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4일 (목)
(녹)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자유게시판

사제들을 비방할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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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순 [bejoyful] 쪽지 캡슐

2001-05-07 ㅣ No.20152

1. 어차피 제 글이 제대로 이해될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굳이

또다시 글을 올릴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열띤 반응(?)에 불을 지른 이상 한 마디

정리를 할 필요가 있을 듯 해서 다시 돌아 왔습니다....^^

 

2. 먼저 제 글이 도발적이라고 생각하신 분들이 있는 듯 한데.....뭐 하긴 조금은

도발적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차피 논쟁적인 글을 쓸때는 조금은 공격적이 될 수

밖에 없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기도’와 ’사랑’을 강조하는 분들을 우습게 보거나

놀려먹을 못된 심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저는 진심으로 그러한 충고들이

하나의 도전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하니까요. 다만 저는 그분들이 이 게시판에서 정의를 요구하는 사람들게서 결핍된 무엇인가를 볼 수 있었듯이, 그분들 또한 잊고 있는 것이

지적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에게 충고를 하려면 스스로도 충고에-조금은 쓴 소리라 하더라도-

열려 있어야 할 터인데, 너무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분이 있다는 것이 조금은 유감입니다.

 

 

3. 지금부터 10년 쯤 전에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 본당 신부님한테

마음이 무척 상했고 그때문에 아주 유치한 반항을 시작했습니다. 교리시간에 미사가 끝나는 순간은 파견강복 때라고 들었던 터라, 파견 강복이 끝나면 신부님이 퇴장하기 전에 일어나서 나가버리기 시작했던 거지요. 그리고 강론 중에는 제일 앞줄에 앉아서 주보를 보거나 아니면 노골적으로 투덜거리기도 했었답니다.

(아, 보통 미사때 제일 앞줄에는 성당에서높은 분들이 앉으실 때가 많지요...^^)

 

한 달쯤, 그러니까 네 번쯤 그렇게 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어느날 저녁미사를 보러 성당으로 들어가던 소년은 ’개처럼’ 질질 끌려 나갔습니다. 그 소년은 처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다시 성당으로 들어가다가 정문을 막아선 관리 아저씨에게 다시 가로 막혔습니다. 그때 18살이었던 소년은 ’교회가 사람을 쫓아 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아야 했습니다.

 

10년 후에 어떤 주일학교 게시판에서 한 소년이 교사들과 보좌신부님께 도전적인 글들을

올려 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어른이된 전의 그 소년은 관심있게 그 본당 교사들과 다른

학생들이 이 문제아(?)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지켜 보기 시작했습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 ’너 성당에 잘 안나오지 그렇지?’, ’맘에 안들면 주일학교 나오지 않으면 될꺼 아냐!’,’우리를 위해서 이렇게 고생하시는 선생님들께 너는 도대체

너는 도대체 뭐냐!’..조금만 관심있게 살펴 보았다면 그저 일시적인 반항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알 수 있었을 일에 쏟아지는 비난을 지켜 보면서 제가 더 충격을 받았던 것은

하느님께서 불러 주신 그 소년에게 ’싫으면 가라!’고 하는 동료 학생들을 교사들 중

누구도 나무라거나 제지 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10년 전이나 후나 교회는, 아니죠 교회를 이루는 우리들의 미숙함은 변함이 없었던 것입니다. 저로서는 ’내가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교회 안에서 상처 입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 ’그의 절망과 아픔은 나의 상상을 초월 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인정할 수 없다면 그가 가진 사랑이란 눈물 없는 절반의 사랑일 뿐이라고 믿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성당에서는 한 없이 훌룡한 믿음을 가진 듯 보이지만, 자신 앞에 고통스러운 문제들이 닥쳤을 때 점을 치러 다니거나 쉽게 냉담에 빠지거나 사이비 종교를 추종하거나 무슨 무슨 신비 현상들을 찾아 다니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바로 내 상처와 고통과 분노를 이 공동체가 받아 줄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까?

 

4. 혹시라도 제가 ’신부님들을 욕할 자유’를 옹호하고 있다고 생각하셨다면 그것은

틀린 생각입니다. 제가 이렇게 긴 글을 적어 가면서 지키려고 하는 것은 그 보다 더 큰 자유입니다. 아파할 자유, 그것이 비록 유치하고 못난 것이라 하더라도 아프면 아프다고

말할 권리를 지키려고 할 따름입니다. 그것이 누구 때문이건....

 

혹시 중병을 앓는 가족을 간병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때때로 그들이 보여주는 이기적인 태도와 엄살에 짜증이 나보신 적도 있겠지요? 그렇다고 가족에게 너는 왜 그것도 못 참느냐고 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혹시라도 그렇게 말하신 적이 있다면 그 후에 느낌이 어떠시던가요? 이 곳에서도 자기가 너무 아프다고 말하는 분들이 간혹 계십니다.

간혹 그들의 말이 엄살 같고, 짜증스럽더라도 그들을 진정 형제로 생각한다면 ’조용히 하라’고만 요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켜지는 평화와 사랑이라면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5. 마지막으로, 언젠가 들었던 짧은 실화 한토막을 소개해 올리겠습니다...^^

어떤 교구에서 서품을 앞두고 피정에 들어갔던 어떤 신학생이 주교님과 면담을 하다가

서품 보류 처분을 받고 끝내는 신학교를 떠나게 됐답니다. 그러자 그 주변에서는 당장

갖가지 소문이 나기 시작했지요. ’숨겨진 여자 문제가 드러났다더라’는 둥...^^

 

어려운 결심 끝에 아들의 신학교 행에 동의했고 평소에 나무랄 것 없는 신학생 아들을

자랑스러워 했던 그 어머님은 상심한 나머지 피정을 가셨답니다. 몇일 간의 피정이

끝나고 어느 신부님 앞에 선 그 어머님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왔을까요?

 

"나는 하느님이 싫고 교회도 싫습니다.’ "우리 아들이 어떤 아들인데 아무리 하느님이라도 이러실 수가 있는 건가요?", "교우들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절대로!!"

 

자....이런 소리를 고해라고 듣던 신부님께서 어떻게 하셨을 것 같습니까?

 

조용히 그 어머니를 품에 안아 주셨답니다.

신부님의 품에 안겨서야 그 어머니는 울음을 터트리셨고.......

 

제가 들은 바로는 후에 그 신부님이 직접 그 학생을 만나 보고 여러 사정을 확인해

본 후에 자기가 속한 수도회에서 새로 기회를 갖도록 주선해 주셨다고 하더군요.

 

진정한 사랑은 이렇게 연대하는 사랑입니다.

정작 자기 옆에 있는 이의 고통과 상처를 헤아리는데 게으른 사랑이란

실체가 없는 허상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궂이 사람이 되셨을까요?

인간이 겪어야 할 모든 것을 함께 나누기 위함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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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개인 메일은 사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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