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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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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진을 보며 떠올린 생각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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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요하 [jiyoha] 쪽지 캡슐

2002-09-18 ㅣ No.38949

                    

                        저 논의 ’피’는 오늘도 존재하지만

 

 

 

 

 지금 농촌의 풍경은 더없이 아름답다. 엄청난 수해로 가옥과 전답은 물론이고 가족까지 잃은 수재민들을 생각하면 죄스러운 말이지만, 태풍 피해가 거의 없었던 우리 고장은 결실과 풍요의 계절인 가을의 정취가 가득 넘쳐난다.

 

 한가위 무렵의 농촌의 갖가지 정취 중에서도 나는 논의 풍경을 가장 아름답게 여긴다. 집안에 앉아서 글을 쓰다가도, 요즘엔 논두렁으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한다. 들판으로 가서 논두렁 가운데 서면 한창 익어가고 있는 벼들의 함성을 들을 수 있다. 그 푸르던 빛이 점점 노란빛으로 변해 가는 광경, 점잖게 익어 가는 벼이삭들과 보조를 맞추듯이 어느덧 온순해진 바람이 은근 슬쩍 장난을 칠 때마다 너그럽게 출렁이는 황금 물결…. 그것은 극명한 아름다움의 실체다. 그리고 무한한 생명력의 표상이다. 구수하고 달콤하기도 한 내음을 맡고 섰노라면, 내가 지금 유구한 세월을 이어온 장엄한 생명의 바다 한가운데에, 또는  하늘 한가운데에 살고 있음을 절감하곤 한다.

 

 논바닥에 서로 조밀하게 의지하고 서서 칠칠한 모습으로 익어가고 있는 벼들은 정말 아름답다. 논 안에 가득, 오로지 벼들만 있을 뿐인데, 그 단조로운 풍경이 너무도 아름다운 사실에서 신비스러운 느낌을 받기도 한다. 어쩌면 황금물결 속에서 함께 출렁이고 있는, 하늘이 배려해 주신 장엄한 의미들을 가슴 벅차게 감득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가끔은 논에서 오로지 벼들만 보는 게 아닌 경우도 있다. 찬찬히 벼들을 살펴보노라면 벼들 사이에 끼여 있는 ’피’라는 이름의 식물을 보게 된다. 피를 발견하게 되면 우선은  이상스럽게 당혹스러워지는 느낌이 들곤 한다. 끼여들 자리가 아닌 곳에 염치없이 끼여들어 있는 피, 저도 벼인 척 위장을 한 듯한 모습으로 끼여 있으면서도, 애써 제 모습을 과시하기라도 하듯 또는 오순도순 평화스럽고 정스럽게 자라는 벼들을 시기하고 훼방 치기라도 하듯 탐욕스럽기조차 한 본새로 한 뼘쯤 더 길게 웃자라 있는 피를 보노라면, 너무 뻔뻔스럽다는 느낌이 드는 한편으로, 그래도 생명이라고 어떻게든지 무람없게라도 살아보겠다고 억지로 기를 쓰는 모습이 조금은 측은하게 보이기도 한다.

 

 요즘은 예전같이 논에 피들이 많지 않지만, 적게라도 피는 여전히 논 안에 존재한다. 농부들이 그렇게 땀을 흘리며 피사리를 했는데도, 용케도 논 안에 남아 있는 피를 보면 그 질긴 생명력에 조금은 경탄도 하게 된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논 안에 끼여들어 그 질긴 생명력을 유지시키고 있는 피의 존재, 그것에도 조물주의 ’뜻’은 있을 것이다. 논 안에 끼여들어 벼들을 시기하고 훼방치는 피의 생존 방식에도 신의 메시지는 담겨 있을 것이다.

 

 아무튼 논 안에서 벼와 대별되는 피는, 어느 모로는 참으로 만만치 않은 식물이다. 그는 자신이 끼여들어 있는 논 안의 벼들뿐만 아니라, 벼를 경작하는 농부도 괴롭힌다. 논의 벼들과 벼를 경작하는 농부를 함께 괴롭히는 피의 존재, 경이로운 생명력, 그것은 그러므로 중층의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피는 거의 벼의 역사와 맞먹는 시간의 길이를 가지고 있다. 어쩌면 벼와 동시에 이 지구상에 생겨났고, 사람들이 벼를 경작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논 안에 무람없이 끼여들어 위장과 몰염치의 위세를 음성적으로 발휘하며 벼와 농부를 괴롭혀 왔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옛날에, 중학생 시절이었던가, 논의 피사리를 하고 오신 이웃집 노인과 나눈 대화가 있다.  바지게(발채) 가득 피를 담아 지고 오신 그 할아버지와의 대화 내용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 뇌리에 명료히 저장되어 있다.

 

 "할아버지, 그게 뭐래유?"

 "피라는 물건이다. 여태 피두 물르남?"

 "낫으루 비어 온 게 아니구, 뿌리째 뽑어 온 것 같은디, 워디서 가져오신 거래유?"

 "뽑어 온 걸 알면서…. 논이서 가져왔지 워디서 가져오너."

 "논이서유? 논에 그런 것두 있대유?"

 "그려. 논이는 벼만 있는 게 아니여."

 "그럼, 그것두 심는 거래유?"

 "미쳤다구 이걸 심냐? 이건 지가 지멋대루 그냥 나는 겨."

 "지멋대루 나유?"

 "땅이서 나서 하늘이 주시는 비를 먹구 자라는 생물이니께 저두 워디든지 나서 살 자유는   있겄지먼, 논이루 들어오너서는 안 되는 겨. 사람이 논에다 심는 물건이 아니니께."

 "그래서 그걸 뽑어 오셨구먼유."

 "논이서 이 피를 뽑는 일보구 피사리라구 허는디, 피사리두 농사일 중이서 아주 중요헌 일이여."

 "그런디 왜 집이루 지구 오셨대유?"

 "꽤 많으니께 말려서 불땔라구. 잘 말려서 불을 때면 밥 한 끼는 헤 먹을 수 있잖겄남."

 "그러구 보니께 차암 많네유."

 "해마다 여름이면 피사리를 허는디, 죽게 피사리를 헤두 가을에 논이 가서 보면 피가 남어 있어. 매년 대년 그렇다니께. 그러구 보면 이 피라는 것두 참 질기구 용헌 물건이여."

 "피사리를 허지 않으면 워떻게 된대유?"

 "피롱허는 거지 뭐."

 "피롱유?"

 "농살 망친다는 말이여."

 "그럼, 그놈들 땜이 벼가 다 죽남유?"

 "그냥 놔두면 이눔들이 하두 잘 번성헤서 금방새루 논에 벼가 남어나지를 않어. 이눔들이 양분을 다 뺐어먹으니께 벼들은 말러죽는 겨. 그렇게 되면 워떻게 되겄냐. 소출을 뭇허잖여. 그럼, 헛농사를 짓는 거지."

 "그러니께 이 피라는 물건은 아무짝이두 쓸 디가 읎는 물건이겄네유잉?"

 "그래두 조금씩 있는 것두 괜찮어."

 "예?"

 "피사리를 헤 준 논은 피가 하나두 읎었던 논보다 더 잘 되거덩."

 "그류?"

 "피사리를 헤 주면 벼들이 신이 나는 모앵여. 피사리를 헤 주구 나면 벼들이 더 칠칠허게 잘 자란다니께."

 "그류이잉? 그것 참 신기허네유잉."

 "작물은 농부 발짝 소리를 들으면서 자란다는 말두 있어. 농부가 피사리를 허러 논일 가면, 한 번이라두 더 가는 거니께, 벼들은 농부 발짝 소리를 더 들을 수 있어서 좋지 않겄남."

 "발짝 소리만 듣는 게 아니라 피사리까지 헤 주는 거니께 벼들 입장이서는 더 좋겄지유."

 "그려. 너 아주 똑독허다. 허허허."

 

 작물은 농부의 발짝 소리를 들으면서 자란다는 말 때문에, 그 뜻깊은 말이 내 뇌리에 깊이 새겨져서 더불어 그 시절의 한바탕 대화가 고스란히 내 기억에 남게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오늘 나는 생각한다. 저 들판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는 논 안의 탐실한 벼포기들. 나는 그 벼포기들 속의 한 포기이기를 원한다. 논 안에 무람없이 끼여들어 오순도순 평화롭고 정겨운 벼포기들을 시샘하고 훼방하고 있는 피가 아님을 다행스럽게, 은혜롭게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나는 피를 동정하기는 할 지언정 사납게 흘겨보지는 않으려고 한다. 나는 피에게 내 자리를 내주지 않으면 된다. 가만히 있어도, 때가 되면 농부님이 와서 그를 없애줄 것이다.

 

 수백 년 수천 년을 그렇게 해왔다. 우리네 벼포기들이 사는 논에는 우리를 시샘하고 훼방하는 피들이 드문드문 끊임없이 이어져왔다. 어쩌면 그 피들 때문에 우리는 농부님들의 보살핌을 더 많이 받아왔고, 더 잘 자랄 수 있었고, 더욱 탐실한 소출을 농부님께 드릴 수 있었다. 저 피들 때문에 우리의 존재가치, 그 귀중함은 더 확실하게 증명될 수 있었고, 더욱 오롯하게 존중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오늘도 믿고 바라고 기다리는 것은 나를 키우고 보살펴주시는 농부님의 발자국 소리 뿐이다. 나는 농부님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오늘도 자라고 있다. 나를 키우고 보살펴 주시는 농부님의 발자국 소리를 변함없이 믿고 기대하는 힘으로 나는 오늘도 힘차게 살고 있다.

 

 내가 결실을 잘 맺어 농부님께 참다운 소출을 안겨 드릴 수 있는 벼포기로 존재하는 한 농부님은 나를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마침내 그 농부님의 집 곳간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내 생명을 영원히 이어갈 곳간 속으로…. *

 

 

 09/18

 충남 태안 샘골에서 반닷불 작가 지요하 막시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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