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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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식 [goodactor] 쪽지 캡슐

2023-11-11 ㅣ No.229682

성경을 보면 하느님의 행동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하느님이 피조물들을 대하는 모습들은 그렇게 드러나고 나타내어 보여진다
피조물 가운데 이마고 데이로 만든 사람을 대하는 하느님의 모습에는 여러 가지 성격처럼 보이는 면들도 있다
성경저자들이 성령의 영감을 받아 그런 하느님의 모습을 계시하는 데에는 인간들과의 여러 관계와 사건들을 가지고 그 이미지를 전달하고 있다
이미지라고 말하는 것과 진실을 말하는 것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몰라도 인간들의 감각적 차원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느님을 알려줄 수 있는 길이 따로, 딱히 마땅하게 있어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어쩌면 그런 양식의 현실적, 사실적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하느님이 모든 피조물들을 대하는 방식 곧 존재의 양식은 자비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고 그 계시를 전한 요한의 말에도 하느님이 자신이라고 할 만한 자신의 본질과 성격으로 모든 것을 대하는 것은 진실이다
문제는 그 진실이 드러나고 나타나는 삶의 양식이다
그런 삶의 양식에는 살아있는 생명력과 같은 모든 것, 그 모든 것이 표현되고 투사되는 생활이라든가, 행위, 행동, 실천 같은 자신의 존재를 뚜렷이 지니고 자신이란 모든 것이 있으므로 해서 그 본질과 성격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발하고 힘있게 살아있는 역동성이 보여지는 실체적 진실의 입장과 현장을 포괄하는 현재와 현실이다
하느님은 자신이 창조한 모든 피조물을 대하는 창조주이신 신이다
그리고 그 모든 피조물들은 피조체들의 종합과 총화로 각기 긴밀하고 정밀하게 통합된 세계성 속에 곧 자연계라고 하는 세상에 함께 머무르고 있다
그러면 하느님의 자비는 그 모든 것에 대해 대물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일단의 객관화되고 체계화된 시스템 차원에서 그 모든 것들이 관리되고 통솔되는 그렇게 그런 대리자의 성격을 그런 체제나 제도에도 두고 있으며 모든 피조물들의 본능이 그러한 관계성과 세계성을 실현하도록 하면서 하느님의 자비가 미치도록 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들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피조물 차원의 존재성이 이마고 데이라는 본성과 성격으로 창조되었으므로 그 본성과 성격에 보다 맞는 삶의 양식이 있어야 하고 그 삶의 양식을 통한 하느님의 자비가 미치는 관계성과 세계성을 이루어야 한다
그런 모든 실현가능성이 성경에서는 보여지고 있다

인간들은 지성을 가지고 있다
그 메커니즘이 A.I.의 알고리즘과 같은 결정체계, 본성을 보다 주관화하고 이기화시키는 판단과 이해체계, 행위를 구체화하고 삶을 생홣화하는 의식체계, 대상에 대한 사적 이미지를 조형하고 가감하는 감정체계, 그리고 그 모든 것이 감각으로 조성되는 지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 본성과 성격을 지닌 피조물인 인간들을 대하는 하느님은 어디까지나 그 모든 것을 자신의 본질과 성격대로 다한다는 것이 성경의 뚜렷한 계시의 입장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런 창조주이신 하느님과 그런 피조물인 인간들과의 관계성과 세계성, 그 삶의 양식과 현실 속에서 그러한 진실과 이미지들을 나타낸다
그렇게 모든 일들이 이야기되며 스토리텔링되며 여러 문학적 양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사람들이 자신의 지성으로 그런 이야기들을 통해 하느님을 알아 보도록 성경은 기록되었다

성경은 천천히 모든 존재와 이 세계의 진실을 알려주려고 한다
그 핵심은 창조이다
모든 것이 지성을 가진 사람의 눈 앞에 있게 된 데에는 그런 사유가 있고 그 진실은 하느님의 창조이며 하느님이라는 것을 명백히 밝힌다
존재와 세계가 있을 이유는 사물 어떤 것에도 자의적으로, 자구적으로 있지 않다는 성경의 입장은 영원히 불변하는 진리이다
그렇게 모든 존재와 세계는 그 탄생의 시스템과 메커니즘 이전에 하느님이라는 절대적인 창조주의 손길에 의해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이 세계와 모든 존재의 진실인 창조, 하느님의 창조이다
진화론자나 자연발생론자들은 언제까지나 받아들이지 않을 진실이지만 이들에게도 학구열과 탐구열에 가려진 실체와 효율에 대한 감각과 의식이 어느 순간 아이디어로 떠오른다면 보다 진지하고 사려깊게 자신들과 자신들의 삶을 돌아보게 될 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창조에 의해 존재하고 있게 되었는데 그 모든 것은 자연, 그 본능에 의해 계속 지속가능할 수 있는 사실을 이룬다
그래서 창조라는 것은 예술가가 작품을 만들고 전시하는 차원의 그 시점적 태생이 작품완성에서 종결되어 다 끝난 일처럼, 돌같이 제 모습을 간직한 채 누군가가 의미있고 가치있게 바라봐 주기를 바라는 예술가의 사전작업과 사후전시의 사물로 사용되어 끝나기만 하는 것들을 만들어 놓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살아계신 신이므로 모든 피조물들을 인간예술가마냥 돌같이, 기계같이 작동하는 사물로 그 개체를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라, 일단은 모든 생물들에게서 역동하는 생명력은 하느님이 창조의 순간에 그 첫번째 이미지로 화한 것이다
살아있다는 것, 그것보다 좋은 것은 어디에도 없다
죽음은 생명체에게 최악인 일이며 허무로 돌아가고 아무 것도 아닌 것이며 어디에도 없는 것이 된다는 것은 어둠과 무지보다도 더한 것이다

피조물인 인간, 인간생명이며 인간지성인 사람은 하느님과의 특별한 관계성과 세계성으로 그 역사를 살아가게 된다
하느님은 언제나 모든 인간들을 보고 계시며 하느님의 천사들은 그 사명을 수행하고 있다
그런 특별한 관심은 하느님의 본질과 성격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내가 만든 것이기에, 내 것이기에 갖는 관심이 얼마나 지독할 수도 있는지 사람들만 보아서는 그 진심과 진위를 알아 볼 수가 없다
물론 성경에도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들마냥 제 것이라는 것이 아니다
한 처음에 하느님은 아담과 하와와 같이 동산도 거닐고 대화도 나누었다
세상에서 인간들이 하는 방식에는 많은 구분과 차별이 있고 그런 연유로 겸상도 같이 할 수 없고 한 자리에 같이 서기도 힘든, 나아가 삶의 모든 것을 동등하게 함께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한 처음에 하느님이 피조물인 인간을, 이마고 데이인 인간을 얼마나 각별히 대했는지 성경은 담담히 알려 준다
그러나 그런 하느님 편의 관계의 실현은 어느 한 순간부터 일그러지고 끝이 나게 된다
성경에서 알아보아야 할 진실은 그 모든 것을 드러내주는 진실이며 하느님에 대해 알아야 할 일이다
하느님은 사람들에게 비극과 고생의 전조가 될 일은 하지 말라고 하신다
선악과라는 것은 성경에서도 핵심을 이루는 의미표상으로 그것이 가져오고 나타낼 모든 것은 이미 하느님의 언명과 함께 인간들의 의식과 감각의 차원에도 전달된 정보이다
문제는 그것을 임의로 다루는 인간들의 모습에 있다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얼마나 중대한 사안인지 알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자기 의식과 감각의 성취는 크고 작은 행동들에서 만족이 될 수도 있고 불편을 초래할 수도 있다
단지 그런 차원이라면 기분상의 문제일 수도 있고 감정을 유발하는 현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하느님이 직접 언명하는 부분들은 대체로 중대한 사안들이며, 특히나 인간들의 삶에 있어서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일들이다
선악과 에피소드는 단지 개인이나 집단이 지나쳐도 되는 성격의 이야기는 아니다
하느님이 존재의 조형과 세계의 조성에서 빼놓지 않고 만들어 놓은 것은 선악과뿐만이 아니다
그러나 의미나 가치를 두고 있는 문제에 있어서 동산의 다른 모든 것은 허락되지만 단 한 가지로 의미표상된 것에 대한 예외적인 원칙과 분별, 이 둘을 합해야만 나타나는 원리의 작용과 작동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알 수 있는 것이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전제와 조건은 분명히 신적인 차원에서 발화되는 것이다
그런 일이 있고 난 후 향후 발생되는 모든 악화의 진상들은 그 결과론적인 굴레와 속박이 원리와 계속되게 만들었다는 것을 창조이야기가 성경전체에 대해 갖는 모든 현실과 사건들에 어떻게 의미상관되어 있는지를 알아 보게 하는 것이다
대체로 카톨릭 교회는 원죄의 발생으로 첫 인간들이 벌인 선악과사건을 부정적으로 본다
원죄라는 개념은, 그리고 그 사건이 있고 난 후 나타난 상태와 현상들은 죽음이라든지, 엉겅퀴와 거시덤불 같은 혹독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 사물들이 창궐하는 세계현실이라든지, 인간상태와 세계성에 하느님의 순수한 의도로 실현된 모든 것이 보시기에 좋았던 원창조에 반하고 원창조를 거스르는 일대사건을 통해 니온 것이다
그렇게 성경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는 그 원리가 있음을 분명히 밝힌다
누구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누구 마음내키는 대로 마구 돌아가는 것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어니라는 것이다
그런 분명한 진리의 실현과 실사는 어째서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가 그리스도로 이 세상에 강생했어야 했는지 그 명제를 분명히 알게 해 준다

하느님이 사람들을 대하는 모양, 그리고 방식들은 성경 곳곳에서 나타난다
언뜻 보면 사심을 가지고 호불호가 갈리는 모습으로 비칠 수도 있고 그렇게 잘못 볼 수도 있지만 그런 생각들과 관점들은 오산이고 전형적인 오류이다
하느님은 사람들의 의식과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성경은 그러한 신적 직관을 꿰뚫어 보다라는 동사를 사용해 표현하고 있다
하느님의 전능함은 하느님 자신의 본질에 비추어 모든 것을 그르칠 수가 없다
그런 성격은 진정 믿을 만한 것이다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말이다
김히 인간 주제에 라는 말을 빠뜨릴 수는 없지만
하느님은 repondeonce, 곧 대응해야 할 신적 의무가 있는 것처럼 그 의지와 의도를 뚜렷히 가지고 사람들과 세상 앞에 나타난다
사람들 입장에서는 신이 있다고 해도 가족들만큼, 형제들만큼 삶의 모든 것을 공유하다시피 동거하고 동행하며 인생을 함께 살며 매일 서로를 보고 사는 존재가 아니라 쉽게 말해 무슨 일만 나면 나타나는, 무슨 일을 신으로서 해야 될 때에만 되서야 나타나는 그런 신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
성경을 잘못 보면 말이다
창조는 인간예술가보다 못한 일을 한 것이 아니다
인간예술가가 자신의 작품을 자식같이 여기며 애지중지하는 모습을 보면 가련하기도 하지만 하느님의 창조는 창조 때의 한 순간의 일로 끝내고 그 이후, 사후에는 hands off하는 그런 한 순간의 일거리나 일이 있고 난 후는 나 몰라라 방치하고 방관하는 그런 일과로의 일이 어니라 창조된 존재와 세계에 대한 지속가능한 현실태가 계속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과의 관계성과 세계성 속에서 존재와 세계가 계속되도록 하는 시스템과 메커니즘은 그렇게 하느님을 대리하는 성격을 포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선상에서 아담과 하와, 카인, 노아, 아브라함, 야곱, 모세, 사무엘, 다윗, 이사야 등은 하느님이 사람 각자나 사람들 전체 무리들을 대하는 방식들이 항상 동일한 범주에서 그 관계와 사건들에 관련해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삼위일체처럼 하느님과의 전적인 united는 각 사람의 덕의 장도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하느님을 대리하는 시스템과 매커니즘이 작동한다 하더라도 보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과의 united이며 그 모든 것을 이루는 데에 시스템과 메커니즘 속에서의 모든 일은 그 모든 것을 이루도록 작용하고 작동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떠났고, 모세는 이끌었다
그 사이의 과정적 역사는 묻혀있지만 이스라엘의 공동체성을 형성하는 일에서부터 이스라엘이 공동체의 터전을 마련하는 일에까지 이르는 그 역사에는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하고 작동하고 있으며 하느님의 개입이 있는 것이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대할 땐 약속을 말했고 모세를 대할 땐 계약을 말했다
사람들의 일상과 일과는 나름의 입장과 처지에서 변함없이 계속되었고 때가 되면 그 모든 관계성 속에서, 세계성 속에서 실현되어 가는 그 역사적 과정에는 그렇게 많은 사건들도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극적인 세계성은 관계성을 역동적으로 보이게 만들지만 언제나 드러나는 그 모든 모습들보다 알아 보아야 할 것은 그 모든 것의 진실이다
하느님이 선민과 계약을 맺고 그 율법을 주며 그 율법에 나와 있는 축복과 저주의 모멘텀을 내리는 것은 하느님이 인간들에게 거는 굴레와 족쇄가 아니라 그 원칙에 포괄되어 있는 하느님의 본질과 성격을 알아 보고 지성이 분별해야 할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며 그렇게 삶에는 확고불변의 원리가 작용하고 작동되고 있음을 알려 주는 것이다
누구든 믿거나 말거나 말이다
그런 명제들에는 반명제가 있을 수가 없다
선악과처럼 말이다
어찌 보면 구원사업의 번거로움이 마땅하냐는 논리가 들어설 수 없는 데에는 그렇게 분명한 원리가 하느님의 본질과 성격으로부터 있다는 데에 있다
영원히 변함없는 생명의 속성으로 말이다
그렇게 오늘날에도 전쟁들은 계속되고 오만 악화와 난리들이 끊이지 않으며 온갖 재앙들이 제 이름들로 오는 것이다
사람 주제로 누가 맞서고 누군가 막아설 일은 아닌 것이다

오히려 사람된 본분으로 그 원칙을 깊이 상기하고 모든 것을 잘 분별하며 그 원리가 선하고 좋은 편으로 보다 원활히 작용하고 작동되도록 하느님의 뜻에 따라 잘 살고 착하게 행할 일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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