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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글(한국교회 쇄신과 성직자 중심주의 극복에 관한 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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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조 [kijope] 쪽지 캡슐

2002-03-14 ㅣ No.30869

이 글을 추천하며 나는 생각한다.나도 당당한 교회의 주인이고 싶으며 한국 교회가 부식 시켜 놓은  평신도 양이라는 미물이 아닌 그들처럼 목자는 아니더라도 하느님 앞에서 나도 인간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평신도인 나는 교회의 들러리가 아니고 성직자들의 찌기다시가 아닌 당당한 교회의 주체자임으로 살고픈 생각을 아래 쭈욱 밑에 글에서 하게 돼었다.그런 의미에서 그글을 읽고 평소 느낀 나의 교회에 대한 소회가 아예 틀린 것이 아님을 확인하는 기쁨이 있었다.아래 글은 나의 글이며 밑에 이 글 다음의 글은 저가 추천하는 글입니다.

 

 

요즘 각 교회 사이트 마다  끊임없이 한국 가톨릭 교회의 성직자들의 추문들이 터져 나오고 있다.이러한 현실은 미리 예견된 것이다.그동안 우리 교회는 그동안 수없이 발생한 교회의 반복음적인 모순과 성직자들의 패권적 의식에 기인한 추악한 사건들을 은폐하기에 급급하였으나 이제 참으로 복된 이 시대 교회쇄신을 위한 하느님의 선물인 인터넷을 통한 하느님의 섭리앞에는 그 잘난 교회.마치 중세의 권력집단임을 스스로 자처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드르며 교회의 추문들을 은폐 조작하기에 급급했던 교회도  이제 속수 무책일수 밖에 없는 하느님의 진노가 이제 교회 심장을 향하고 있음을 직감한다.

 

 

한겨례 신문에도 보도 되었던 인천교구의 모성당의 모신부의 신자들의 땀과 정성 하느님 사랑에 의거한 건축기금을 수십억 횡령한 사건.이와 유사한 각볻당의 미사 공금힁령등의 폭로와 소사 성당 사건에서 보듯 마치 자신이 절대권력자로 착각하는 조폭두목같은 신부의 무소불위의 힘의 과시와 미사를 중단시키며 평신도릉 잡아가고 고발하는 정신병적 권력에 대한 집착.그리고 이곳 계시판을 뜨겁게 달구었던 정신 이상자 수준의 신부어르신네인 젊은 친구의 신앙심 깊은 노 사목회장의 폭행사건.그리고 끊임없이 들려오는 신부둘의 여성 학대와 추문등이 그동안 막강한 교회권력으로 차단하며 진리를 속이고 하느님 마저 기만하며 권위의 영속화를 꾀한 우리 교회의 노력도 하느님의 교회쇄신에 대한 의지로 나타나는 인터넷의 위력앞에서는 굴복할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한국 교회의 위선과 기만은 꼿동네라는 자칭 성지를 통하여 절정에 달한 느낌이다.그동안 그토록 신자뿐 아니라 모든 국민들에게 사랑의 위대한 가치를 일깨워 주며 버림받은 자의 메카이었던 꼿동네 마저.그 잘난 오옹진 신부마저 꼿동네 형제들의 인권을 유린하고 장기이식 서약서를 강제화 하여 조작 전국민을 우롱하고 재산을 은닉하였다는 정황들이 속속 들어 나고 있다.이제 더 이상 회칠한 무덤 처럼 강요되고 조작된 가치로 영구세세 복음을 팔아 썩은 악취의 권력을 이어가기 위하여 평신도들을 문맹화 시키고 우민화 시키며 성직자와 평신도를 주종의 관계로 각인시키며 교육시켜 놓아 자신들의 죄악에 대한 정당한 비판을 하느님에 대한 불신앙으로 매도하며 오히려 적반하장식으로 평신도들을 매도하는 그들의 허구에 정면으로 진리를 지켜 나가는 평신도가 되고 싶다.난 그것이 복음을 위한 피흘림이라 생각한다.

 

 

본인은  교회와 일부 성직자들의 타락이 주는 절망은 신앙으로 극복할수 있을 것 같다.왜나면 어떠한 조직이던 그조직안에서 터져나오는 타락과 허위는 인간 사회가 존재하는 한 있을수 밖에 없을 것디다.

 

그러나 본인을 더욱 영성적 회의감에 빠지게 하는 것은 처절하고 불쌍할 정도의 교회의 양의 탈을 쓴 늑대의 모습같은 위선적 허구를 은혜하기 위한 권력의 과시 힘의 과시를 그들의 종인 우리 평신도들에게 아무런 양심의 가책업이 행하고 그 썩은 힘을 성령의 뜻이라고 왜곡하는 하느님에 대한 신성모독에 분노하는 것이다.

 

 즉교회가 성직자들의 일탈과 타락이 일반법으로라도 분명 처벌이 가능한 사유일지라도 해당 주교와 교권은 오히려 이를 은폐하고 일반 선량한 신자들을 매도 하며 신자들의 정당한 요구에 대하여 철처히 침묵하는 모습을 이 소사 성당의 예에서 보듯 어찌 이러한 교회가 진리의 교회로 자처하는가? 하는 회의감.그들이 그토록 질타하던 정치권의 비리와 정치인의 사고 구조 즉 은폐와 이중적 사고와 봉사보다는 기만으로 국민을 속이는 그듧보다 더 야비할때가 교회가 더 많음을 느끼며 이제 교회의 쇄신은 스스로 목자라고 우기며 우리는 귀족 평신도 너희는 평민이라는 사고 구조에 머물고 있는 반 그리스도적인 반복음적인 일부 교회의 뒤틀린 성직자들에게 맡길 것이 아니라 이제 우리 스스로가 쇄신된 모습으로 하느님의 참 복음을 위해 잘못된 것은 과감히 아니요 하고 맞는 것은 예 하며 참 교회가 되기 위한 운동을 하여야 할때라 봅니다.

 

 

그러기에 우리 자신들도 많은 신학 공부와 신앙의 본질에 눈을 떠서 더 이상은 그 잘난 성직자들이 평신도를 평민 취급하며 깔보고.성당 건축 공금을 수십억 힝령하고도 멀쩡히 구속은 커녕 건재를 과시하고 새파랗게 젊은 신부 친구가 아버지뻘 되는 어른의 뺨을 갈겨도 하느님의 뜻이련만 무엇인가 우리 평신도가 부족하겠지,또 그들도 인간이니까 하면서 침묵하고 방조하고 오히려 정당한 의견을 개진하는 평신도들을 질타하는 어리석고 하느님 보시기에 멍청한 신자들로 살아 간다면 이는 당시 교회 지도자와 바리 새인들을 향한 목숨을 버리시면서 까지 저항하신 주님을 모독하는 기회주의적 신앙이라 확신한다.평신도들이여 그대들이 관용과 지나친 성직자 섬기기가 우리 교회를 이토록 회칠한 무덤으로 둔갑시키지나 않았나 반성합시다

 

잘못은 그들이 했는데 왜 오히려 하느님을 팔고 교회를 기만하고 신자들의 양심을 짓밟은 전형적 바리새인의 표본인 주님도 무서운 어조로 이 사탄의 족속아 하며 외칠 그 문제  신부들을 우리 평신도들이 가엾게도 앞장서서 주님도 실수 할때가 있지 하며 관용을 베풀어 그들이 정신을 차릴 기회를 박탈하게 하여 교회를 더욱 어둠의 질곡으로 몰아 가는 것입니까.그러니 그들이 우리 한국 교회 신자들을 병신도라 하지 않읍니까.각성합시다

 

 몰론 이러한 평신도들의 무지와  무능과 맹종은 그동한 .한국 교회가 뒤틀린 불쌍한 교회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사목의 현장과 모든 교리서 그리고 신부들의 강론이나 여러 책으로 철저하게 조직적으로 쇄뇌시켜 놓은 산물이라 봅니다.그 일례로 전 교회가 성령의 감도하에 개최하여 성직자와 평신도의 관계가 수직적 주종의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 형제적 관계임을 천명한 바티칸 공의회를 한국 교회는 철저히 숨기고 신자들에게 교육을 시키지 않고 있는 현실에서 그들이 중세의 타락한 교회권력을 모든 세계 교회가 반성하고 있음에도 한국 사회안에서 철저히 행사하고자 하는 얄팍한 어둠의 자식의 사고에서 나오는 저의를 감추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오죽했으면 한국 가톨릭 교회는 성직자들의 천국이라 하겠읍니까.일반인들의 상식적 사고보다 못한 사고로 속세의 권력에 탐닉하는 부류의 성직자들은 이참에 과감히 양심 선언하며 어둠속에 자신의 위선을 감추지 말고 모두 정리 해고 되었으면 하는 심정이 요즈음 일어나는 불쌍한 신부들의 꼬락서니를 보고 느끼는 솔직한 심정입니다.아마 우리 주님은 더욱 찢어지는 가슴 봉하느라 더욱 십자가의 상처가 아릴 시간의 연속일 것입니다.

 

.교회와 신부 비난하면 마치 직지옥행이라고 주장하는 중세 시대의 답답한 지식과 사고 안에 머물러 참 복음을 모르고 살아가는 다수의 우리 평신드와 여기 계신분들이 깨달았으면 합니다.주교가 신부가 잘못하면 과감히 예수님의 예언자적 신앙안에서 목숨을 걸고 질타하고 그들이 잘살면 존경하고 그리고 그 들이 사회법을 어겼을때는 사회적 가치로 법정에 고발하고 그들이 서울교구의 정신 이상한 신부처럼 아버지 같은 분의 뺌을 때리는 패룬을 저질렀으면 사회 관습법으로 냉정히 못된 송앚이 엉덩이 뿔난것 매섭게 나무라 고지게 해주고 소사 성당에 성탄절 미사에 공권력이 침투 악질 깡패 신부가 신자들을 끌어내고 고발하고 미사 성제의 거룩함을 유린하였으면 그 신부를 하느님의 이름으로 고발하면 됩니다.그리고 그ㅡ성당이 정상으로 돌아와 그 신부와 해당 교구가 회개할때까지 다른 성당을 이용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간단한 문제를 어렵게 보시는 답답함과 일개 짐승 양인 우리들의 아둔한 머리를 깨기 위해 이분의 글을 계속 퍼겠읍니다.감사합니다.

 

이제 나는 한국 교회가 평신도인 나를 양이라 하고 자신들 성직자들만이 인간인 목자라 한다면 나는 그것을 과감히 거부하고 나도 그들처럼 하느님 앞에서 당당한 인간이 될것입니다.왜냐면 목자는 우리 주님 한분뿐이시고 우리들 모두는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벗이며 형제라는 성서에 기초하여 그러하기에 그들이 저를 질타할 신학적 명분과 복음적 명분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기에 나도 그들처럼 인간대접을 받는 신앙을 갈구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 평신도들의 잠자는 의식을 깨울수 있는 좋은 글을 우연히 교회내의 유일하다 시피한 평신도들이 만든 불쏘시개라는 사이트를 방문하다 제 사견상으로 성직자로 추정되는 분.그러나 그 역시 그 제도 교회인에 몸담고 있으면서 교회의 반복음에 절규하는 듯한 모습의 케노시스라는 분의 글을 발견하고 저의 그동안의 사고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희의를 거두고 안심하고 나의 사고를 하느님 신앙안에서 간직하며 작은 교회의 참된 양심으로 살아가리라 다짐하면서 여러분들도 참다운 복음을 사는것은 교회의 거짓에 맹신하기 보다는 타락한 성직자들의 허구들을 감추기 보다는 당당하게 하느님만을 믿고 정의로운 깨인 신앙을 통하여 비록 힘은 미약할지라도 우리 사랑하는 교회가 참된 복음의 교회로 돌아 올수 있도록 교회를 바꾸는 쇄신의 작은 몸짓이었으면 좋겠읍니다.하느님의 양심을 따라 사는 것이 중요하지 잘못된 교회에 충고보다 묵인하는 즉 불의에 대한 묵인과 방조는 그런 행위를 하는자 이상으로 하느님의 진노를 살것임을 확신합니다.

 

앞으로 이분뿐 아니라 우리 교회룰 쇄신기키는데 미력이나 다하고자 한국 교회의 깨어 있는 지성들의 글을 많이 퍼올리겠읍니다.많이 읽어 주시고 같이 교회를 바꾸는 참 신앙인이 되어 우리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그들이 더 이상 아파하지 않는 교회를 물려 줍시다.

 

 

 

한국 교회의 쇄신과 성직자 중심주의 극복에 대한 ....

 

이름 : 케노시스     번호 : 50

게시일 : 2001/04/07 (토) AM 05:58:22  (수정 2001/07/04 (수) AM 02:41:58)    조회 : 295  

 

한국 교회의 쇄신과 성직자 중심주의 극복에 관한 논고

 

1.들어가는 말

바야흐르 세계는 지금 20세기라는 거대한 세기를 넘어 물질문명과 첨단의 과학문명으로 무장하여 급격한 발전과 비약적인 변혁을 하고 있다.이런 세상의 비약적인 발전과 변혁은 과학문명이라는 물질적 풍요를 인간에게 주었지만.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인간정신의 유물화와 함께 인간을 소외 시키고 황폐화 시켜버리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 신이 부여한 인간의 고유한 인간성 마저 말살 시켜 자본의 노예로 만들어 버리는 극단적 관점에서  정신의 해체상황에 놓여 있다.바로 이는 인간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종교성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며 이러한 중차대한 현실은 모든 정신적 가치안에 있는 종교인들에게 새로운 쇄신과 각성을 필요로 하는 당연한 시대적 요청에 직면하게 한다.

 

이러한 세계의 급박한 변혁과 흐름속에 우리 교회도 그리스도 강생 2000년의 대희년을 넘는 연륜으로 세상과 함께 그 궤적을 그리며 나아가고 있다.이런 관점에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신 하느님을 신앙하고 있는 교회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하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교회 자신의 물음을 필연적이어야 한다.

 

가톨릭 교회는 하느님과 동등한 신적 본질을 가지셨지만 인간을 위하여 당신 자신을 완전히 대속제물로 내어 놓으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그 기원의 정당성을 가지는 교회이다.그러므로 교회에 대한 물음은 그의 기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실존적 인물에 대한 소급에서 시작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2000년전 하느님이시면서 인간으로 구체적 우리삶의 실존안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동고동락 하시며 사시다가 세상안에서 인류의 대속적 구원을 위하여 실질적인 역사의 현장에서 십자가에 달려 피흘리시면서 죽으신 분.그리고 부활함으로서 당신자신의 속성을 우리에게 본질적으로 알려주신 분이다.즉 그리스도는 저 낯선 피안의 세계가 아니라 구체적 역사의 현장안에서 세상의 모든 아픔과 고뇌를 함께 나누신 분으로서 그 분의 지삳 생애는 이 세상안에서 핍박받고 소외된 모든 인간에 대한 근원적 해방을 위해 살아가신 우리와 함께 하신 하느님이다.

 

 

자 그러면 지금 우리 한국 교회는 과연 이러한 스승 예수 그리스도에 바탕한 실존적 세상을 위한 피흘림을 통하여 세상안에서 구원의 성사로서 자신의 존재적 삶을 확인해 나가고 있는가?하는 물음은 바로 교회가 과연 복음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질문으로 모아져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존재 가치는 세상을 위한 구원에 두어야 할것이다.

그 세상 구원에 대한 구체적 질문은 바로 우리가 발 디디고 살아나가고 있는 한국이라는 구체적 역사의 삶의 현장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과연 한국 교회는 지금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가? 하는 질문은 교회쇄신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져야 한다.즉 세상을 향하여 구원의 손길을 펴야 할 당위성에 있는 교회는 그 스스로의 삶은 참으로 정당한 가치속에서 스승 예수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복음을 스승의 가르침대로 구현하고 있는가 ?하는 자기 성찰속에서 세상에 대한 구원의 의지를 펼쳐 나아갈때 진정 그리스도가 주고자 하였던 그 복음의 샘물을 세상에 온전히 나누어 줄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한국 교회에 대한 자기물음은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자 그러면 과연 한국 교회는 과연 복음적인가? 한국 교회는 과연 스승예수 그리스도가 살았던 가난의 삶을 살고 있는가? 과연 한국 교회는 창립자가 그토록 사랑하시며 우선적 가치를 두었던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고 있는가?하는 질문에서 과연 교회는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전 인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대속제물로 바치시며 봉사하러 오셨다고 하신(마태20장 28절 참조) 스승의 의지대로 스스로를 봉사자로 인식하고 있는가 하는 근원적인 토대로서 교회의 자기 정체성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가 자신의 존재 규정을 어떻게 하고 있느냐는 자기 진단은 세상을 향하여 복음을 전해야 할 교회의 중차대한 문제임으로 교회의 자가 진단에서 한국교회의 성직자와 평신도들로 구성된 교회가 과연 어떤식으로 자신을 규정하며 복음을 받아 들이고 있느가 하는 내면적 고찰에서 교회쇄신의 단초를 찾으려 한다.

 

2,몸말

1.공의회를 통하여 본 교회의 제도적 이해

트리엔트 공의회부터 제 1차 바티칸 공의회까지의 교회론은 제도주의적 교회론이었다(intitutionalist ecclesology)이러한 제도주의적 교회에서는 교회의 권력과 기능이 일반적으로 가르치고 성화하고 다스리며 지배하는 교회로서 즉 통치자와 피치자로 나뉘는 이분법적 신분질서로 교회를 교계제도와 동일시 한다.즉 가르치는 성직자만이 하느님의 진리의 카리스마를 보유하고 있으며 이의 정점은 주교들이다,즉 주교로 이어지는 성직자 계급 그 자체가 교회인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피라미드식 구조로 이해되며 특히 고위성직자는 모든 권력과 주도권의 원천이 된다.따라서 모든 권력은 교황으로 부터 주교와 사제를 포함한 교회내의 성직자들이 담당하며 이들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평신도는 하위신분으로서 교회의 교도권에 절대 순명해야 하는 위치이었다.

즉 이러한 불평등한 계급적 질서 교계제도로 대변되는 이러한 교회의 조직을 중세적 제도 교회라고 한다.

 

한마디로 이러한 사고에 기인한 제도교회는 불평등한 사회이며,전권이 교계제도의 다스리는 계층에 집중되어 있는 교회이다.그러나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종전의 계급주의적 제도주의의 반복음성을 극복하고 우리모두가 교회이다라며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주교와 사제 수도자 평신도들의 모두가 직무적 역할의 차이는 인정하나 그들 모두는 각각 자신의 처지에 따라 왕직.에언직.사제직의 고유성을 가지고 있는 수평적 관계에 있는 형제적 관점에서 교회를 정의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교회는 우리모두가 동등한 우리 모두의 교회인 것이다.즉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정의는 복음에 비추어 본 스승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히 자기을 비우시고 봉사자로서 자처하시며 당신 자신을 세상의 밥으로 내어 놓으신 복음의 원천적 질서를 회복한 교회의 자기 규정이 되어야 할 중요한 공의회 인것이다.

 

그러므로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로 말미암아 상급자와 하급자.통치하는 자와 다스림 받는 자의 반복음적이고 반그리스도적 계급질서는 극복되고 우리 모두가 보프가 말한 것처럼 모두가 한 형제인 교회가 된것이다.(all brother

church)

 

2.한국 교회의 현실

그러면 한국 교회는 과연 전 교회의 주체들이 모여 결정한 성령의 감도하에 이루어 졌다고 자평하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이러한 복음적 형제성과 일치성 그리고 봉사에 바탕한 사목적 관점에서 공의회를 진정 이해하고 구체적 사목 현장에서 실현하고 있는가?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 교회는 공의회가 교권을 권한과 직책으로 이해한 이전의 해석을 극복하고 봉사의 권위로 해석한 공의회 정신을 철처하게 망각하며 오히려 세계 교회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찬바람 나는 중세식의 통치하는 제국주의적 교회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근거

1.한국 교회의 모든 지배구조는 교구장 주교에 의해 집중되어 있다.교구장 주교는 한 교구의 모든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전제군주적 권위를 행사하고 있다.실례로 각 신학교 건립시 많은 사제들과  신자들이 절대적으로 반대하여도 주교의 의지는 성령의 작용으로 미화되고 모두가 받들어야 한다.어디 신학교 문제 뿐이겠는가?파공축일문제. 금육재등 모든 가치들이 주교의 독단에 의해 명령되어진다.

 

2.한국교회는 철처한 제도주의적 교회이며 계급적 질서안에 있다.즉 한국교회안에서 사목의 주체는 본당신부이다.사목위원들이 있지만 아무리 합리적이고 유능한 의견을 개진하여도 그 전적인 의사결정은 본당신부에 의해 결정된다.

 

3.한국 교회의 성직자는 철처한 봉사를 받는다.

이는 일선 사목 현장에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부분으로 대표적으로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 보기 힘든 주교들과 신부들의 대대적 영명축일 행사가 거의 각본당 마다 아무런 근거없이 본당의 가장 큰 행사로 관행화 되어 모든 액션단체를 포함 개인들이 반 강제적으로 물적.영적 예물을 강요받고 있는 보편화된 현실을 통해서 추론할 수 있다.이때 신부들은 성전의 높은 의자에 앉아 줄줄이 늘어선 신자들의 정성어린 반강제성의 예물을 받고 각종 행사의 최상의 귀빈이 된다.

 

4.주교 착좌식과 사제 서품식에 나타난 가치관.

교회안에서 직무 사제직의 가치와 필요성은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아도 좋을 만큼 중요하다.그러므로 사제 서품식은 중요한 교회행사가 될수 밖에 없다.그러나 이런 기본적 가치를 인정한다 해도 한국 교회의 각 교구가 경쟁적으로 체육관을 임대내는 등 비싼 가치를 지불하고 대대적인 홍보속에 마치 교회의 모든 일이 여기서 부터 시작되는 양 호들갑을 떨고 미사예식 또한 유럽교회의 소박한 전례를 넘어서 마치 영주의 등극식을 알리는 듯한 서품예식과 주교들의 교구장 취임을 중세군주의 등극냄새를 느끼게 하는 착좌식의 표현은 교회의 모든 의식이 봉사에 반하여 통치에 있음을 알수 있다.

 

5.한국 교회의 성직자들은 중산층 이상의 부유한 삶을 살고 있다.

한국 교회의 성직자들은 대체로 안정된 생활기반속에서 사람마다 차이가 나겠지만 대체로 중산층이상의 살을 살고 있다.

보통 주임급이 되면 많은 이가 중형이상의 승용차를 몰고 다니고 사제관은 보당 신부 임의대로 교회의 돈을 들여서 확정 할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새로운 성당이 지어지면 대체로 가장 호화스러운 장소는 사제관인 경우가 많다.이 또한 절대적인 현상은 아니나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실태다.

 

3.극복과 비젼

1) 교회권위의 본질 이해.

위에서 고찰한 바 한국 교회의 모든 가치는 성직자 계급에 집중되어 있고 아직도 한국 교회는 2차 바티칸 공의회안에서 불어온 성령의 놀라운 섭리를 왜곡하고 중세식 패권주의에 기인한 수직적 교계제도안에서 교회가 통치하는 자와 통치받는 자로 나뉘어 반 복음적이고 반그리스도적이며 반 공의회적인 차가운 한파가 교회안에 엄습해 있는 철처한 제도주의적 교계제도만이 강조되는 성직자들 중심의 그들만의 교회적 가치가 주류를 이루고 있음을 고찰하였다.

 

그러면 과연 이러한 현상은 어디서 일어나는 것인가?하는 진단은 한국 교회가 당신자신을 십자가 대속제물이 되신 봉사자로서의 자기 규정을 하신 스승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 하거나 내지는 몰이해 하고 있다는 것에서 그 위험한 작금의 현실을 생각할수 있다.즉 만들어진 이가 만든 이의 정신안에 있지 않고 만든 의도와 다른 정 반대의 방향에서 자기를 규정하고 살아가고 있다면 이는 참으로 타인에게 주인을 욕뵈이는 엄청난 과오를 범하는 것이다.

 

자 그러면 한국 교회가 이토록 철처히 성직자 중심의 교회로서 복음을 기만하고 하느님의 성령의 작용을 가로 막는 근본원인은 어디서 나오는가?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적 권위에 대한 몰이해다.예수 그리스도는 당신 자신의 전생애서 당신의 존재규정을 섬기는 이.봉사하는 이.그리고 이웃을 위하여 당신자신의 몸까지 바친 이.그리고 십자가에 메달려 죽기까지 철처히 하느님께 순명하시며 인간을 위하여(pro home)대속적 실존을 사신 예수의 봉사와 섬김 위타적 실존을 삶으로서 얻은 봉사의 권위에 대한 아전인수식 해석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는 모든 교계제도안에서 일어나느 가치적 접점을 우리 인간을 위하여 당신자신을 대속적 실존으로 내어 놓으신 스승 예수의 피흘리는 십자가안에서 이루어진 겸손과 봉사안에서 그 정신적 가치를 찾아야 할 것이다.제 2 차 바티칸 공의회가 교권을 권한과 직책으로 이해한 이전의 해석에서 차원을 발전적으로 가치적 본질에 근접시킨 봉사에서 찾은 사목의 이해를 배제하고 오로지 통치하듯 하는 권력행위의 행사는 한 마디로 공의회에 대한 배반이며 복음의 탈이해라고 할수 있을것이다.한마디로 교회가 교권과 교계재도의 해석의 오류를 시정하고 본질적 이해를 해야만이 교회가 복음적 반석에서 자기를 비로소 규정하고 있게 되는 것이다.

 

2.쇄신과 제언

1)쇄신의 일반론

한국교회는 교회의 교계제도를 통치가 아닌 형제적 일치안에서 봉사로서 스승의 삶을 구현하는 복음적 가치로서 이해하고 직책을 선용할수 있어야 한다.그러기 위해서 교회는 봉사의 권위에서 교권을 이해하고 행사하고 있는가? 아니면 철처한 자기 보호와 기득권 유지와 통치 이데올로기를 정당화 기키기 위해서 모든 복음적 가치들을 조작하고 있지는 않는지 철처하게 자신에대한 근원적 회의속에 자신을 진단하여야 할것이다.

 

2.제언

지금까지 고찰한 교회의 권위의 이해에 대한 본질을 토대로 교회가 구체적으로 쇄신을 하고자 한다면 우선은 교회안에서 언로를 열어야 한다.즉 이는 교회가 지금까지 무소불위의 독재 권력이 일방적으로 모든 정책을 밀어 부치며 폭압을 행할때 교회의 지도자가 세상을 향하여 말하였던 "국민과 대화를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십시요"라고 말한 그 대화를 이제는 자기스스로에게 말을 해야 할것이다.즉 교회의 지도자들은 세상을 향하여 던진 말과는 달리 그들 스스로는 어떤 독재자 보다 더 포악한 권력으로 대화의 문을 닫아 버리고 실시한 모든 교회 행정의 난맥상과 그들이 내친 양심적 교회의 사람들에게 참회하는 마음으로 용서와 화해를 구해야 할것이다.

 

이런 바탕하에서 교회는 주교와 사제.사제와 평신도,평신도와 평신도,주교와 신자등이 언제던지 교회의 중요사안에 관하여 합법적 토론의 의견.민주적 질서의 토대하에서 교구의 일을 처리할수 있는 상설 대화의 장을 제도적으로 만들어야 한다.이런 점에서 교구 운영에서 평신도들의 의결권을 합법적으로 보장해야 한다.또 본당의 사목 위원회를 의결기관으로 명실상부 본당 신부와 함께 운영하여 나아가는 기구로 격상시켜 그동안 각 교구마다 붉어져 나오고 있는 신부들의 공금휭령에 대한 제도적 보안과 함께 이를 은폐시키고자 한 모든 영성적 죄악에 대한 참회의 출발로 삼아야 한다.그리고 한국 교회는 교회가 운영하고 있는 언론기관의 편집권을 실질적으로 평신도에게 주어 교회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논쟁들과 교회의 추문들까지도 투명하게 공개할수 있는 그동안 교권의 우위를 공표하기 위한 들러리에 불과한 교회언론을 실질적으로 성령의 자유로운 쇄신의 바람에 개방시켜 겸허히 하느님이 우리 교회에 주고자 하시는 예언적 목소리에 귀 귀울일 준비를 해햐 한다.

 

결론적으로 3천년기의 한국 교회가 이러한 교회 안팎의 따가운 시선을 이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구체적으로 실천햐야 한다.

요즘 각 언론에서 한국 사회안에서 유일하게 성역으로 자리잡으며 세속적 기득권과 권력에 경도되어 인간의 구원을 매개로 하여 복음을 팔고 살아가는 많은 종교권력의 허상과 가면을 연일 벗겨 내고 있다.그리고 양식있는 종교인들.즉 그동안 항상 종교안에서 궂은 일은 다하면서도 영광보다는 들러리로 있던 각 종교의 평신도들이 협의체를 만들어 기성 종교인들 즉 세속적 가치에 매몰되어 오히려 인간에 대한 구원의 도구는 커녕 자신들 스스로가 최악의 구원의 대상이 되어 버려 자신들의 종교안에서 창립자의 정신을 정면으로 위배하고 살아가면서 착한 신도들의 영혼을 오염시키는 살아가는 일부 종교인과 그들의 모순의 근원적 연결고리인 제도안의 합법으로 가장한 오류에 대하여 정면으로 의견을 개진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사적 조류를 종교인들은 두 눈으로 보고 창립자의 정신안에서 흐르는 무서운 자신들에게 겨누어진 메시지를 판독하여야 한다.

 

이에 반추하여 한국 가톨릭 교회역시 이러한 사회적 현상을 단순히 한순간의 지나가는 바람으로 규정하여 그 화석화 된 거짓 권위를 합법화 시키는 제도적 틀안에 안주하며 기득권 유지에 연연할 것이 아니라 작금의 바람을 도도히 역사안에서 민중들안에서 섭리하시는 하느님 성령의 복음적 징표로 받아들이고 낡은 관행과 제도 굳어 있는 반복음의 썩은 세속적 권위의 때를 벗고 교회의 복음적 본연의 정신으로 돌아와야만이 이 시대의 무서운 하느님의 경고를 피하게 될것이다.

 

즉 중세 제국주의적 통치하는 교회의 틀을 이 엄청난 물질과 정신의 진보가 폭주 기관차처럼 달려 나아가는 시대에 그 낡은 외투안에서 자신을 가두며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세상의 조소가 되지 말아야 한다.이는 교회의 근거이신 스승 예수 그리스도를 원초적으로 십자가에 다시 못박는 행위이며 그분을 세상에 놀림감으로 던져주는 꼴이다.

 

작금의 첨단의 현대세계는 인간의 종교성을 주변화 시키며 인간의 탈정신을 유도하며 온갓 황금의 물질안에서 인간의 가치척도가 평가되어지는 시대이지만,이러한 시대는 역설적으로 보다 근원적 가치에 목말라 하는 구원에 대한 목마름이 그 어느때보다 절실한 복음 선교의 최적기이다.

 

그러나 기성 종교가 그들을 구원할 역량은 커녕 그들 스스로의 구원도 벅차고 그들 자체가 구원의 걸림돌이 되고 있는 이 상황안에서 과연 우리 가톨릭 교회는 과연 성사교회이며 복음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교회인가?라는 물음에서 자유롭지 못한다면 이제 인위적으로 늘리려는 숫자놀음의 복음선교를 넘어서 삶의 실존으로 복음을 구현하며 봉사와 희생에 바탕한 스승의 삶으로 돌아갈때 선교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는 열매로서 많은 사람들의 진실한 이해속에 큰 복음적 가치를 은총으로 부여 받을 수 있는 것이다.그러므로 지금은 교회를 대형화 시키고 인위적 숫자놀음을 할 시기가 아니라 우리안에서 참 복음성을 찾기 위한 쇄신의 노력이 그 어느때보다 시급할 때 인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가 이시대의 구원을 갈망하는 이들에게 진정한 복음의 지표가 되고 살아 있는 그리스도의 참 교회.성령의 바람에 온전히 자신을  교회안에서 도도히 흐르고 있는 새로운 변화의 바람에 자신을 내어 놓지 못하고 아직도 반복음적 권위의 탈안에서 교계재도만이 교회인양 하면서 평신도들을 사목에서 소외시키고 교회언론을 장악하여 예언적 목소리를 고립시키고 교회안의 수시로 일어나는 추문들을 봉합하기 위하여 하느님과 인간에 쏟아야 할 정열을 낭비한다면 이 한국 교회안에서 내려져야 하는 무서운 경고는 첨단의 전자문화와 과학 문명안에서 신앙의 주변으로 밀려 나가고 있는 많은 교회의 젊은이들의 깨어 있는 의식을 교회안으로 불러 오기는 커녕 그들에 의해 멀지 않아 가톨릭 교회는 커나큰 도전에 직면할 것이다.

 

이제 즉 바야 흐르 한국 교회는 유럽교회가 거쳤던 버림받음과 모멸.세상안에서의 조소와 비아냥속에서 기존의 신자들마저 다 떠나 보내고 늙으신 분들만이 옛날을 그리워하며 버텨나가는 참으로 불쌍한 현상에 직면할 것이다.

또한 세상으로 부터 한국 가놀릭 교회가 그 내면의 본질 보다는 가식과 위선안에서 자신안의 패권적 권위에 안주하는 모습은 외면하면서 세상에 민주와 자유를 외치면서 얻은 아이러니한 이해는 무서운 전자언론과 각성한 현대의 질서들이 주는 엄청난 견제와 사실적 폭로로 인하여 세상에서도 이상한 집단으로 인식되어 고립되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부디 제언하건데 한국 교회는 이제라도 2000년 대희년의 참회와 회개를 통한 참 기쁨속에서 인류를 대희년의 기쁨안에 초대하여 이 나라안에서 스승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모든 이 민족과 함께 나눌수 있도록 철처한 자기 쇄신을 구체적 제도적으로 해야 할것이다.교회의 제도안에 있는 권위를 합밥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이들이 지금 그 때를 놓친다면 우리도 유럽처럼 하느님의 교회에 대한 운명을 세상의 질서안에 맡기게 되는 불행한 사태에 직면하게 될것이다.이런 맥락에서 교회 쇄신의 첫 걸음은 거짓 권위를 극복하는 성직자 중심주의의 극복안에서 교계제도를 봉사로 규정하는 위에서 언급한 실질적 제도 개선이 선행되는 가운데 그 출발이 시작될것임을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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