변 사람들로부터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온 것으로 알고 있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말은 역설이다. 그 말은 반드시 ’법 안에서 법의 보호를 받으며 살아야 할 사람’이라는 뜻을 동시에 함유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 법으로부터 우롱을 당하기가 십상이다.

 

"걸어다니는 모습만 보아도 존경스럽다"고 말하는 사람도 그의 주변에는 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람의 품성과 인격으로부터 연유하는 것이고, 주변 사람의 감성과 관계되는 것이지 그의 사회적 능력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삭막하고 각박한 사회 생활에서는 아무런 현실적인 반대급부 같은 것을 가져오지 못한다. 오히려 손해를 보며 살기 꼭 알맞다.

 

그런 실체적인 것들이 지금 그의 삶 한복판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의 품성과 인격은 지성을 가장한 몰상식과 비양심들로부터 능멸과 유린을 당하고 있다. 대학교수이고 소설가라는 그의 신분도 철저히 무시를 당하는 형국이고, 법으로부터 전혀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한국과학기술원의 연구원이 실험실에서 원인 모를 폭발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면, 그리고 그 사건이 매스컴에도 보도가 되었다면 당연히 진상 규명이 이루어져야 하고 모든 사후 처리가 분명해야 한다. 그래야 카이스트의 풍모와 명성을 더욱 키울 수 있고,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미래를 좀더 확실하게 열어갈 수 있다.

 

그런데 카이스트의 고위 관계자들이 오늘 보여 주고 있는 행투는 너무도 치사하고 쩨쩨하다. 책임자 처벌 모면에 급급하여 진상 규명은 뒷전으로 미루고 사망 연구원의 아버지로부터 ’탄원서’를 받아내는 일부터 먼저 서둘렀다. 원인 무효가 될 수 없는 탄원서를 받아 챙긴 뒤로는 배를 퉁기듯이 유야무야한 태도로 탄원서 효력의 확대 생산에만 골몰하고 있는 눈치다.

 

그것은 지성인들의 풍모가 아니다. 카이스트의 명예와 위상을 추락시키고 더럽히는 일이다. 과학기술인들의 양심을 전체적으로 오염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그들이 사망 연구원의 아버지에게서 탄원서를 받아내는 일을 하기에 앞서 진상 규명 작업을 서두르고, 정정당당하고 명명백백하게 모든 사실을 밝히고 책임자 처벌을 자청하고 나섰다면, 조동길 교수는 자발적으로 탄원서를 쓰고 사법 당국과 사회에 선처를 호소하였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확신할 수 있다.

 

조 교수는 지금까지 과기원 측의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욕 한마디 하지 않았고, 싫은 소리 한마디 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가족들의 흥분을 진정시키며 아들의 영결식을 치렀고, 지금은 생업도 뒤로 미룬 채 사찰에서 부부가 정성을 다해 49제 천도 기도를 하며 살고 있다고 한다. 그의 온순하고도 선량한 심성이 더 이상 상처를 입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과 함께 안타까움이 참으로 크다.

 

나는 문학동지인 그가 그 크고도 무거운 슬픔을 극복하고 언젠가는 다시 소설을 쓸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빌 뿐이다.

 

 

 

*6월 21일 저녁 대전 MBS의 뉴스데스크 방송 이후 카이스트 홈페이지 게시판은 굳게 닫혔다고 한다. 그 대신 대전 MBC의 홈 게시판은 사건 관련글들로 봇물을 이루고 있다. 그 글들 중에 조동길 교수의 글이 있어 가져와 소개한다.

 

 

저는 이번 사고로 이 세상을 뜬 아이(조정훈)의 아버지 되는 사람입니다. 저도 공직에 근무하는 사람으로서, 기관에서 일어난 사고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가급적 조용하게 해결하려는 관리자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슬픔을 누른 채 저는 최대한 학교측에 협력하여 원만하게 일을 마무리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학교측의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욕 한 마디 하지 않았고, 싫은 소리 한 마디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희 가족들의 흥분을 자제시키며 영결식을 치르고, 지금은 생업도 뒤로 미룬 채 사찰에서 저희 부부가 정성을 다해 49제 천도 기도를 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고 후 40여 일이 지난 지금까지 학교에서는 공식적으로 어느 누구도 저희에게 사고 경위조차 한 번도 설명해 주지 않고 있습니다. 부원장 말로는 자체 진상보고서가 이미 6월초에 나왔다는데, 검찰 발표 이전에는 공개할 수 없다고 하며 저희에게 아무런 설명도 해 주지 않고 있습니다. 아울러 사고 사후 수습 대책에 대해서도 검찰 발표가 나오지 않았다면서 아직까지 일언반구 상의해 온 바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형사처벌 대상자에 대한 탄원서를 작성해 달라고 해서 저희는 그분들의 양식을 믿고 그것을 써서 넘겨주기까지 했습니다.

 

모든 것을 검찰 발표 이후로만 미루고 법과 규정에 의해서만 처리하려 하는 학교측의 처사에 대해 안타까움과 원통함을 금할 길 없습니다. 법과 규정 이전에 인간의 양식이라는 게 있고 상식이 있는 게 사람 사는 세상의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저희가 학교에 요구하는 것은 이번 사고의 정확한 원인 규명과 책임 있는 자들에 대한 응분의 문책입니다. 이는 유사한 사고 재발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일 것입니다.

 

또한 전도 유망했던 한 젊은 공학도(요즘 이공계 기피 현상이 심한 상황 속에서도 저희 아이는 자진해서 항공 분야 연구를 위해 더 좋은 환경의 전공을 포기하고 그쪽을 택해 공부하던 젊은이였습니다)의 희생을 계기로 우리 이공계 전체에 대한 열악한 연구 환경과 여건을 사회적 공감대로 끌어내어 개선해야만 우리 국가 미래의 동력이 튼튼해질 거라는 일념, 그렇게라도 해야 억울하게 횡액을 당한 아이의 혼령이라도 한을 품지 않고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뿐입니다. 그래서 학교측에 이공계 발전을 위한 기념 추모사업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요즘 세상에 아무리 큰 사건도 시간이 지나면 금방 잊혀지는 법인데, 정의감과 사명감을 가지고 이 사건의 후속 보도를 하시면서 사회정의를 실천하시는 안준철 기자님의 숭고한 정신에 경의를 표하면서, 이번 사건이 불행한 사고에서 우리 이공계 전체가 한 단계 발전할 수 있는 계기로 승화되기를 기원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저희 가정과 가족은 거의 모든 희망과 꿈이 사라진 암담한 절망 속에서, 정신과(프라이버시상 자세한 말씀은 못 드리지만) 치료를 받으며 하루하루 힘겹게 버티고 있습니다. 뜻 있는 분들의 많은 관심을 기다립니다.

 

경황 중에 어지러운 글이 되었습니다.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희생된 아이의 아버지 씀

 

 

 



741 0

추천 반대(0)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