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4일 (목)
(녹)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자유게시판

어느 아줌마의 글(퍼온 글)

스크랩 인쇄

백성원 [saranghe] 쪽지 캡슐

1999-10-29 ㅣ No.7544

유니텔에서 퍼온 글입니다.

 

 제 이야기가 아니라 경향신문에 있는 네티즌의 소리에 있는 내용입니다

 

 ======================================================================

 나는 한국에서 보통 아줌마였다. 남편은 직장을 다니고 그 월급으로 빠듯한 생활을

 해 나갔다. 하지만 회사를 통해 융자를 받아 경기도에 20평짜리 아파트도 샀고 (아

 파트 전세금 3000만+적금 탄것 1000만+ 융자 2500만) 아이가 태어나고는 대우 자동

 차 르망도 샀다.

 

  남편은 직장 생활 5년후부터 누적된 피로로 얼굴색이 나빠져 갔고 자주 술에 찌들어

  귀가해서는 쓰러지듯 넘어져 금방 잠들어버리곤 했다. 이런 남편의 모습에 가슴이

 아팠고 갑자기 신랑이 쓰러지기라도 할까 겁도 났다.아주 많이...

 

 결혼 초부터 미국에서 대학원 공부를 하고 싶어하던 남편에게 우리 형편에 말이 되

 냐고 펄펄 뛰기만 하다가 심각하게 생각 해보았다. 꼭 공부가 아니어도 뭔가 재충전

 의 시기를 가져야 내가 과부가 될 팔자를 모면할 것 같았다.

 

 유학 결심을 하고도 2년을 보내며 준비한 끝에 아파트를 전세준 돈과 저금한 돈을  

 샅샅이 틀어 천신만고 끝에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불안하기도 했지만 남편이나 나나 아직은 30대이고 아이도 하나니까 어찌되었건 아

 이 밥 먹이고 공부야 시킬수 있겠지하며 용기를 내었다.

 

 미국 온지 1년만에 IMF가 터졌다.

 한국에 돈을 두고 송금 받아 쓰던 우리의 눈 앞은 캄캄해졌다.

 

 하지만 기술직의 경력을 가진 남편은 운 좋게 파트 타임 일을 가질수 있었다.

 전공과 관련된 일은 주당 20시간까지 일 할수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열심히 일했던 남편은 이곳에서도 생각보다 빠르게 인정 받아 얼마후 정

 식 직원이 되었다.(공부도 수강 과목을 줄이긴 했지만 계속하고 있고 한과목만 남은

  상태이다. 논문도 거의 된 상태이고)

 나는 성실한 남편 덕에 정확히 2년만에 불안한 유학생 와이프에서 평범한 아줌마로

 돌아 올수 있었다.

 

 계속 고장나는 중고차를 처분하고 새차도 살 수 있었다.

 직장이 탄탄하고 신용도가 좋으면 적게는 집값의 3~5%만 내고도 은행 융자를 받아  

 집을 살수 있기 때문에 집도 샀다.

 

 내가 있는 곳은 집값이 비싸지 않아서 한국의 아파트와는 비교가 안되는 좋은 집에

 서 살게 되었다.  

 

 

 자.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한국을 떠나 올때 남편 공부 끝나자마자 돌아 간다 생

 각했던 내가 왜 마음이 변했는가.

 내가 좋은 집에 살아서도 아니고 신랑이 월급을 많이 받아서도 아니고 아이의 교육

 때문도 아니다.

 

 이곳에서 나는 어릴적 학교 도덕 시간에 배운 것들을 처음으로 이론이 아니라 실제

 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존엄하다. 꿈을 가지고 열심히 하면 된다. 정직이 최선의 길이다.

 서로를 존중하라. 돈보다 더 중요한게 있다. 등등

 

 한국에서나 이곳에서나 남편은 일과 공부만 했지 나머지는 모두 내차지였으므로

 사소하게는 슈퍼에서 장 볼때부터, 자동차를 사고, 집 장만을 해 나가는 과정에서  

 일을 처리하며 정말 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는 인간적인 모멸감을 당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서너번 가

 게 점원들의 불친절함으로 화가 나서 싸운 적이 있었지만 언제나 고객인 나의 승리

 였다.

 

 한국에서는 영어를 잘 한다고 까불었지만 이곳에서 나는 강한 액센트의 어눌한 말을

  사용하는 노리짱한 동얀인이다.

 하지만 불편함은 별로 없다.

 

 한국에서.....

 

 한국에서 내가 살던 아파트는 원래 임대 아파트였는데 5년이 지나 임대 기간이 끝나

  분양을 할 당시 소위 딱지를 5000만원에 사서 몇달 뒤 1500만원을 주고 분양 받은

 것이었다.

 십몇단지까지 있던 아파트 단지에서 내가 살던 아파트는 그러니까 전-임대 아파트였다.

 

 크레딧 카드 회사 직원이 근처 2단지에 나왔을때 임대 아파트였던 1단지에 산다고  

 나는 카드 회사 직원에게 은연 중에 가난뱅이 취급을 받았다.

 우리 동에 함께 사는 아이들은 학교에서 놀림 받은 적도 여러번이라 했다.

 그 후에 들어보니 영구 임대 아파트인 13단지에 사는 사람들이 받는 수모는 그 정도

 가 지나쳐 나를 분노케까지 했다.

 나나 신랑이나 부자는 아니었지만 좋은 부모님 밑에서 별탈 없이 자라 대학 교육까

 지 마칠 수 있었고 나도 아이를 낳기 전까진 꽤 괜찮은 직장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전- 임대 아파트에 사는 것 때문에 겪은 이 작은 일이 내게 준 파문은 너무

 도 컸다.

 이후에 정말 가난한 사람들은 대부분 나처럼 화내는 일도 없이 그 수모를 당연하게

 감내하면서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좀 싸게 사겠다고 대형 할인 매장에 아이를 업고 가 양손에 봉지를 들고-할인 매장

 은 판매 단위가 커서 몇가지만 사도 두손이 가득해진다.- 무거운 유리문을 억지로  

 어깨로 밀고 나오려 했을때 문을 잡아 주기는 커녕 그 사이로 빠져 나가는 사람들은

  정말 나를 화나고 슬프게 했다.

 아이를 업고 시장을 본 일이 있는 아주머니들은 이런 일이 너무 흔해 아무 생가 없

 이 받아들이는 분도 많으실 것이다.

 

 엘리베이트에서 민다고 욕을 하며 대드는 사람을 봤을때는 온몸에 공포감마저 들었

 다.

 

 결혼 전 아가씨로 세련된 옷차림으로 혼자 가볍게 다닐 때만 해도 몰랐는데 아줌마

 로 살아보니 사소하지만 황당한 일이 많았다.

 

 

 나는 거창한 정치, 사회는 모른다. 내게 그런 이야기는 멀기만 하다. 내가 인간적으로 존중받으며 살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내 아이가 살아가면서 성공하고 대접 받기를 바라기 보다는 황당한 일 당하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자신있게 떳떳이 하며 행복할 수 있다면 좋겠다.

 남편도 얼굴색 안 나빠지고 여유 시간도 좀 가지며, 쓸데없는 일로 골머리 썩지 않

 고, 잔머리 안 굴리고도, 아부 안하고도 직장 생활 잘 할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시대에 뒤쳐져가는 아줌마이지만 무시 당하지 않고, 나란 인간 자체 하나만으로 그

 존재의 가치를 보람있게 느낄수만 있다면 좋겠다.

 이런 것들이 가능한 사회가 미국이란걸 난 느낀다.

 

 나라를 버린다고 욕하라면 해라.

 난 이곳에 살면서 내가 잘 못하면 한국 사람 나아가서는 동양 사람 욕 먹인다고 언

 제나 신경쓰며 산다.

 좋은 옷은 아니어도 언제나 단정히 입고 머리도 깨끗이 빗고, 여행 가서도 방에서  

 라면 끓여 먹는 짓 따위는 절대 안한다.

 식당에서 팁도 꼭 15% 이상은 남긴다.

 

 나는 내 조국을 찬양하지는 않지만, 박 세리처럼 나라를 빛낼수는 없지만, 내 나라

 에 해를 끼치지 않고 최소한 좋은 한국인으로 비춰지려 이 미국 땅에서 노력한다.

 이곳에서 한국을 바라보니 내 조국이 더욱 요지경 세상인듯하지만 내 가족의 흠을  

 남 앞에서 얘기 하기 싫듯이 미국 사람들에게 한국의 단점을 애기하기도 싫고 하지

 도 않는다.

 

 언제나 한국을 잊지 않는다. 아니 잊을수 없다.

 모순처럼 들리겠지만 향수병에 자주 시달린다.

 하지만 그 그리움의 정체는 내 나라 대한민국이 아니라 그곳에 살고 있는 가족들과

 친구들일뿐이다.

 

 난 커가는 내 아이에게 어떻게 조국을 설명해야할지 약간은 걱정이다.

 

 

 두서 없이 쓴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506 0

추천 반대(0)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