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4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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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서로베르토 신부..끝내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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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순 [bejoyful] 쪽지 캡슐

2000-07-30 ㅣ No.12540

신부님, 신부님, 우리들의 신부님...’서 로베르또’ 신부의 삶

매향리와 함께 했던 신부...31일 명동성당 장례미사

 

 

최경준 기자 hosiuhang@hanmail.net    

 

 

▲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만 자신의 몸을 내맡겼던 서 로베르또 신부. 그와 가까웠던 사람조차도 그가 말기 직장암의 고통을 겪고 있는 지 알지 못했다.  

 

ⓒ 오마이뉴스 노순택

"그를 높이 우러러 보게 하지 마세요."

 

7월 28일 오후 9시, 서 로베르또 신부의 병실 앞을 지키고 있던 메리암 신부(외방선교회 골롬반)는 병원 직원까지 동원해 취재진을 막았다.

 

"신부님을 취재해서 세상에 알리는 것은 그 분의 삶과 정반대입니다."

 

메리암 신부는 끝내 기자들을 밀쳐냈다.

 

마침 서 신부의 병실에서 나오는 문정현 신부(매향리 미군폭격장 폐쇄를 위한 범국민대책위 공동대표)에게 그의 상태를 물었다.

 

"신부님은 지금 기계에 의존해 숨을 쉬고 있어. 내장은 수술했지만 복부는 아직 봉합도 하지 않은 채 산소마스크를 쓰고 있고, 손끝이 새까맣게 변해 있더라고."

 

문 신부는 충혈된 눈으로 "안타깝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병원쪽은 "오늘 밤을 넘기기 힘들 것"이라는 사형선고를 내려놓은 상태였고, 사제들과 신도 10여 명이 할 수 있는 일은 ’주님의 은총’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리고 7월 29일 새벽 0시 40분께 서 신부는 ’직장암’이라는 고통스러운 병으로 66년의 생을 마감했다.

 

서 로베르또(Fr. Robert Sweeney)신부의 삶은 어떠했는가?

 

미국 뉴욕주에서 출생한 서 로베르또 신부가 한국에 온 것은 그의 의지가 아니었다. 아일랜드에 본부를 두고 있는 외방 선교회에서 그를 한국에 파견한 것이다.

 

그렇게 한 번 파견되면 평생을 그 나라에서 선교 활동을 하게 된다. 외방선교회에서 1933년부터 중국, 남미, 동남 아시아 등지로 선교활동을 떠난 신부는 전 세계적으로 600∼700명에 이르고, 한국에만 50여 명이 있다.

 

서 신부가 한국에 왔을 때는 5·16 쿠데타 직후 암울한 군사독재 시절이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충남 아산군 인주면 공세리 성당으로 내려갔다. 바다가 육지로 깊숙이 들어온 아산만에 인접한 공세리 성당은 멀리 삽교천을 바라보고 있는 곳이다.

 

서 신부는 이 곳에서 순교자의 발걸음을 묵상했을 지도 모른다. 성당 옆으로 난 한적한 오솔길에는 예수의 수난을 묵상할 수 있는 14처가 마련돼 있고, 연륜을 알 수 없는 고목은 말없이 그와 함께 수도의 길을 걸었으리라.

 

메리암 신부는 서 신부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몸과 마음이 가난하기를 스스로 원하셨죠. 그래서 가난한 사람에게 특별히 관심을 가져왔고, 부정부패에 대해서는 참지 못하는 성품이었습니다. 신부님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고 행동으로 보여주는 열정적인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 그래서 그는 선교자가 되기 전에 농민이 되기를 자처했다. 그리고 실제 농민으로 지난 30여 년을 살았다.

 

1988년 아산에서 멀지 않은 당진으로 자리를 옮겨 농민들과 공동체 생활을 시작하면서 그의 ’행동’은 더욱 직접적인 것으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작년 겨울 그마저도 정리하고 올해 1월부터는 외방 선교회 한국지부 골롬반 정의 평화위원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서 신부가 SOFA 개정을 요구하며 미국 대사관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였다. 그와 10년 가까이 인연을 맺어 왔다는 문정현 신부는 그를 "정의에 대한 사명감이 투철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모든 것에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서 신부는 문정현 신부와 함께 집회 현장에 참석하기 시작하면서 매향리를 알게 됐다. 매향리에서 풍선을 날리는 날에는 큰 것으로만 골라서 한아름 안고, "어디에서 띄워야 전투기를 맞힐 수 있죠?"하며 뛰어다니기도 했다.

 

다음은 지난 6월 23일 매향리 미군폭격장 폐쇄를 위한 범국민 결의대회에 참가한 그를 만나 나눈 대화의 한 부분이다.

 

- 집회에 참석하게 된 특별한 동기가 있나요?

 

"나는 신부로서, 크리스찬의 한 사람으로서 사람과 자연을 파괴하고 괴롭히는 것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에 이 곳에 왔습니다."

 

- 매향리 주민들이 왜 고통받는다고 생각하십니까?

 

"미국이 자신의 기득권을 위해 한국사람을 괴롭히고, 때리고, 죽이고 있어요. 이건 말도 안됩니다. 이 모든 것이 미공군의 이름으로 경영하는 회사 ’록히드 마틴’의 프로그램입니다. 그들은 F-16, 스텔스 폭격기 등의 값을 올리기 위해 미국의 양당에 정치 자금을 주면서 로비를 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곳 매향리에 폭격장이 필요하게 된 것이죠."

 

- 미국인으로서 매향리가 미군 폭격장에 의해 생존권을 위협받고 있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 정부는 한국에 있는 미공군 사격장을 즉각 폐쇄해야 해요. 그리고 SOFA도 한국인이 원하는대로 개정돼야 하구요."

 

- 매향리 집회는 자주 참가 하셨습니까?

 

"이번이 5번째입니다. 그런데 지난 번 집회 때 경찰에 의해서 비인간적인 일이 있었어요. 미국은 이곳 사람들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집회 내내 구호를 따라하기도 하고, 노래도 부르면서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살아왔던 서 신부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문정현 신부는 그가 이미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확신했다.

 

"술과 담배를 그렇게 좋아했는데 얼마 전부터 술, 담배를 권하면 ’내가 이거 먹었으면 벌써 죽었을 거예요’라면서 극구 사양을 하는 겁니다. 지난 번 집회 때는 얼굴색도 좋지 않더라구요."

 

지난 주 오랜만에 휴가를 얻어 떠난 강원도 태백산에서 서 신부는 결국 쓰러졌다. 24일 밤 갑자기 두통과 복통을 호소하던 서 신부는 의식을 잃고 말았다. 원주에 있는 가까운 병원으로 급히 옮겼으나 그 병원에서는 더 큰 병원으로 가야 한다는 대답뿐이었다.

 

원주에서 앰뷸런스에 실려 서울로 오는 동안 서 신부는 간혹 의식이 돌아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운전사는 서 신부에게 이것저것 말을 시켰다.

 

"신부님, 정신이 드세요. 지금 태백산을 막 벗어났어요. 그런데 여기서도 미군의 폭격이 실시된다는 것 아세요"

 

서 신부는 희미한 의식 속에서도 운전사의 말을 알아들었던지 "미국 나쁘다"라고 힘겹게 말했다. 운전사는 신부가 의식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해 말을 받았다.

 

"그래도 먹고 살라면 참아야지 어떻게 해요."

 

서 신부는 또 한번 힘겹게 입을 뗐다.

 

"아니에요. 한국사람들 미군 없어도 먹고 살수 있어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다시 의식을 잃었다.

 

그 뒤로도 그는 의식이 돌아 올 때마다 "SOFA 어떻게 됐느냐?","뉴스 봤느냐?"라고 물어보곤 했다. 그러나 그의 내장은 이미 파열된 상태였다.

 

25일 밤 강남 성모병원에서 늦은 수술을 시도했지만, 다시 그의 운명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중환자실 앞에 모인 사제들과 신도들은 기도를 하며 그의 마지막을 지켜줬다.

 

문 신부는 그를 "95%도 아닌 100% 예수의 삶을 살았다"고 거침없이 말한다.

 

"그가 지금 더 살 수 있다고 해도 특별히 하고 싶은 일은 없을 것이다. 그는 그저 주어진 일을 순리대로 해 왔던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그에게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그는 한국신학연구소 <살림>이라는 잡지에 정기적으로 글을 써왔다. 주로 주한미군과 SOFA에 대한 글이었다. 그리고 열흘 전 그는 매향리에 관한 한 편의 원고를 보냈다. 하지만 그의 생애 마지막 글은 배달사고로 현재 행방불명이 된 상태다.

 

12년 간 그와 함께 선교활동을 벌여왔다는 정 마리아 수녀는 잃어버린 원고의 내용에 대해 "지난 번 최종수 신부가 매향리 사격장인 농섬에 들어갔을 때 자신이 함께 못들어간 것이 분하다"며 "다음에는 꼭 자신이 들어갈 생각이라는 내용"이라고 말했다.

 

그는 8월에 매향리 미군 사격장 농섬에 들어가기로 매향리 범국민대책위 쪽과 계획까지 세워놓았었다.

 

서 신부는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죽음 앞에서도 의연한 신앙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신앙은 ’정의’와 ’사랑’이었으며, 그렇게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제 그가 향할 곳은 더 이상 낮아질 곳이 없는 평화로운 그 곳이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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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 로베르토 신부님이 어제 0시 40분 성모 병원에서 운명 하셨습니다.

 여러분의 기도를 거듭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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