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4일 (목)
(녹)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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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날의 작은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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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양근 [barbara59] 쪽지 캡슐

2000-05-08 ㅣ No.10787

 오늘 우리 집에는 작은 기적이 일어났다.

주님께서 내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셨기 때문이다.

오래 앉아 계시지도 못하시고, 4년 전 시할머니께서 돌아가신 것도 잊어버릴 정도로 요즘 부쩍 몸과 마음이 허약해지신 시아버님께 저 신록의 남산 구경을 시켜드리고 싶었다.

 

 더구나 오늘은 어버이날.

오랜 병석에서 잠시라도 벗어나 바깥바람을 쏘이시며 기분 전환을 하시게 해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였다. 남편은 출장 중이시고 하나밖에 없는 시동생은 허리를 다쳐 요양 중이였기 때문이다.

 

 나는 기동을 못하시는 시아버님을 어떻게 모시고 나갈 수 있을까 생각 하다가, 갑자기 동네에 있는  삼성 3119 구조단  생각이 났다.

 전화를 하여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남자 두 분만 오셔서 내 차에 태울 수 있게 해주고 그리고 돌아 올 때 연락하면 다시 집안으로 모시는 것만 도와주면 고맙겠다고 했더니 의논을 하여 아침에 전화를 주겠다고 한다. 구급 구조단이 이런 일까지 도와줄까? 그래도 어버이날 효도하려는 나를 위해 도와줄꺼야.... 혼자 자문자답하며 기다리는데, 오늘 아침에 11시쯤에 오겠다고 연락이 왔다.

 얼마나 고마웠는지 가슴이 뛰었다. 어머니와 나는 아버님의 오랜만의 외출을 서둘러 준비하였다.

응급실로 실려 가실 때 빼고는 처음 외출이었다. 집에서는 온종일 신음소리를 내며 누워 계시던 분이 신기하게도 오늘은 부기가 빠진 맑은 얼굴로 차분히 응해주셨다.

 차 뒷 좌석에 어머니 곁에 기대 앉으신 아버님의 모습이 얼마나 평화스러워 보이던지 예전의 아버님의 모습 그대로였다. 언제나 점잖으시고 항상 미소가 가득한 선비같은 분이셨기에 머리도 하얗게 세어 마치 신선처럼 느껴지기까지 하였다.

 우리는 소풍 나온 사람들처럼  들떠 있었다. 나는 운전을 조심하며 우선 동네를 한바퀴 돌면서

 

  "아버님, 여기 외환은행 기억나시지요?"

  "아버님이 아이들 과자 사주시던 이 슈퍼 기억나세요?"

  "정한이 업고 유치원 버스 태우던 여기 기억나세요?"

  "유빈이 스쿨버스 타던 곳 기억하세요?"

  "여기가 우리 가족이 다니는 성당인데 아시지요?"

 

 많은 기억들을 떠올리시게 질문을 계속하면 아버님은  "응" 하시며 바깥을 바라보신다.

 아이들 이름이 나올 때마다 아버님의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번지며 조용히 눈을 떴다 감았다 하셨다.

 

 장충단 공원에 분수는 뿜어 오르지 않았지만 마침 연등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고 곳곳에 새빨간 철쭉꽃이 만발해 있었다.

 

 먹거리 장터가 열려 있는 국립극장 뜰을 지나 남산 순환도로로 하여 남산타워 근처까지 가서 나무 숲 그늘에 차를 세우고 우리는 소풍 온 들뜬 마음으로 준비해 간 도시락을 펼쳤다. 차 에서 내리지는 못했지만 차안에서나마 창문을 열어놓고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도시락을 먹으며

 

 "아버님 우리 오늘 소풍 겸 외식, 좋으세요?" 하며 물었다.

고개만 끄떡이시는 시아버님의 모습은 몇 년만에 보는 편안한 모습이었다.

 

 옆에 앉아 계시는 어머니가 조금이라도 더 드시게 하려고 애쓰시지만 힘이 드시는 지 눈을 감고 고개를 저으신다.

 

 "눈 좀 뜨세요"

 "응. 졸려"

 "아버님 이 꽃 좀 보세요"

 "저 연한 초록색 나뭇잎 좀 보세요."

 

  별로 드시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우리는 기뻤다. 한시간도 못 버틸 줄 알았는데, 오늘만큼은 우리의 마음을 아셨는지 아버님은 고맙게도 2시간이나 견디어 주셨다.

 

 온통 연초록 빛 물결의 터널 속을 뚫고 나온 듯 우리의 마음 또한 연초록으로 짙게 물들여 져 있었다.

 

 " 3119구조단 "의 도움이 없엇다면 2000년 어버이날을 이렇게 뜻 깊게 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시어머니께서는 내 어깨를 살며시 안아 주시며 "오늘 수고 많았다. 고맙다." 하시는데 눈시울이 젖어 있었다.

 나 역시 시아버님을 모시고 용감하게 외출을 해 낸것이 무한히 기쁘기만 하고 스스로 대견해지기도 했다. 아마 그 어느 해 어버이날보다도 값진 큰 선물을 안겨드린 것만 같았다.

 

 이렇게 소원을 이루게 기적을 베풀어주신 주님의 은총에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느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자유게시판을 통해 ’사랑하는 나의 시어머니’를 쓰면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  goodnews에도 감사한다.

 

 내년 어버이날에도 오늘의 이 기쁨을 똑같이 누릴 수 있도록 또 한번 주님께 청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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