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4일 (목)
(녹)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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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성직자의 향수를 찾아서:김수환 추기경·한경직 목사· 성철스님, 그리고 브라더 로렌스 수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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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남하 [simonyang] 쪽지 캡슐

2019-05-03 ㅣ No.217885

◆한국 종교계를 이끌었던 세분이 발자취

 

김수환 추기경·한경직 목사· 성철스님을 따라가 보라~ 무욕 청빈 솔선수범 관용의 정답이 거기 담겨있다. 세속의 질긴 인연을 뎅겅 베어 내던지고 돌아선 이들의 성직(聖職)세계는 녹녹치 않다. 헛짚고 함부로 입방아를 찧을 일만도 아니다.

 

우리들 마음에 지워지지 않는 발자국을 남긴 종교계의 큰 어르신으로 김수환 추기경(1922~2009) 한경직 목사(1902~2000) 성철 스님(1912~1993)  세 분을 꼽는 데 별 이견이 없을 것이다  

세 분은 각기 다른 종교를 떠받치는 기둥이었다. 그분들을 한데 묶는 공통 단어는 청빈(淸貧)이다.


김수한 추기경이 세상을 다녀간 물질적인 흔적은 신부복과 묵주뿐이었다. 얼마 전 추기경님의 또 다른 유품은, 기증한 각막을 이식받고 시력을 되찾은 어느 시골 양반이 용달차를 모는 사진이다.

  

한국 대형 교회의 원조인 영락교회를 일으킨 한경직 목사님이 남긴 유품은 달랑 세 가지였다

. 휠체어 지팡이 그리고 겨울 털모자다. 그리고 집도 통장도 남기지 않았다.

 

성철 스님은 기우고 기워 누더기가 된 두 벌 가사(袈娑)를 세상에 두고 떠났다.

 

알고 보면 세분은 모두 가난한 부자들이었다. 아니 어마어마한 유산을 물려준 엄청난 재산가였다고나 할까.

 

김수한 추기경님이 천주교를 이끌던 시절, 신도 수가 가파르게 증가했다.

한경직 목사님이 작고한 이후 개신교는 또 한 차례의 중흥기(中興期)를 맞아, 신도 수가 크게 늘었다.

성철 스님 열반(涅槃)한 뒤에 스님의 삶이 알려지면서 불교를 바라보는 세상의 눈길이 달라졌다  

  

세 분은 예수님의 말씀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던 분이 아니라. 그분들의 삶을 그대로 살아보고자 했던 분이었다. 그리고 온몸으로 보여 주었다. 세상을 떠난 다음 세 분의 향기는 신도의 울타리를 넘어 일반 국민들 사이로 깊고 멀리 번져나갔다.

 

김수한 추기경님이 남긴 인생덕목(德目)'노점상'이란 항목이 있다 '노점상에게 물건 살 때 값을 깎지 마라. 그냥 주면 게으름을 키우지만 부르는 값을 주면 희망을 선물한다는 것이다'. 말씀대로 추기경님은 명동의 노점상 앞에 가끔 걸음을 멈추고 묵주를 샀다.

짐이 무거워 불편하다면 욕심이 과한 것이다. 덥석 물건부터 집지 말고 시장 안을 둘러봐라. 한 번 사버리고 나면 바로 헌 것이 되니 물릴 수 없다. 내가 가지려 하는 것부터 남에게 주었다. 준비가 부족한 사람은 어려운 세월을 보낸다.

남루한 노인이 운영하는 작고 초라한 가게를 찾아서, 물건을 고르고 고마운 마음으로 돈을 내밀어라.

  

한경직 목사님은 설교 중에 몇 번이고 신도들을 울리고 웃기는 능변(能辯)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도 전설적인 목회자로 존경받는 것은 그의 삶이 설교의 빈 구석을 채우고도 남기 때문이다.

한 신도가 한경직 목사님이 추운 겨울 기도를 하다, 감기에 걸릴 걸 염려해서, 오리털 잠바를 선물했다. 얼마 후였다. 영락교회에서 백병원 쪽으로 굽어지는 길목에서, 바로 그 잠바를 입은 시각장애인이 구걸하고 있었다. 목사님 아들도 같이 목회자(牧會者)의 길을 걷고 있지만 후계자라는 말은 흘러나온 적이 없다.


  

성철 스님은 늘 신도들의 시주(施主)를 받는 걸 화살을 맞는 것(受施如箭) 만큼 아프고 두렵게 여기라고 가르쳤다. 쌀 씻다 쌀이 한 톨이라도 수채 구멍으로 흘러간 흔적이 보이면, 다시 주워 밥솥에 넣으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불교계의 큰 어른인 종정(宗正)직을 오래 맡았지만 중 벼슬은 닭 벼슬만도 못하다며 항상 종정 자리를 벗어날 틈을 찾기도 했다 

 

세 분은 일편단심으로 자신이 믿는 종교의 가르침을 널리 펴고 실천하면서도 다른 종교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씀한 적이 없다

김수한 추기경님은 성철 스님의 부음을 접하고 누구보다 먼저 조전(弔電)을 보냈다. 그러니 한국 종교계야 말로 복()이 많은 것이다. 

 

한경직 목사님은 교파의 경계를 넘어서는 교회 일치운동을 하셨고, 성철 스님은 여러 종교의 경전에도 두루 관심을 보였다.

 

오늘의 문제를 풀기 위해 멀리 밖에 나가 배울 필요가 없다. 고개를 들면 스승의 얼굴이 보이고, 고개를 숙이면 그분들의 생애가 펼쳐져 있다. 세상을 비추던 세 분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면, 종교가 세상을 걱정하던 시절로 돌아가는 문이 활짝 열려 있다. 무욕 청빈 솔선수범 관용의 정답이 거기에 담겨있다.

 

 

◆브라더 로렌스 수도원장

“One need not cry out very loudly;

He is nearer to us than we think.” -Brother Lawrence, on prayer

     

문제투성이던 어느 수도원에 새 수도사가 왔다는 소문에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왔습니다. 그런데 오신 분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습니다. “잘 왔소. 어서 식당에 가서 접시나 닦으시오.”

   

처음 부임한 수도사에게 허드렛일을 시키는 것이 수도원의 관례라며 숨 돌릴 여유도 주지 않고 노인에게 궂은일을 시켰습니다.

 

!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노인은 불평을 하지 않고 주방에서 묵묵히 일만 했습니다. 한 달, 또 한 달, 그리고 석 달째 접시를 닦았습니다. 열심히 일만 하는 노인을 얕잡아 보고 젊은 수도사들은 멸시와 구박을 했습니다.

 

석 달이 지난 즈음에 교황청의 수석 감독관이 수도원을 방문하였습니다. 젊은 수도사들은 책잡힐 일이 없나? 감독관 앞에 설설 기었습니다.

 

원장님은 어디 계신가?”

 

원장님은 아직 부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감독관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아니 무슨 소린가? 내가 로렌스 수도원장를 책임자로 모셨다네. 이곳에 오신 지 벌써 3개월이나 지났는데?”

 

이 말을 들은 젊은 수도사들은 아연실색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노인이 원장이란 말인가? 수도사들은 식당으로 우루루 몰려갔습니다. 그곳에서 한 노인이 식기를 닦고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브라더 로렌스 (Brother Lawrence)수도원장이었습니다.

 

새 원장은 어떤 명령도 설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원장의 조용한 행동에 모두가 변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수도사들은 높은 자리에 앉아야 장()자가 붙은 줄 압니다. 그러나 진정한 책임자는 높은 곳에 앉아 있지 않고 오히려 천한 곳에서 지극히 작은 자와 더불어 남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요즘 성직자들의 봉급 등 재정적인 살림살이를 실질적으로 담당하는 신자들의 영성에 별 영양가 없는 설교(또는 강론)가 너무 많습니다. 시끄럽습니다. 섬김과 희생이 없이 모두가 높은 곳에서 떠들고 있습니다. 그러니 누구도 어떤 말도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너무 과격합니다. 이제 우리 모두 예수님이 되고 로렌스 브라더가 됨은 물론 김수환·한경직· 성철 님이 되어, 더 낮은 곳에서 묵묵히 일하며 말없이 섬깁시다.

 

 

**편집출처주소:http://m.cafe.daum.net/kfb67/NPRR/377?svc=cafeapp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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