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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수씨를 하늘나라로 보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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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요하 [jiyoha] 쪽지 캡슐

2005-12-26 ㅣ No.92946

 

                  제수씨를 하늘나라로 보내고




<1>

내 가운데 제수씨가 39년의 짧은 세월을 살고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지난 9일 '뇌혈관 기형' 뇌출혈로 서산의료원을 거쳐 인천 인하대병원으로 옮겨간 다음 11일 뇌수술을 받고 줄곧 중환자실 병상에 누워 있었으나 끝내 회복되지 못하였습니다. 20일 '뇌사' 상태로 태안의료원으로 이송된 직후인 오후 7시쯤 숨을 거두었습니다.

태안 성당 신앙 공동체는 내 제수씨, 강은실 요안나를 전송하는 장례미사를 22일 오전 10시 30분 '레지오장'으로 지냈습니다.


▲ 빈소에 놓여진 내 제수씨 강은실 요안나의 영정
ⓒ 지요하

전날 오후에는 또 한차례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불고 몹시 추워 마음이 더욱 슬프고 스산하였습니다. 가뜩이나 슬픈 마음 위에 날씨마저 사나우니 하늘도 너무 무심하다 싶고, 심신이 더욱 무너져 내리는 것 같더군요.

그러나 장례를 지내는 22일은 아침부터 하늘이 맑았고 따뜻한 날씨였습니다. 마치 내 제수씨의 장례를 보살펴주시는 듯한 날씨를 보며 하느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맑고 포근한 날씨는 오후 3시경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모든 장례를 마치고, 조문객들을 장지 근처 음식점에서 점심 대접하여 보내 드리고, 일부 가족들만 남아서 늦은 점심식사를 할 때 또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하더군요. 다시 한번 다행스러운 마음이었지요.

장례미사는 태안 성당의 50년 가까이 된 최초 건물인 강당에서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참으로 멋진 건물인 새 성전이 지금 한창 지어지고 있는데(내년 4월이면 주변 조경 공사까지 완료되어 축성식을 하게 되는데), 새 성전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노라면 더욱 가슴이 아파 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내년 봄 새 성전의 축성식 자리에서 내 제수씨의 예쁜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절로 한숨이 나오고 눈물이 납니다. 우리 신앙 공동체가 그 큰 행사를 치르려면 내 제수씨도 한 몫을 해야 하는데….

비좁은 강당은 물론이고 그 강당과 잇대어 설치한 비닐 하우스 안을 가득 채울 만큼 실로 많은 신자들이 내 제수씨의 장례미사에 참례하였습니다. 그 많은 신자들을 보면서 신앙 공동체의 아름다운 모습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고, 내 제수씨가 얼마나 열심히 봉사 활동을 하며 신자답게 잘 살았는지를 확연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미사 중에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전례 봉사를 하는 자매도 울음을 참느라고 애를 쓰며, 목이 맺혀 간신히 독서를 해야 했습니다. 미사를 집전하시는 신부님도 온전한 목소리가 아니셨지요.

장례미사는 태안 본당 역사상 최초인 '레지오장'으로 치러졌습니다. 태안 본당 2개 꾸리아의 15개 쁘레시디움 단장들이 모두 단기를 들고 입장하여 유해를 호위하는 모습으로 미사를 지냈습니다. 그래서 더욱 장엄하고도 아름다운 장례미사가 되었습니다.

장례미사의 끝 무렵에 '천주의 성모' 꾸리아 조경애 로사 단장은 고 강은실 요안나 자매의 '약력'을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습니다.


▲ 지난 8월 7일 우리 가족 신앙의 고향인 전주 전동 성당을 찾았을 때 찍은 사진이다.
ⓒ 지요하

【강은실 요안나는 1967년 태안읍 남산리에서 태어났습니다. 1990년 결혼과 함께 천주교 신자가 된 이후 곧바로 레지오에 입단하여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15년 동안 레지오 단원으로 올곧하게 활동하였습니다. '바다의 별' 쁘레시디움의 회계와 서기 등 간부 단원으로 매우 모범적인 활동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쁘레시디움의 갖가지 봉사 활동에 앞장을 섰고, 꾸리아의 갖가지 행사에도 반드시 참석하는 것은 물론, 성물방 봉사 등 늘 뒤에서 봉사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동문1구역의 여러 가지 행사에도 적극적으로 앞장을 서거나 뒤처리 봉사를 함으로써 모든 구역 신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동네에서는 인사성 밝은 상냥한 처자라고 특히 어른들로부터 많은 귀염을 받았습니다. 명랑 쾌활하고 적극적인 성품, 다른 이들과 잘 어울리면서도 늘 뒤에서 봉사하는 자세, 불우한 처지에 있는 이들을 불쌍히 여길 줄 아는 마음, 하느님을 진심으로 믿고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의탁하며 사는 뜨거운 신심으로 우리 태안 본당 공동체의 많은 교우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럽던 강은실 요안나 자매가 하느님의 불림을 받아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강 요안나가 없는 빈자리가 너무도 크고 허전하여, 우리 태안 본당 공동체의 많은 형제 자매들이 안타까워하고 슬퍼하지만, 많은 이웃과 형제 자매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던 강 요안나가 하늘 나라에서도 하느님의 사랑 가운데서 영생 영복을 누릴 것을 믿으며, 우리 태안 본당 레지오 2개 꾸리아의 모든 단원들은 강 요안나를 더욱 사랑하는 마음으로 전송합니다.】

<2>

미사 중에 나는 여러 번 눈물을 흘렸고, '고별식'을 거행할 때는 입술을 깨물며 흐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인천 인하대병원에 머무는 열흘 여 동안 무시로 눈물을 흘렸고, 장례식장 안에서도 연도를 할 때마다 눈물을 흘렸건만, 눈물은 한도 끝도 없는 것인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고별식 후 '유족대표 인사'를 할 때는 비교적 차분한 목소리로 또렷또렷하게 인사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장례미사의 고별식 후에 유족을 대표하여 내가 했던 인사말을 여기에 옮기는 형식으로, 다시 한번 내 슬프고도 감사한 마음을 아로새기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장례를 잘 지낼 수 있도록 좋은 날씨를 베풀어주신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어제 저녁때까지도 눈 내리는 날씨 때문에 슬픔과 상심이 더욱 컸습니다. 추운 날씨에도, 또 장례미사 장소가 몹시 불편함에도 많이 참석해 주신 형제 자매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오늘의 이 장례미사는 우리 태안 본당 40년 역사상 최초가 되는 '레지오장'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 본당 최초의 레지오장을 허락해 주신 신부님과 이 레지오장 장례미사를 잘 준비하기 위해 애써 주신 꾸리아 단장님들을 비롯한 모든 레지오 단원 형제 자매님들께 고마운 인사를 드립니다.


▲ 지난 9월 어느 날 가족과 함께 흥주사를 가며 남편과 아들 사이에서 즐거워하는 제수씨
ⓒ 지요하

저에게는 두 남동생이 있습니다. 막내동생 가족은 대전에서 살고 있어서 자주 만나지 못하지만, 가운데 동생 가족은 가까이에 살고 있어서 우리는 거의 한 식구처럼 살았습니다. 외식을 할 때도 우리는 늘 함께 했고, 나들이 행사나 외국 여행도 꼭 함께 하곤 했지요. 참으로 우리 형제 가족은 한 가족이었습니다.

언젠가 우리 가족이 어느 음식점에서 저녁 식사를 할 때였습니다. 그 음식점의 주인이 우리 가족과 잠시 자리를 함께 하면서 부럽다는 말을 하더군요. 우리 두 형제 가족을 볼 때마다 세상에 이렇게 우애 깊고 화목한 가족이 또 있을까 싶어 한없이 부러운 마음이 든다는 말이었지요.

때 제수씨가 "아주버님 덕분"이라는 말을 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이런 말을 했지요. "내가 3형제의 맏이로서 동생들에게 신경을 많이 쓰는 것에는 특별한 까닭이 있다네. 우리가 자연 수명대로 산다면, 내가 동생들이나 제수씨들보다 훨씬 먼저 죽을 것은 당연지사, 훗날 내가 죽었을 때 제수씨들로 하여금 아주 많이 울도록 하려는 뜻이라네." 그러자 그 음식점 주인은 재미있는 말이라며 큰소리로 웃더군요.

훗날 내가 죽었을 때 제수씨들로 하여금 많이 울게 하려는 마음으로 저 나름으로는 열심히 가족들에게 마음을 쓰며 재미있게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소망이 그만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순서가 뒤바뀌어서 저보다 20년이나 젊은 제수씨가 먼저 세상을 뜬 바람에 오히려 제가 많이 울었고, 울고 있습니다.

인천 인하대병원에서 열흘 넘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심고를 겪으며 제수씨의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소생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을 때 동생이 이런 말을 하더군요.

"죽음 자체는 비참하지만 죽음 다음에는 영광이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도 비참한 죽음 다음에 하느님이 되실 수 있었지요. 죽음 다음에 가지게 될 영광, 그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동생은 신앙생활에 열심이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그것을 제수씨가 많이 섭섭해했지요.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함께 성당에 가는 것을 늘 소망했고, 다른 가정의 그런 모습들을 많이 부러워했지요. 그런데 제수씨는 병상에 누워서 남편으로 하여금 그런 마음을 갖게 하고 그런 말을 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동생의 그런 말을 들으며, 오히려 내가 위안을 얻는 기분이었습니다.

하지만 너무도 마음이 아픕니다. 끝내 제수씨의 생명을 건지지 못한 것이 한스럽습니다. 평소에 좀더 잘해 주지 못했던 일들이 아쉬움으로 느껴지고, 발병 초기에 신속하고 지혜롭게 대처하지 못했던 것이 회한으로 남습니다. 제수씨를 살리지 못한 이 회한과 자책감은 저에게 평생의 짐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수씨가 남긴 두 어린아이들을 보면서 마음을 새롭게 다집니다. 두 어린아이들을 잘 기르고 가르치는 것으로 이 회한과 자책의 짐을 해소할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엄마를 잃은 두 아이를 온 가족이 감싸고 보살피며 잘 기르겠습니다.

이 기회에 제 제수씨의 친정 가족 여러분께 사죄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제수씨는 우리 집으로 시집을 와서 고생도 많이 하고 첫 아이를 잃은 슬픔을 비롯하여 이런저런 고난을 많이 겪었습니다. 우리 가족이 제수씨에게 좀더 잘해 주지 못한 일들, 많은 슬픔을 겪게 한 일,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한 그 모든 일들에 대해 제수씨의 친정 가족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죄하며 용서를 청합니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제수씨의 친구 분들이 실로 많이 오시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친구 분들의 모습을 보면서 제수씨가 친구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좋았다는 것을, 친구들과 깊은 정을 나누며 잘 살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수씨의 친구 분들께 깊이 감사 드립니다.

아울러 부탁 한가지 드리겠습니다. 제수씨 친구 분들의 신상에, 또 가정에 무슨 일이 있으시게 되면 꼭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제 동생이 하지 못하면 저라도 도리를 다하며 살고자 합니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으시면 제 제수씨가 살아 있는 것처럼 꼭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실로 많은 분들이 이 장례미사에 참석해 주셨고, 또 많은 분들이 눈물을 흘리시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의 눈물을 보면서 제 제수씨가 신앙인답게 착하고 예쁘게 살았다는 것을, 신앙 공동체 안에서 사랑을 받으며 살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모든 형제 자매님들께 다시 한번 고마운 말씀 올립니다.】

<3>

제수씨의 유해는 단기(團旗)를 든 레지오 단원들의 호위 속에 태안읍 남산리에 있는 태안성당 공원묘지로 가서 안장되었습니다. 그 공원묘지에는 1986년 작고하신 시아버지와 1993년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뜬 첫 아이 한솔(당시 4살)이가 잠들어 있는 곳이었습니다. 제수씨는 첫 아이의 묘와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 단기(團旗)를 든 레지오 단원들의 호위 속에 묘소로 운구되는 제수씨의 유해
ⓒ 지요하

장례 기간 중에 몸소 장례식장을 찾으시고 연도를 하셨던 태안 성당의 구본국(베난시오) 신부님은 묘지에도 가셔서 직접 '하관예절'을 주례하셨습니다.

그리고 구본국 신부님은 23일 인터넷 '가톨릭 굿 뉴스'의 자유게시판에 강은실 요안나의 명복을 비는 글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내 제수씨 강은실 요안나는 정말 예쁘고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내 글 '사는 이야기'의 가족 이야기 속에 자주 등장할 정도로 제수씨는 내게 좋은 얘깃거리들을 많이 주었지요. 제수씨로 하여 우리 가족은 더욱, 참으로 재미있게 살 수 있었습니다.

제수씨가 인하대병원에서 뇌수술을 받고 중환자실 병상에 누워 있는 동안 양쪽의 가족들은 물론이고 참으로 많은 이들이 병원에 와서 환자 면회를 하고 눈물을 흘리며 쾌유를 기원하였습니다. 그리고 태안 성당에서는 강은실 요안나의 쾌유를 기원하는 미사 봉헌이 줄을 이었습니다. 그가 이승을 떠난 후에도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이들이 봉헌하는 '위령미사'가 계속되고 있지요.

내 제수씨는 인터넷 '가톨릭 굿 뉴스' 자유게시판에도 참여하여 몇 번 글을 올린 적이 있는데, 요즘 그 게시판에는 강은실 요안나 자매의 죽음을 애도하며 명복을 비는 글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굿자만사(굿 뉴스 자게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는 장례 때 태안을 찾은 이들과 자기 본당에서 위령미사를 봉헌하는 이들도 있고, 시누이들이 사는 미국 LA의 한인성당과 경기도 안산시 본오동 성당에서도 위령미사가 봉헌되고 있지요.

비록 너무 이른 나이에 참혹한 모습으로 이승을 하직하였지만, 내 제수씨 강은실 요안나는 하늘나라에서 영복을 누리리라 믿습니다.


덧붙이는 글

(태안 성당 구본국 베난시오 주임 신부님이 인터넷 '가톨릭 굿 뉴스' 자유게시판에 23일 올리신 글을 소개합니다.)

하나의 영혼을 하늘로 보내며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에 눈물로 미사를 드려야만 했던 하루! 착하디 착한 요안나 자매님의 빈자리가 너무나 크다는 것을 모든 신자들은 느꼈고 참으로 잘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한 하루였습니다.

언제나 성모님처럼 뒤에서 보이지 않게 봉사했고 말없이 그리고 조용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킨 참 신앙인 강은실 요안나 자매님…. 항상 웃으며 인사하고, 먼저 인사하고, 찾아가 인사하며, 힘들고 어려운 삶속에서도 항상 감사할 줄 알았던 신앙인이었습니다.

단체에서 회장 한번 맡지 않고 언제나 뒤에서 드러나지 않는 봉사만을 해온 자매님은 태안 성당의 자랑스런 신자였습니다. 그가 살아 있을 때는 그의 자리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떠나자 그가 남긴 자리는 너무나 커다란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신자들은 저렇게 사는 것이 참된 신앙인의 모습이라는 것을 배우고 느꼈습니다.

드러나게 봉사해 온 사람들도 부끄러움을 느꼈고, 그와 인연이 있었던 사람들은 요안나 자매님의 겸손한 모습을 생각해 내며 겸손에 대해 배웠고 친절함을 배웠으며 신앙인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배웠습니다.

참 신앙인은 살아 있을 때는 그 가치를 알지 못하고 떠난 다음에야 소중함을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많은 신자들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 생각했고 자신의 죽음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울어줄까를 생각하며 참으로 잘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해 주었습니다.

처음으로 본당에서 레지오장으로 장례미사를 드렸고, 장례미사를 드리는 날은 묘하게도 요안나 자매님이 속한 '바다의 별' 쁘레시디움 1000차 주회가 있던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잔치를 벌이기로 했던 날, 지상잔치가 아니라 천상잔치를 요안나 자매님을 위하여 하느님께서 마련하셨나 봅니다.

지난 목요일 주회 때 일일이 인사하며 "다음 주에는 못 나온다"는 말을 했는데, 그 인사가 영영 떠나는 인사인 줄은 아무도 몰랐지만 본인은 알았던 듯 작별인사를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너무나 착한 자매님이기에, 하늘나라에서 필요하기에 하느님께서 부르셨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하늘나라에서 태안성당을 기억하시고 모든 교우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실 것 같아 위안을 삼습니다. 부디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행복하소서!


2005-12-26 09:59
ⓒ 2005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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