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4일 (목)
(녹)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자유게시판

정원경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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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옥 [mariemarie] 쪽지 캡슐

2003-06-01 ㅣ No.52849

정원경님께,

 

이 곳이 자유 게시판이라 누구나 글을 자유롭게 올릴 수는 있겠지만

그 글이 교회의 가르침이나 교리에 관한 사항일 때는 우리는 여러 번 숙고하여

내가 혹시 잘못된 글을 올려 많은 사람들의 영혼에 해독을 끼치게 되는 것은 아닌지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자신에게도 치명적인 죄를 낳게 하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제가 올린 김유철님을 반박하는 글에 대해 정원경님이 댓 글을 다신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글은 물론 성모님에 대한 교리를 잘 모르는 사람이

선의에서 글을 적다보니 표현 상 어찌 그렇게 된 것으로 볼 수도 있는 글입니다..

그러나 김유철님이 올린 ’김근식’ 형제님에 대한 댓글을 읽어 보고 저는 그것이

성모님을 모독하는, 의도된 글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것은 이 분이 자신의 글에서 인류 구세사에서 성모님께서 차지하시는 위치와 역할을

성서 상의 다른 여인들보다도 못하다고 주장하는 모습에서 잘 드러나 있으며

이 분은 "가톨릭 교회는 미몽에서 깨어나야 한다고"도 주장 하셨는데

이야기인 즉 가톨릭 교회가 성모님 때문에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기억하기로 정원경님도  언젠가 ’성모님의 평생 동정성’ 교리는

후세에 만들어 낸 교리라며 이를 부정하는 발언을 해 게시판이 좀 소란스러웠던 적이

있었지요. 제가 굳이 정원경님에게 답 글을 쓰는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가톨릭 굿뉴스 상에는 비록 글을 올리지는 않지만 여기를 즐겨 찾으시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회원이 되신 지 오래되신 분들은 아마도 정원경님의 주장들을 기억하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다른 많은 분들에게 하시듯 제가 쓴 글에 어떤 토를 다시든 그것은 정원경님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이 번 경우는 아니란 생각이 드는군요.

이해 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올바른 성모 신심이 정원경님께는 무엇인지…

그리고 지나친 성모 신심이란 무엇을 두고들 말씀 하시는 것인지…

정원경님께서는 우리의 위대하신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지나친 성모 신심으로 예수님

신앙을 약화시켰다고도 하는 엄청난 발언도 하셨는데 정원경님은 혹시 우리 교황님께서

어떤 회칙들을 쓰시고 발표하셨는지 읽어 보신 적은 있으신가요?

자신이 이전에 했던 말들이 있고 또한 그것을 기억한다면

이번 경우는 그냥 가만 계시는 것이 현명한 일이 아닐까요?

 

정원경님이 황명구님께 쓰신 답글에 몇 마디 하며 이만 마칠까 합니다.

 

정원경님은 이 답글에서도 황명구 님의 ’지나친 성모신심’을 꾸짖기 위하여

"우리 신앙의 기본은 무엇보다도 ’성서와 기도, 미사, 그리고 공동체 안에

머물러야 한다"고 주장하셨고 "제대로 기도하기 위해, 예수님을 제대로 알기 위해,"

"그리고 그분을 제대로 따라 살기 위해서는 성서를 알아야 한다" 고 말씀하시며

성 예로니모 성인의 말씀을 예로 드셨습니다.

그러나 예로니모 성인은 가톨릭 교회의 가장 탁월한 성서주석가로서도 유명하신 분이지만

동시에 교회를 이단으로부터 수호하여 유명하신 성인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성모님의 평생동정성’을 부정하는 이단들로부터

교회를 지키는데 큰 활약을 하셨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이설은

이전의 정원경님 주장과 너무나 흡사하더군요.

 

우리 교회의 가르침은 내가 읽은 몇 권의 책에서 나오는 얇은 지식이나 글재주 같은 것으로

각색되어 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밑에 글은 정원경님을 위하여 옮겨온 글입니다.

생각의 전환기를 맞으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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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기에 헬비디우스(Helvidius)와 죠비니언(Jovinian) 등의 이단들이 교회 초기로부터

전해져 오는 그리스도교의 보편적인 전통에 반기를 들고 감히 우리의 복되신 성모님께서

당신의 신적(神的) 아드님을 낳으신 후에 다른 자녀들을 두셨다라는 주장을 했다라는

소식에 접한 당시의 사람들이 느꼈던 혐오와 분노를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상상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그들은 그 이단설에 대하여 복음서의 어떤 구절들에 토대를 두었으며,

성예로니모에 의해서 즉시 그리고 결론적으로 반박되었다.  그리하여 프로테스탄트 개혁

운동이 일어날 때까지 성모님의 평생 동정성에 대한 어떠한 이론도 제기되지 않았다.

 

    헬비디우스와 죠비니언은 "마리아께서 당신의 첫 아들을 낳으시기까지"라는 마테오

복음서의 구절을 인용한다 (마테오 1:25).  여기에서 사용된 "까지"라는 말은 "전에"라는

뜻인데,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한 암시를 줌이 없이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하여 말하는 것으로서 이러한 어법은 히브리 어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노아가 방주로부터 까마귀를 내보냈는데 "땅 위에서 물이 빠질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창세기 8:6-7).  이는 까마귀가 물이 빠진 후에는 돌아왔다는

뜻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그분의 원수들이 그분의 발아래 꿇을 떄까지

하느님의 오른 편에 앉으시리라,"고 한 말씀은 그 떄까지만이라는 뜻이 아니다.  

필요하다면, 이와 비슷한 예들은 더 많이 들 수 있다.  

 

성 예로니모는 말하기를 "만일 어떤 이가 헬비디우스가 죽을 떄까지

뉘우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면 그가 죽은 후에는 뉘우쳤다는 뜻이 되는가?"라고 하였다.  

"첫 아들"이란 표현에 대해서는 그것이 현대 영어에서는 어떤 의미를 가지든간에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그 말이 그 후에 자녀들이 더 태어났다는 것을 전혀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는 성부께로부터 영원히 낳음을 받으시는 성자께 대해서도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을 수

있다: "그분께서 당신께로부터 첫 번째로 낳으심을 받은 분을 세상에 보내실 때, ’하느님의

모든 천사들이 그를 경배케 하라,’고 말씀하셨다."  "첫 번째로 태어나신 분"과 "첫 번째로

낳으심을 받은 분"이라는 표현들은 최소한 성서에서 사용된 언어에서는 그 다음의 자녀들을

낳으셨다라는 뜻이 전혀 없다.  오로지 그 표현들에서 언급되시는 분이 첫 번째로 태어나신

분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분이 독자셨는지 아니셨는지는 이 표현들로부터

전혀 추론될 수 없다.

     우리 주님의 "형제들" 그리고 "형제들과 자매들"이란 단어들이 또한 문제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문제는 우리가 이런 표현들이 성서에서 모든 가까운 친척들뿐 아니라

먼 친척들에게도 사용되었음을 알게 되면 즉시 사라져버리고 만다.  이와 비슷한 경우는

"부모 (parents)"라고 하는 단어에 대해서이다.  영국인들에게 이 말의 뜻은 말 그대로

부모이지만, 불란서인들에게는 부모 뿐 아니라 친척들을 의미한다.

     신앙에 대한 가르침과는 별도로, 우리 주님의 형제들과 자매들이라고 하는 이들이

사실은 알페우스(Alpheus)라고도 하는 클레오파스(Cleopas)와 성모님의 자매인 마리아의

아들들과 딸들임이 증명될 수 있다.  복음서들에 보면 우리 주님과 그의 "형제들"은 가까운

혈연일 뿐 아니라, 상당히 친하게 지내셨음을 알 수 있다.  성 요셉이 세상 떠나신 후에는

성모님께서 당신의 자매와 함께 사셨을 가능성이 많다.  함께 한 가족처럼 사셨을 것이다.  

오늘날의 이태리에서 우리는 몇 세대가 한 지붕 밑에서 같이 사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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