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4일 (목)
(녹)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자유게시판

명동성당사태를 본 인권운동가의 고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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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창익 [hrights] 쪽지 캡슐

2000-12-22 ㅣ No.16002

안녕하십니까?

저는 지난해까지 교회 사회운동단체에서 일하다가 지금은 교회밖의 인권단체에서 일하고 있는 인권운동가입니다.

신문에서 명동성당측이 한통노조에게 성당에서 나가달라고 했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이곳에 오면 더 자세한 소식을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들렸습니다.

현장에 직접 가서 본 것 같은 생생한 사진도 많이 볼 수 있었고, 또 여러분들의 생생한 의견도 읽었습니다.

 

착잡하더군요.

착잡한 마음으로 제 생각 몇가지를 밝히고자 합니다.

 

우선 한통노조는 수적 우위를 앞세워 힘으로만 밀어붙이는 매우 잘못된 일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1995년 한통노조가 민주노조로 막 출범했을때도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했었습니다. 그때 5,6명의 간부가 농성을 하고 있었는데, 이분들은 제가 10몇년동안 지켜보았던 명동성당 농성자들 중에서 가장 모범적이었습니다. 아예 천주교 신자들 위주로 농성자를 꼽았고, 매일 새벽미사에 참석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기가 생활했던 공간, 움직였던 공간에 대해서는 완벽한 청결을 유지했습니다. 소수였고, 약자였고, 쫓기고 있었지만, 언제나 미소를 잃지 않았고, 겸손했으며, 한편 당당하기도 했습니다.

이분들이 농성이 장기화되면서 성당 신부님들과도 상당한 교분을 갖게 되었습니다. 신부님들도 당시 이분들의 어쩔 수 없는 농성을 상당히 이해할 수 있었고, 막판에는 정부와의 중재에 나서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 현충일인가에 갑자기 경찰이 이들을 붙잡아갔습니다. 그러자 명동성당을 비롯한 우리 교회는 하나되어 오만한 정권의 성소침탈에 대해 한목소리로 저항했고, 이러한 저항은 당시 지자체 선거에서의 여당 참패로까지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공권력의 침탈이 교회의 저항을 불러일으킨 가장 큰 이유이지만, 만약 한통노조 농성자들의 모범적인 생활과 성당측과의 정서적인 일치가 없었다면 그렇게까지 큰 문제로 비화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한통노조는 이런 저런 싸움과 외부의 도움을 통해 강력한 노조로 성장할 수 있었고, 자기 조합원들의 권익을 지킬 수 있는 힘있는 조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5년 반쯤 지났습니다.

이번에도 한통노조의 농성이 있었습니만, 그 양상이 크게 달랐습니다. 우선 농성 참가자들의 수가 정말 문제였습니다. 명동성당은 다만 몇백명만 농성을 해도 몸살을 앓을 정도로 좁은 공간이고, 또 그런 대규모 농성을 뒷받침할 부대시설도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공간에 1만명이 넘는 어마어마한 인원을 집어 넣은 것입니다. 이건 분명한 과오입니다. 저는 한통노조 집행부가 단순한 과오의 차원에서 이렇게 했는지, 아니면 회사와의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일부러 이렇게 했는지에 대해 알 수 있는 입장은 아닙니다. 만약 의도적이었다면 ’범죄적 과오’라는 표현을 쓰고 싶습니다.

왜 한통노조는 명동성당에 그런 대규모 인원을 풀었을까요? 제가 월요일(18일)에 명동에 갔을 때, 가톨릭회관 후문쪽에서 규찰대가 외출하려는 노조원들에게서 신분증을 받아두는 것을 보았습니다. 족히 수백장은 되어 보이더군요. 이탈을 두려워한 탓이겠지요. 노조집행부로서도 조합원들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던 상황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렇게 통제되지도 않는 대규모 인원을 명동에 풀어놓으니 우리가 밑에서 쭉 지켜보았던 그런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이건 명백히 노조 지도부의 책임입니다.

만약 노조가 대규모 인원은 대학이든, 아니면 본사가 있는 광화문앞길(이 길이 얼마나 넓습니까, 수십만도 들어갈 수 있는 참 좋은 곳인데...)에서라도 농성을 진행하고, 체포영장(이나마 뒤늦게 나온 것이지만)이 발부된 소수의 지도부만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하는 방식을 취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전적으로 노조가 힘으로만 밀어붙이면 된다고 매우 잘못된 생각을 한 탓입니다.

저는 이번 사태를 보고 분노하는 교우들에 대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상황이 이 지경이되었는데도 화를 내지 않는다면, 그래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 사람이 뭔가 균형없는 판단에 사로잡힌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노조든 사회단체들이 명동성당을 찾아오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조계사나 성공회성당처럼 후미진 곳에서 할 수도 없고, 다른 곳은 받아주지도 않을 것이고, 또 공권력이 함부로 들어올 수 없다는 역사적, 현실적 배경도 있고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농성에 들어오는 사람들도 정말 절박한 상황 속에서 절박한 선택으로 들어와야 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1만명이 넘는 인원을 풀어버리고,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입니다.

 

그리고, 명동성당 신부님들과 이곳을 찾는 교우들께도 고언을 한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이번 사태는 명백한 한통노조의 잘못이 분명하지만, 우리에게도 스스로 성찰할 것은 분명히 있는 것 같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그동안 매일처럼 또 수십년 동안 명동성당에서 농성이 있었지만, 제 기억에 1987년 상계동 173번지 철거민 정도를 제외하고, 성당 측에서 따듯하게 품어주었던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늘 귀찮은 사람들이었고, 늘 성당의 기능을 방해하는 사람들로만 보았을 뿐입니다.

5.18이든, 장애인이든, 외국인노동자든 명동을 찾는 정말 약자들, 소수자들, 쫓기는 사람들에게 그동안 명동성당은 결코 따듯한 품은 아니었습니다. 따듯한 차 한잔, 어둠을 밝힐 수 있는 전기, 발뻗을 따듯한 공간을 제공한 적도 한번도 없었습니다.

물론 성당측의 이런 태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성당 관계자들께서 갖고 계신 피해의식이랄까요, 이런 측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 이제 어떻게 해야하겠습니까? 신자들도 우리도 규찰대를 만들든지, 아니면 경비원을 대폭 늘이기라도 해야 할까요?

정답은 이런 것이 아닐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명동이 노조, 사회단체에게도 미칠 수 있는 도덕적 권위를 가져야 하고, 이게 명동 농성문제를 푸는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권위는 내가 권위를 갖고 싶다고 해서, 또는 교회라 해서 거저 얻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차피 명동에는 사람들이 계속 찾아올 것입니다. 그러면 국보법 농성자들처럼 소수는 직원들을 풀어서 천막을 뜯어내고, 한통처럼 다수는 화가 나도 그냥 참아야 하는 것이 정답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건 오히려 힘에 밀리는 꼴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에 불과합니다.

진정 도덕적 권위를 갖고자 한다면, 약자는 철저히 보호하고(더 따듯하게 보호하고), 보호가 별로 필요없는 사람들에게는 보다 단호해야 합니다.

쉬운 일은 아닙니다만, 이 쉽지 않은 일을 통해서만 풀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문제에 관해 언제 어디서든 누구와도 토론하고 싶고, 이런 진지한 토론을 통해 대안을 함께 모색했으면 합니다.

갑자기 글을 써서 글이 두서없이 길어지기만 하였습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창익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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