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3일 (수)
(홍)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따뜻한이야기 신앙생활과 영성생활에 도움이 되는 좋은 글을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이 소망이 그들에게 전해지기를

스크랩 인쇄

이만형 [largo7a] 쪽지 캡슐

2001-03-15 ㅣ No.3054

1979년 추운 겨울 새벽녘이었다.

누군가 어느 집 대문을 세차게 두들기는 소리가 잠결에 들렸다.

아마 거의 동시에 아내도 그 시끄러운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문 좀 열어주세요." 어떤 여인의 다급한 목소리가 대문 두들기는 소리에 뒤이어 반복되고 있었다.

그제서  누군가 우리 집 대문을 두들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도둑이 들었나 ? 순간 긴장감이 뇌리를 스쳤다.

그 여인의 목소리는 더욱 다급해졌다.

나는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급한 대로 옷을 걸쳐 입고 대문을 열었다.

30대 후반의 아주머니는 거의 울먹이며, 여동생이 연탄가스 중독으로 위독하다며, 제발 세브란스 병원 응급실까지 차를 태워달라고 간청하였다. 구급차를 불렀으나 언제 올지 모르니 여동생의 생명이 촌각에 달렸으니 도와달라고 하였다.

그 순간 나는 말이 필요 없었다.

그리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 때만 해도 국산 차는 시동을 건 후 엔진에 열을 가해야 속력을 낼 수 있었다.

여동생을 형부가 업고 나왔다. 그 여동생을 태우자 식초 냄새가 차안을 가득 채웠다.

여동생은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의식을 잃고 있었다.

나는 차의 엔진이 열을 받을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비상등을 키고, 무조건 엑셀래이터를 밟았다.

그 때는 야간에 통행금지가 있는 시절이라, 차량통행이 끊긴 차도를  차가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력으로 달려서 세브란스 병원의 응급실 현관문 앞에 정차시켰다. 세브란스 병원 응급실은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그 병원에 오래도록 입원하셨기 때문에 응급실을 찾는 일로 단 1초라도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나는 응급실 복도에서 한참동안 앉아서 그 여동생이 무사하기를 빌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응급처치가 끝났다. 그 언니가 내개 들려 준, 응급처치를 담당하였던 당직의사의 말은 단 몇 분이라도 늦었다면, 그 여동생의 생명은 위험하였다고 말하였다. 정말 다행이었다. 그때서야 비로소 맨발인 나를 의식할 수 있었다.

아내와 나는 그 여동생의 응급처치가 끝난 후 집으로 돌아왔다.

 

그 다음날 저녁, 그 아주머니는 큰 수박을 사들고 찾아왔다.

정말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그리고 그 이후 얼마안가 우리는 강북의 신사동을 떠나 묵동으로 이사를 하였다.

나의 기억으로는 그 아주머니의 친정이 광주라는 사실과 그 여동생은 그 때 이화여대에 재학 중이었다. 지금 그들의 모습은 전혀 기억 할 수가 없다.

그 여동생도  지금은 아마도 40대의 엄마가 되어 있으리라 짐작한다.   

내가 그들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죽음의 문턱에까지 간 그 여동생이나 그 언니가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이 되어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더 욕심을 부린다면 그 가족 모두가 성모님께 향기 가득한 장미 꽃다발을 드리면서 행복한 생활을 하는 우리의 형제자매이기를 바란다.



476 0

추천 반대(0)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