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4일 (목)
(녹)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자유게시판

며칠 전, 야인시대를 보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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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현정 [annateresa] 쪽지 캡슐

2003-02-05 ㅣ No.47789

 

며칠 전, 야인시대를 보다가,

김두한과 정진영이 서로에게 등을 돌리게 되는 그 장면을 보았습니다.

실제로는 어느 정도였는지 모르지만, 드라마에서는

그 두 사람의 우정이 그야말로 감동 깊게 그려졌었지요.

정진영은 김두한의 앞을 막아서서 친구 대신 총탄을 가슴에 맞기도 했구요.

두 사람 모두 매우 외로운 처지이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오랜 친구 한 명이 얼마나 소중할지는

너무나 자명해 보였지요.

 

그런데, 사상이란 게 뭔지, 바로 그 사상 때문에

목숨보다 서로를 아꼈던 두 친구가

등을 돌려 모르는 남남이 되는 것도 아니고

너 죽고 나 살자는 식으로 싸워야 하는 "적"이 되는 모습을

왠지 가슴 서늘한 느낌으로 지켜보았더랬습니다.

 

김영철과 차광수의 연기력...!!!

정말 대단하더군요. 거친 남자의 눈에 시뻘건 핏발이 서고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는데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아파서 제 눈에도 눈물이 맺힐 뻔 했습니다.

(솔직히 예전의 안재모와... 그 누군지 정진영의 청년시절을 맡았던 그 배우,

 그 곱상한 얼굴의 두 미소년에게선 그런 느낌이 전혀!! 안 났었습니다.

 너무 안 어울렸어요. -_-)

 

그것을 보면서 새삼, 그 "사상"이란 게 뭔지를 생각했습니다.

사상이라면 헤아리기도 힘들 만큼 종류도 많지만

그 중에서도 공산주의라는 사상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더군요.

대체 그 사상의 어디에 그러한 매력이 있기에

한 번 빠져들게 되면 사람이 그렇게 변하는 걸까요?

극중 정진영도 어렸을 때는 그저 착하고 차분하고 공부 잘하는 소년이었는데

일단 공산주의에 빠지게 되면서 성격이 엄청 변하게 되지요.

좋게 말하면 열정적이 되었다 하겠고,

안좋게 말하자면 매우 과격하고 날카롭게 변했다 해야겠네요.

김두한도 오랜만에 만난 정진영의 변한 모습을 보고 이렇게 말하지요.

"너 많이 변했구나. 예전엔 아무리 화가 나도 이러지는 않았었는데..."

그러자 정진영은 대답하지요.

"나를 욕되게 하는 것은 참을 수 있지만, 공산주의에 대한 모욕은 참을 수 없다."

뭐 이런 식의 대사였던 것 같습니다.

 

저는 죠반니노 과레스끼의 신부님 시리즈를 아주 좋아합니다.

5권 모두를 사다가 지금까지 대여섯번씩은 읽었던 것 같습니다.

그저 생각나면 또 들춰보고,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탈리아의 한 작은 마을이 배경이고

주임신부님인 돈 까밀로와 공산주의자인 읍장 빼뽀네가 그 주인공이지요.

아 참, 십자가에 매달린 채로 돈 까밀로와 대화를 나누시는

그 사랑스런 예수님이 또 계시는군요.

 

얼마 전에도 문득 생각이 나서 다시 그 책의 제3권을 꺼내 읽었는데

그 중 한 편의 짧은,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가난에 굶주리는 사람이 늘어가는 것을 보다 못한 돈 까밀로 신부님은

미국에 구호물자 요청을 해서, 통조림 등 많은 식료품이 도착합니다.

그런데 빼뽀네 읍장 휘하의 공산주의자들은 뼈저리게 가난해 굶으면서도

굳은 명령체계 하에, 아무도 음식을 받으러 오지 않아 신부님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하지만 그 중 스트라치아미라는 한 남자는 굶주려 우는 어린 아들을 보다못해

신부님에게 찾아가 음식을 받으며, 자기를 실컷 조롱하시라고 외칩니다.

신부님은 아무 말 없이 잘 가라고만 하십니다.

그런데 마침 빼뽀네를 방문했던 공산당 중앙지도부의 관리 한 명이

공산주의자 중 한 명이 미국에서 보낸 음식을 받아갔다는 보고를 듣게 됩니다.

그는 당장 읍장을 비롯한 공산당 지도위원들을 거느리고 스트라치아미의 집을 찾아가

어린 아들이 보는 앞에서 가난한 아버지의 면상을 후려치고

식사를 하려던 굶주린 어린애 앞에서 식탁보를 뒤엎어 버립니다.

그리고는 고개를 푹 숙인 스트라치아미를 향해 싸늘히 말합니다.

 

"이것이 공산주의일세, 동무. 이것이 싫다면 우리 당을 떠나게."

 

.......

 

 

목숨보다 아끼던 친구와 사생결단을 하는 적이 되어야 하고...

사상을 지키기 위해서는 굶주리는 어린 자식도 바라보고만 있어야 하는...

사상에 어긋난다면 부모형제고 친구고 간에 모조리 없애야 하는...

 

글쎄요, 사실 전 공산주의에 대해 체계적으로 공부하지 않았습니다만,

처음부터 어떤 매력을 느끼지 못했기에 깊이 다가서지도 않았습니다만,

제가 볼 때 그 사상은 저렇게 차갑고 무서운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전에도, 지금도 그렇게 느껴집니다.

 

 

제게도, 인생관이 바뀌었던 계기가 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한 없는 고통 중에서 하느님의 존재를 깊이 깨달았을 때가 바로 그때였습니다.

이전까지는 계신지 안 계신지조차 확신하지 못했던 껍데기 신앙에서

그분의 현존을 확신하고 그분이 제 인생의 중심이 되시는 변화를 체험한 것이지요.

 

어떻게 보면 종교에 심취하는 것과 사상에 심취하는 것은

사람은 완전히 변화시킬 만큼 그 영향력이 강하다는 그 점에서 약간은

비슷한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음... 그런데...

이북에 살고 계신 이산가족 할아버님, 할머님들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더 크실까요, 공산주의에 대한 사랑이 더 크실까요?

그분들 중에는 젊은 나이에 공산주의에 심취했던 분들도 계시겠지요.

그런데, 이제 인생 말년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지금도... 사상을 위해서라면 가족을 버리는 편이 낫다고 생각을 하실는지...

잘은 모르겠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서로 끌어안고 눈물 흘리던 그 주름진 얼굴들을 떠올려 보면

이젠 젊은 날을 후회하고 사람의 정을 더 그리워하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저의 추측일 뿐이지만...

사실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그렇게 된 분들이 더 많겠지요.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의 정보다 사상을 더 중요시하는,

골수 공산주의자가 그렇게 많을 수 있을까 싶군요.

 

그런데, 종교를 보면... 어딜가나 노년층이 상당히 많은 것 같습니다.

특히 지나치게 배타적인 색채를 띠지 않고 있는 가톨릭이나 불교 등에는

젊은 신자들보다 노년의 신자들이 숫적으로도 훨씬 많은 것 같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면에서도 우세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평생 무신론자로 살았던 사람도 죽을 때가 가까워지면

마음이 부드러워지면서 신앙을 찾게 되는 경우를 정말 수없이 많이 봅니다.

 

85세의 노인이 썼다는 시를 한 편 읽은 적이 있었는데

그 첫부분은 이렇게 시작되더군요.

 

       내가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면

       다음 생에는 보다 많은 실수를 저지르리라.

       긴장을 풀고 몸을 부드럽게 하리라...

 

삶의 긴 여정을 살아 와, 이제 돌이켜 보니

생활에 긴장하고, 완벽하려 스트레스받고, 아웅다웅 다투고 했던 모든 일들이

다 부질없고 허무하게 느껴진다는 그 의미를 저는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콩보다는 아이스크림을 더 많이 먹을 것이며

늦봄부터 초가을까지는 맨발로 지낼 것이라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 헉헉대며 살기보다는 삶을 즐기겠다는 뜻이었습니다.

물론 살다보면 모든 것이 마음 먹은 대로 될 수야 없겠지만,

사랑하는 사람들과 푸른 하늘을 보면서 한 조각의 상큼한 과일을 깨물 수만 있어도

그 삶은 아름다운 것이라는 생각을 들게 했습니다.

 

삶에 있어 진정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비로소 깨닫게 되는 노년에는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찾고, 멀리 헤어져 있던 사랑하는 사람들을 찾습니다.

노년이 되어서 무슨 사상에 심취하게 되었다는 사람은 거의 못 본 것 같습니다.

 

음... 쓰다 보니 주절주절 너무 길어졌지만,

하여튼 저는 그 무슨 사상이라는 것이 별로 좋게 느껴지질 않습니다.

그저 나 죽는 날까지 사상 같은 것에는 휘말리지 않고,

자유롭게 하느님을 믿고

자유롭게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서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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