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4일 (목)
(녹)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자유게시판

임충신 마티아 신부님을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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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안나 [joanveth] 쪽지 캡슐

2001-09-19 ㅣ No.24495

 

신부님을 안 지 벌써 5~6년이 됩니다.

일산 새도시 최초의 비닐하우스 성전이 생기고 본당신부님의 큰아버지이셨던

할아버지 신부님은 아침9시 미사에 90이 넘으신 노구를 이끌고

어김없이 집전을 하시면서 신자들 사이에 인기를(?) 한 몸에 받으셨지요.

성당을 지어가는 과정을 신자들에게 알리는 취지 아래 "이르에"라는소식지를

만들게 되고, 그곳에서 잠깐 봉사했을 당시(97년) 할아버지 신부님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눈 글이 할아버지 신부님이 타계하신 어제 아련히 떠올라

다시 올려놓으며 할아버지 신부님의 생전에 모습을 기억하려 합니다.

 

정발산의 가을이 한창인 10월.

우리에게 따뜻한 이야기로 주일 아침을 열어주는 임충신 마티아 신부님을 뵈러 갔다.

일산 한동네에 살면서 그림같은 단독주택을 차창밖으로만 보다가

막상 들어가 보니 아담하고 정갈하였다.

1917년 11세때 황해도 사리원에서 난생 처음 기차를 타고 용산 신학교에 가던 기억을 되살리시는 할아버지 신부님.

91세 연세로 이젠 귀도 잘 안들이고 봤던 사람들도 돌아서면 알아보기 힘들어도

지난 시절 이야기만큼은 방금 일어난 일처럼 신나하며 재미있게 해주신다.

무슨 이야기할 게 있냐고 극구 마다하시더니

"그래, 뭘 물어볼라 그러오?" 하시며 아이같은 얼굴로 웃으신다.

 

  이르에 : 신부님, 신학교 얘기 좀 해주세요.

  신부님 : 신학교 얘기? 내가 그린 그림책 못 봤나? 가만있어봐라....

 

신부님이 꺼내놓은 책을 펼쳤을 때 깜짝놀라고 말았다. 그야말로 그림책이었다.

아버지와 세명의 아이가 황해도 매화동을 떠나 사리원 기차역으로 가는 것부터

시작되는 그림책. 색연필과 사인펜으로 꼼꼼하게 그림을 그리고, 아래에는 그림을

설명하는 할아버지 특유의 황해도 말씨를 입말 그대로 써내려간 그 그림책은 혼자

보기에는 너무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르에 : 가장 기억에 남는 스승님은 누구세요?

  신부님 : 신학교 교장 신부님인 진신부님이라고 불란서 분이신데 얼마나 뚱뚱한지

           일본 씨름선수있지? 그렇게 몸이 컸단 말야. 그분이 어델 가려고

           인력거를 불렀어. 근데 그분이 탄뒤 막 끌고가는데 손잡이가

           우지직하면서 부러지잖아.그러니 그 무거운 양반이 길가로 굴러떨어진거야.

           그게 생각나누마.

 

신부님의 신학교 이야기는 계속 이어진다.

 

  신부님 : 라틴말 가르치는 신부님이 계셨는데 라틴말이 어려우니까 잘 안쓰게 되잖어?

           한 아이를 붙잡아가지고 라틴말 안쓰면 쇳덩이를 줄로 매어 어깨에 매달고

           다니라는 거야. 그러고 다니다가 라틴말을 안쓰는 놈에게 지가 걸고 있는 것을

           걸어주라는 거야                  

           쇳덩이를 매단 놈이 지나가는 애맷놈을 툭쳐서 "아얏"하고 멋모르게 말이

           튀어나오면 "너 라틴말 안했어"하며 건네주고 도망가는거야. 그러다 겨울이

           됐는데 침실엔 불을 안때서 냉방인데 한놈이 그걸 매달고 다니다 교실 화로에

           쇳덩이를 올려놓고 달군단 말야. 그놈을 수건에 둘둘 말아서 침상밑에다 넣어

           놓으면 따끈따끈하니 그렇게 좋을수가 없거든. 그런 다음부턴 저마다

           그 쇳덩이 매달려고 난리였지.

  이르에 : 신부님 부임하셨던 성당중에 가장 잊지 못할 성당은 어디였나요?

           어렸을 적 신학교 이야기를 신나게 들려주신던 신부님께서 잠시 생각에 잠긴다.

           고향생각을 하시는것 같다.

  신부님 : 6.25땐데 내가 황해도 곡산본당 신부로 있을 때. 내려가고 올라오고

           경황이 없던 때 미군이 곡산을 불바다로 만들어 놓은 뒤 국군이 입성했거든.

           아무것도 없이 산으로 피난가 있다가 잠잠해서 내려와보니 도둑이 들어서

           걸쳐입을 옷 하나 없이 몽땅 가져가 버렸어. 근데 국군 환영식에 참석하라는

           거야. 옷은 거지중에 상거진데 로만칼라만 목에 끼고 갔지.

           날 오라 했던 사람이 참모총장이라는데 자기도 천주교 신자라고 반갑게 맞아

           주는 거야. 그 얼마나 반가운지. 그날밤 그이가 건네주는 정종을 주는대로

           받아먹었는데 5년동안 못마신 술 그때 다 먹은 것 같아.

 

신부님은 그날 만난 참모총장이 내준 차로 서울로 일을 보러 떠났다. 하지만 일을 마치고

곡산으로 가려 했을때는 중공군의 참전으로 길이 막혀 버렸다. 그길로 서울에 발이 묶인지

47년.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중공군이 내려왔을때 곡산의 성직자들은 모두 총살을 당했다. 신부님은 서울에 계신 덕에 화를 면했고.

 

  이르에 : 신부님 저희들 성당 짓는거 보시니 어떠세요?

  신부님 : 지금 교우는 대단해. 옛날엔 돈이 없으니까 교무금이라야 겨우 자기

           농사지은 거 갖다내곤 했지. 성당 짓는 일은 상상도 못할 일인데,

           지금 교우들은 자기집처럼 본당 짓는데 열심이라 정말 보기 좋고

           신앙심도 훨씬 낫다고 생각해.

  이르에 : 은퇴 신부님들에게 교우들이 많이들 찾아 오나요?

  신부님 : 참 고마운 이들이 많아. 우리네 신부들이 일생을 고독하게 교우들만 위해

           일하고 늙었다고 가톨릭 운전기사 양반들이 식사대접도 하고 여기저기서

           오라 하고 찾아오기도 하는 교우들이 많아요. 신심이 좋다는 거지.

  이르에 : 하루 일과는 어떻게 보내세요?

  신부님 : 난 하루에 세 번 밖엘 나가는데, 아침에 나가고 점시먹고 나가고

           오후에도 나가. 정발산 공원엔 여기저기 쉴 곳이 많아서 책도 보고

           신문도 읽고 하지.

  이르에 : 신부님 힘드셨죠? 그만할까요?

  신부님 : 힘들긴 뭐이가 힘들어. 얘기하는 거 하나도 안 힘들어. 듣는 게 힘들지.

           그런데 두 양반 내가 성당가서 못알아본다고 섭섭해 하지마.

           요렇게 앉아서 얘기해도 문밖 나가면 몰라. 그렇게 알고 있으라우.

 

’신부 임충신’ 문패가 달린 그림같은 집을 나오며 북에 두고온 어머니와 누이의 나이를

따져보던 신부님의 눈을 가슴에 묻고 발길을 돌린다.

 

이상은 이르에지 97년 10월호에 기재 되었던 생전에 임충신마티아 신부님과 나눈

이야기였습니다. 백석동 성당을 떠나 이웃마을에 와서 신부님계신 집을 지나가며

창가에 앉아계신 신부님을 보는 것만으로 마음 든든하였습니다.

이제 하늘나라에서 우리들을 바라보시며, 두고 온 고향땅도 두루 보시고 헤어졌던

누이와 부모님 그리고 친구 신부님들도 만나셨을 것입니다.

할아버지 신부님 잊지못할 만남이었습니다.

주님

임충신마티아 신부님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에게 비추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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