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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 수사 검사가 국회의원이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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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열 [gapnuri] 쪽지 캡슐

2002-11-21 ㅣ No.43941

정형근이 누구?

한나라당 / 부산광역시 북.강서갑  

정무/정보/예산결산특별 위원회  

재선의원/ 제1정책조정위원장  

 

지금 희생자의 아픔은 아랑곳 하지 않은채 떳떳하게 국회의원 나리가 되어

이름을 떨치고 있는 정형근.

이땅의 정의가 땅에 떨어졌음을 보여주는듯 합니다.

지난 국회의원 선거때 낙선운동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당선 되었죠.

정말 지역감정 무섭습니다. 지역구 주민들도 고문 검사라는 걸 모르는건 아닐텐데.

인물과 정책 보고 뽑읍시다. 제발...

 

 

"내 ’고문 수사’의 담당 검사는 정형근"

 

[인터뷰] 81년 집시법 위반 구속돼 고문당한 김모씨

 

전국민주화운동상이자연합(의장 강용재, 이하 전민상련)은 21일 오전 11시 서울 안국동 느티나무 카페에서 ’제2차 은폐된 고문사건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고문피해자 합동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는 지난번 제1차 기자회견에서 밝힌대로 정형근 한나라당 의원의 고문지휘 의혹사건과 함께 과거 보안사(현 기무사)에 의해 저질러진 성고문 사건이 함께 공개됐다.

 

<오마이뉴스>는 이에 앞서 지난 81년 ’전두환정권 타도 집회’에 참가했다가 집시법위반 등으로 구속돼 당시 정형근 검사의 수사지휘 하에 고문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김한수(가명)씨를 만나 당시 상황을 들었다. 이밖에도 72년 ’10월유신’ 당시 신민당 간부였던 남편을 대신해 보안사에 끌려가 잔혹한 성고문을 당한 이순자씨(67)의 남편 김형식씨(67)를 어렵게 인터뷰(별도 <박스기사> 참조)했다....<편집자 주>

 

 이순자씨 성고문 피해사례 증언

김한수(가명, 43·사업)씨와의 인터뷰는 어렵게 성사됐다. 처음 전화연락을 했을 때 그는 "나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인터뷰할 내용도 없다"며 한사코 고사했다.

 

20일 오후 3시 기자는 무례를 무릅쓰고 그의 일터로 찾아갔다. 그는 외근 중이었다. 다시 통화해 인터뷰를 부탁하자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알았다. 하지만 일이 있어 빨리는 못들어가니 기다리라"는 답을 했다. 그로부터 2시간여를 기다린 끝에 김씨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는 근처 식당으로 취재진을 안내했다. 그리고 맥주 한 병을 앞에 놓고서야 말을 꺼냈다. 나중에서야 한 얘기지만 "술 한잔 안하고서는 얘기할 수 없을 것 같아서"가 이유였다.

 

김한수씨는 고문 피해자다. 자신의 말대로라면 "그 시절 운동했던 친구들은 다 겪었던 구타"였다고 했으나 지금도 후유증에 시달린다. 2년전에는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이하 민주화심의위)에 명예회복 및 보상신청을 했고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을 받았다. 그러니 국가도 인정한 명백한 ’고문 피해자’인 셈이다.

 

그런데 그의 사연은 좀 특별하다. 당시 김씨의 사건을 맡았던 이가 한때 ’공안검사’로 이름을 떨쳤던 정형근 현 한나라당 의원이기 때문이다.

 

김씨는 대학을 졸업한 뒤 야학 교사로 있던 1981년 9월 초 서대문 경찰서로 연행됐다. ’전두환 정권 타도 집회’에 참여했고 관련 전단지를 돌렸다는 혐의다.

 

수사과정에서 그는 순순히 "반정부 시위에 참여했고 전두환 정권 타도를 외쳤으며 전단지도 내가 만들어 뿌렸다고 자백했다"고 말했다. 숨길 것이 없이 없었다. 당연히 했어야할 일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찰은 "공범자를 불라"며 무려 15일간이나 그에게 무차별 가혹행위를 저질렀다.

 

그는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모든 고문은 무릎을 꿇려놓은 상태에서 이뤄졌다. 그렇게 꿇려놓은 상태에서 3명의 수사관이 팔을 비틀어 뒤로 꺾고 무릎을 내려찍고 허리를 발로 차는 등 구타행위를 했다"며 치를 떨었다.

 

그 후유증으로 무릎연골과 한쪽 고막이 파열됐고 척추에 이상이 생겼다. 한쪽 각막에도 상처가 있었고 그 이후부터 시력이 약화돼 "지금은 짝눈이 됐다"고 했다.

 

그리고 말했다.

 

"그 XX(정형근 의원) 참 악질이었어요. 내가 당시 9월 11일에 잡혀 들어가서 모든 사실을 다 인정했음에도 ’집회·시위범에 단독범이 있을 수 없다. 재조사하라’고 해서 보름간이나 나를 가둬놓고 구타를 했지요."

 

그는 보름 간 서대문서와 남대문서를 넘나들며 조사를 받았다.

 

학벌도 고문 이유… 정형근 의원에 의한 ’박노해 고문의혹’서도 불거진 내용

 

"전문대밖에 안다닌 XX가"라는 것도 고문이유였다. 그는 당시 수사관들이 "학벌도 없는 놈이 어떻게 4절지 전단지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적을 수 있느냐"면서 "배후를 밝히라"며 때렸다고 했다. 학벌도 고문 이유였던 셈이다.

 

이는 사노맹 사건으로 안기부에 연행돼 역시 정 의원의 지휘로 치도곤을 당했던 박노해씨가 99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정형근 의원의 ’학벌·엘리트주의적 계급주의 기준"과도 일맥상통하는 내용이다.

 

당시 박씨는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사노맹의 대표가 나라고 하자 정 국장은 ’너는 대학도 못 나왔고 너의 시나 글은 모두 서울대 출신들이 써준 것 아니냐’고 말했다"는 증언을 한 바 있다.

 

그는 두 개의 경찰서를 넘나들며 15일간 고문을 비롯한 조사를 받고 나서야 검찰로 넘겨졌다.

 

검찰로 넘겨지고 나선 정형근 의원도 대면할 기회가 있었다. 심문과정에서 총 15여번정도를 봤는데 그중 2∼3번은 정 의원에게 직접 맞기도 했다.

 

김씨는 "’안 불어 이 XX야’라며 팔을 높이 쳐들어 뺨을 쳐 내리는 건 정형근 심문의 특징이자 기본"이라고 했다. 이밖에도 정 의원으로부터 팔이며 등을 구타당했다. 하지만 이는 자신의 친구에 비하면 약과였다.

 

"정형근이 진짜 심하게 때릴 때는 지하 조사실로 끌고 가요. 내가 아는 친구가 바로 지하까지 끌려갔죠. 사실 그 친구는 나한테 타자기 빌려준 죄밖에 없는 친구였어요. 운동을 한 것도 아니고. 그런데 정형근의 목적은 무조건 ’엮는 것(조작)’이니까요."

 

그가 말한 "그 친구"는 바로 그의 자백에 의해 끌려온 친구였다. 그는 "재판 후 1년 6개월 징역을 살고 나와서도 그 친구얼굴을 볼 낯이 없었다"며 고개를 떨구었다. 강한 고문에 의해 의지가 꺾이고 말았다는 굴욕감을 느껴야 하는 것, 그것은 고문의 또다른 후유증이었다.

 

"자유롭게 살고 싶지만 정형근 고문 진상규명 활동 펼쳐지면 나설 것"

 

 

외형적으로 그는 꽤 안정돼보였다. 자그마한 사업체 하나를 부부가 같이 꾸려나가고 있었고 활발히 외부활동도 펼치고 있었다.

 

그가 인터뷰 요청을 거절한 건 "뭘 두려워해서도 걱정해서도 아니라 그저 내 얘기가 정치적으로 악용될까봐"라고 했다. 그리고 "내일은 그저 같이 운동했던 사람들이면 으레 당했던 일이지 특별한 일이 아니"라는 말도 몇번이나 했다.

 

하지만 "정형근같은 XX는 다시는 있어서는 안될 인물"이라며 몸을 떨었다. "나중에라도 정형근 관련 사건에 대한 진상을 규명하는 노력이 펼쳐진다면 언제라도 증언할 용의가 있다"는 것이다.

 

인터뷰가 어느정도 정리되자 김씨는 "민주화보상심의위에 보상신청을 한 건 돈을 받기 위해서도 무엇도 아닌 내 잃어버린 10년을 찾기 위해서"라고 했다. ’왜 우리 아빠는 이렇게 힘들게 살까’라고 혹시나 원망의 마음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자식들에게 "아빠의 과거는 이러했다"고 일말의 변명을 하고 싶어서였다. 그것은 ’역사의 기록’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한가지 이유를 더 들었다.

 

"후대에라도 정형근의 이런 행적이 알려지길 바라는 마음에서죠."

 

또다시 그는 힘주어 말했다.

 

"정형근에게 당한 자는 나 아니라도 많을 거예요. 당시 나와 같이 운동했던 사람들만해도 그렇죠. 그자는 ’공안시국사범 전문’이었어요. 누구도 풀 수 없는 난제를 도맡아 했던 ’공명심 넘치는 공안 검사’였단 말이죠. 조직 조작사건, 간첩 조작사건 등 그가 만들어낸 사건이 수도 없잖아요. 어떻게 하든 처벌받아야 해요. 정형근이란 인물이 가진 상징성 자체가 없어져야 합니다."

 

그는 요즘도 텔레비전 뉴스를 보면 답답하다고 했다. 그가 그렇게 존경했던 ’운동권의 선배 이재오’와 그토록 치를 떨었던 ’악질검사 정형근’이 서로 손을 맞잡고 거대 보수 야당의 ’실세’로 군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는 "예전 운동했던 때처럼 곧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는 희망은 버리지 않고 있다. 민주화심의위에 보상신청을 해 기록을 남긴 것도, 인터뷰에 응한 것도 이 희망을 조금이라도 키워보기 위해서다.

 

두시간여의 인터뷰를 마치고 그는 다시 자신의 터로 돌아갔다. 그의 말처럼 민주화운동 관련자들에 의해 정형근 의원의 고문 의혹사건이 들춰진 것은 비단 이번뿐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진실이 감춰지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의혹규명의 노력은 더욱 활발히 이뤄져야 한다.

 

"알 사람은 다 아는" 사건이 수없이 일어나고 관련 의혹이 수없이 제기되는 동안 국가는 정형근 전 공안 검사에게 3개의 표창과 훈장(검찰총장표창·보국훈장천수장·보국훈장국선장)을 주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아무 죄 없는 내 아내까지 잡아다가 성고문"  

 [인터뷰] 72년 울산 반공법 유인물 조작사건 피해자 김형식씨가 밝히는 아내가 당한 성고문  

 

전민상련은 제2차 <은폐된 고문사건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고문피해자 합동기자회견>에서 과거 보안사에 의해 이뤄진 잔혹산 성고문 사건과 그 책임자를 공개한다.

 

성고문을 당한 피해자는 이순자(67)씨로 72년 10월 유신 당시 신민당 울산 지구당 간부였던 남편 김형식(67)씨의 부인이다. 이씨는 계엄령 선포로 인해 도피생활을 했던 남편의 행방을 밝히라는 이유로 울산 보안사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당시 보안사 수사관 3명에 의해 이뤄진 고문행위 중에는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잔혹한 성고문도 있었다. <오마이뉴스>는 전민상련의 제2차 기자회견에 앞서 20일 밤 이씨의 남편 김형식씨를 전화로 인터뷰했다. 이씨는 현재 위독한 상태로 1년전부터 거동이 불가능한 상태다.

 

다음은 김형식씨와 나눈 인터뷰 전문이다.

 

- 당시 부인 이순자씨가 어떤 이유로 고문을 당한 건가?

"72년 10월 유신 때다. 당시 계엄령 선포로 인해 신민당 울산 지구당 간부였던 나는 도피생활을 해야했다. 당시만 해도 계엄령 선포를 해서 야당하던 사람들을 많이 잡아 넣지 않았나. 당시 당직자들 대부분이 잡혀가고 나는 도피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당시 울산 보안사에서 내 처를 연행해갔다. "남편의 행방을 밝히라"는 것이 이유였다."

 

- 당시 부인이 어떤 고문을 당했나?

"울산 보안사로 끌려가서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당했다. 옛날에 쓰던 돌려서 받던 전화기 선을 손가락에 묶어서 전기 고문을 했다. 후에 경찰에 자수한 후 나도 같은 고문을 당했었다. 그리고도 등허리에 물수건을 올려놓고 몽둥이로 때리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문을 했다더라. 당시 난 서울에서 내 처가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정보부에 직접 전화해 자수했다."

 

- 잔혹한 고문이 그것뿐이 아니었다고 들었다.

"당시 내 처와 함께 잡혀간 동료들이 있었다. 내 처는 나중에도 혹시 내가 죄스러워할까봐, 그리고 수치스러워서 끝내 말을 안했다. 내가 그 내용을 알게 된 건 내 동료들이 말해주어서이다. 나도 차마 말을 못하겠다. 옷을 벗겨놓고 때렸다던데 당시 군인들도 옆에서 같이 고문을 받던 동료들도 다 남자 아닌가. 얼마나 수치스러웠을지, 고통스러웠을지 생각하면 분노가 치민다. 그 옆 콘크리트 바닥에는 갓 돌지난 내 막내딸을 뉘어놓고 그런 짓들을 했다고 한다. 내 동료들의 말에 따르면 그 잔인한 X들은 내 처의 국부(질)에 몽둥이를 쑤셔넣는 등 성고문도 했다고 한다."

 

- 얼마동안 고문을 당했나.

"기억하기론 최소 20일 이상이다. 추울 때이니 11월말부터나 12월초부터 일 것이다."

 

- 당시 고문했던 사람들 이름을 기억하나?

"울산 보안사 소속 임00·이00 수사관이다. 이들의 이름이 만천하에 공개되고 반드시 죄를 물을 날이 왔으면 좋겠다."

 

- 부인의 고문 후유증도 심각했을 것 같다.

"사람이 상당히 몸이 안 좋았다. 거의 반신불수로 살았다. 후유증으로 자궁암에 걸리고 치료받고 나서도 몸이 안좋다가 1년 전부터는 끝내 자리에 눕고 말았다. 현재는 자식들이 옆에서 대·소변을 다 받아낸다. 의식은 사람이 들고 나는 정도만 알아볼 정도다."

 

- 부인을 보면 마음이 많이 아프실 것 같다.

"물론이다. 내 처의 죄는 정치활동하던 남편 뒷바라지 한 것 밖에는 없다. 그런데 말 못할 고문을 당하고 그러고 나서도 몇 년을 항상 정보과 감시를 당하고 살았으니 돈벌이도 못했고 제대로 생계를 잘 꾸리지도 못했다. 아직도 이런 생각을 하면 밤잠을 제대로 못 잔다. 밥맛도 없어진다. 분통터지고 너무 억울할 뿐이다. 어떻게 사람을 거꾸로 달아놓고 입에 물넣고 하는 그런 고문을 하나? 몸도 마음도 골병이 든 거다. 잊어버리려고 애를 많이 쓴다."

 

- 부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내가 참 미안하다. 잘 살았으면 또 모르겠다. 아직까지 여행을 한번 같이 못 갔다. 지금은 이렇게 병들어 누워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지금도 ’용서해달라’고 여러번 얘기한다. 그리고 후생에 가서 꼭 만나자고, 만나면 내 잘해주고마고 약속했다."

 

- 바라는 게 있다면.

"지금까지 나라에서 고문을 한 X들 다 그대로 놔뒀지 않나. 앞으로 그런 일이 또다시 있어서는 안된다. 그러려면 그X들 한시라도 잡아서 처벌해야한다. 또 그 위에서 지시한 X들도 벌해야 한다." / 김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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