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4일 (목)
(녹)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신앙상담 신앙상담 게시판은 비공개 게시판으로 닉네임을 사용실 수 있습니다. 댓글의 경우는 실명이 표기됩니다.

q 영의 식별을 위한 전제조건-유시찬 신부(예수회)

인쇄

비공개 [24.10.164.*]

2011-08-05 ㅣ No.9584

프로그램명 : 강좌 “영성의 향기 ”

[제 3강] “영의 식별을 위한 전제조건”

진행자 : 유시찬 신부(예수회) 

 

안녕하세요? 예. 우리 신년을 맞아서 다시 영성의 향기 새롭게 시작합니다. 먼저 기도부터 하고 시작하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좋으신 주님, 저희가 이 시간 함께 하여주시고 성령의 은총을 허락하시어 저희 마음 안에 영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와 힘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저희 마음 속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생각이나 느낌들의 움직임을 간취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그 움직임들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분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당신을 향한 사랑이 더욱더 자라는 가운데 영의 분별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함께 하여 주십시오.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예. 지난 두 주에 걸쳐 하느님에 대한 관을 바로 세우고 우리 인간에 대한 관을 바로 세우는 그 점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그 점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해서 그다음에 지금부터 몇 주간 영의 분별에 대해서 살펴봤으면 합니다.

 

영의 식별 내지는 영의 분별,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영의 식별 문제-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은 다소 좀 이래 신비스러운 감도 있고 어떤 면에서는 어려운 점도 있고 그래서 좀 묘한 느낌들을 불러일으키는 것 아닌가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지금부터 영의 식별에 대해서 좀 봤으면 하는데 이럴 때 우리가 영을 식별한다 이래가지고 조심했으면 하는 것은 먼저 이 부마현상- 귀신들린다 하는 것 그거 식별하고자 하는 거 아니다 하는 거예요. 우리 이래 가끔 무슨 어느 본당에 가든지 이러면은 “야 저 사람 귀신 들렸다.” 하는 이야기 가끔 듣곤 하죠. 그 뭐 귀신 들렸다고 이야길하는 사람들 이렇게 보면은 그냥... 뭐라 그럴까 뭐 레지오 회합 같은 거 이렇게 하고 있을 때 젊은 자매님이 이상한 굵직한 목소리를 내서 막 고함을 질러댄다든지 성모님상 보고 막 침을 뱉어대면서 불경스런 행동을 한다든지 뭐 연세 드신 분 보고 막 삿대질하면서 고함을 질러댄다든지. 이러면은 우리는 대뜸 ‘아, 이거 귀신들렸다.’ 이래가지고는 막 가운데다 모아놓고는 사람들 둘러싸서 안수하면서 구마경 외우느라고 바쁘죠. 근데 그런 어떤 귀신들렸느냐 아니냐 하는 이런 부마현상인가 아닌가 이것을 식별하고자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지금 하고자 하는 것은.

 

근데 이 영의 식별이라고 할 때 그 부마현상 하는 것 이것은 우리 교회가 가르치는 바에 의하면은 그런 부마현상이 없다고는 이야기할 수가 없다. 분명히 있다 하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식으로 우리가 뭐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듯이 많은 경우가 부마현상으로 간주될 것은 아니다 하는 거예요. 이 무슨 소린가 하니까. 우리는 육체적으로도 이래 좀 건강한 사람이 있고 약한 사람이 있고 그렇죠. 저 같은 녀석이 오늘 이런 겨울 날씨에 뭐 반팔 차림으로 막 명동성당을 몇 바퀴 돌고나면은 대번에 감기가 콜록콜록 거릴 거다 하는 거예요. 근데 건강한 여러분들 같으면 뭐 반팔 차림으로 막 다녀도 감기 안 걸릴지도 모르죠. 그런 식으로 육체적으로도 이렇게 좀 건강하고 약한 사람이 있는 것처럼 심리적 내지는 정신적으로도 건강하고 약한 사람이 있는 거예요. 그럴 때 그런 좀 약한 사람이 심리적인 충격을 이렇게 받으면은 일시적으로 심리적인 교란, 정신적인 균형이 깨져버리는 거. 그런 식으로 이렇게 알아들을 일이지 그것을 귀신에 사로잡힌 이 차원에서 알아들을 것 아니다 싶은 거예요. 그래서 이점 우리가 각별히 조심해야 되겠다 싶으죠.

 

물론 우리 이래 뭐 신앙 생활하면서 오늘, 특히 이사를 갔다든지 아니면 어느 피정집에 피정을 하러 갔다든지 이럴 때 뭔가 좀 들어가니까 분위기가 좀, 느낌이 오싹하고 이상하다 해가지고는 성수 꺼내 가지고 뿌리고 그리고 구마경 기도 한 번 바치고 뭐 이러는 것 그게 그냥 신심차원에서 그렇게 이루어지고 또 그럼으로써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얻을 수 있다면은 그거 굳이 뭐 나무랄 것 아니고 괜찮죠. 근데 그것을 그냥 진짜 무슨 악령의 묘한 그런 기운에 사로잡혀있는 것인 양 이렇게 보고 덤벼들 것 아니다 싶은 거예요. 이것하고 우리 관련지어서 보면은 악령에 사로잡혔다 이럴 때 그것이 그냥 뭐 그런 이상한 행동을 하고 막 이상한 짓을 하고 이상한 고함을 질러대고 뭐 이런 기괴한 몸짓으로 나오는 이런 것이라면은 차라리 우리 식별하기도 수월하고 대처하기도 수월할지 모른다 하는 것. 근데 오히려 악령에 사로잡힌 그런 케이스를 보면은 훨씬 더 엄밀한 구석에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지 얼핏 싹 봐서는 잘 모르는 거예요.

 

이 점에 있어서 여러분이 스코트 팩하는 분 혹시 아세요? 그분 이래 미국 정신과 의사죠. 정신과 의사고 심리치료사이기도 하고. 이 분이 여러 가지 그런 심리학 내지는 정신치료 이런 것에 관련된 많은 책들을 좀 대중적인 필체로 발간을 해 가지고 베스트셀러가 된 책들이 많이 있죠. 뭐 <끝나지 않은 길> 이런 거 대표적인 책이죠. 이런 것들이 있는데 그분이 쓰신 책 중에 보면은 원어로 하면은 <People of Lies> 하는 거예요. 이 피플 어브 라이즈 거짓말의 사람들, 거짓말 하는 사람들 이 말이죠. 이거 우리나라에서는 두란노 출판사에서 번역이 되어 나왔어요. 거짓의 사람들 하는 것. 근데 인제 저런 책에 이래 보면은 이 스코트 팩 이분이 자기한테 찾아온 환자들, 환자들 중에 악령에 사로잡힌 케이스들을 여러 건을 다루고 있죠. 거기에 보면은 악령에 사로잡혔다는 사람이 우리랑 똑같이 그냥 멀쩡한 거예요. 그저 한 가정의 가장으로, 그저 한 회사의 중견 간부로 그렇게 자기 맡은 일 잘해나가고 있는 그런 사람들이 뭔가 좀 이상한 것이 걸려들고 그것을 집중적으로 쭉 캐고 들어가 봤을 때 맨 근원 자리에서 악령에 사로잡힌... 그래서 그런 것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고 우리가 지금 여기서 영을 식별한다 하는 것은 지금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하는 것.

 

또 하나 우리가 영을 식별한다 할 때 아닌 것은 이 무슨 귀신의 실체 같은 것. 예를 들면 이제 여러분이 ‘아, 오늘은 마음도 그러니까 저녁 먹고 나서 설거지도 다 하고 나서 성당에 가서 좀 기도하고 왔으면 좋겠다’ 이래 가지고 집도 가깝고 하니까 성당에 가서 기도를 하려고 저 뒤에 좀 앉아있는데 누가 뒤에서 어깨를 톡톡 두드리죠. 그래서 뒤를 싹 돌아보니까 아래 위로 새까만 옷을 입은 사람이 빨간 혓바닥을 날름날름 거리면서... 이런 식으로 무슨 도깨비 같은 귀신같은 이런 존재냐 아니냐 이것 식별하는 것 그것도 아니다 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영의 식별 이러니까 아주 뭐 좀 어렵게 들린달까 신비스럽게 들린달까 그럴지 모르지만은 사실은 우리 일상의 삶에서 매일 부딪치고 있고 매일 일어나고 있는 그 현상을 집중적으로 분석하는 것이다 하는 것. 즉 우리가 여기서 영을 식별한다 할 때 그 식별 자료. 뭘 가지고 식별을 하느냐 이럴 때는 우리 안에 일어나는 마음 판 안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생각들, 느낌들, 감정들, 정서적인 충동들 이런 것들을 가지고 영의 분별을 하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우리가 영의 분별을 한다 이러면은 영의 분별이니까 선신과 악신 이런 영적 존재를 인정하면서 들어가야 할 거다 하는 거예요. 그래서 왜 우리가 지금 이런 영의 분별을 할려고 하느냐 이러면은 이 영의 분별을 제대로 하고 있지 않으면은 우리가 끊임없이 어떤 감정의 움직임에 놀아나게 되는, 감정의 허수아비가 될 위험들이 다분히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저 누가 한 마디 칭찬해주고 조금 기분 좋은 일 있으면은 뭐 어쩔 줄 몰라서 하루종일 아주 들뜬 기분에 있다가 또 누가 한마디 별 대수롭지 않은 한마디 툭 던졌는데 그것 때문에 그냥 기운이 쭉 빠져 가지고 아무것도 못하고 허덕이기도 하고. 그래서 우리 안에 여러 가지 느낌들이 일어나고 있죠.

 

근데 이 느낌들이 그 느낌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디로부터 그런 느낌들이 오고있는가, 이 원천을 알아듣는 것이 중요하다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느낌들 내지는 생각들 올라오는 원천을 따져보니까 선신으로 부터 올라오는 것이 하나 있고 악신으로부터 올라오는 것이 하나 있고 또 그 다음에는 내 자신의 영으로부터 올라오는 움직임이 하나 있고. 이 세 가지 원천들이 우리 마음 판에서 일어나더라 하는 거죠. 그래서 이것들을 이래 분별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들을 이렇게 분별을 함으로써 내가 좀 더 주체적으로 움직일 수가 있는 거. 그저 그때그때 생각이나 감정에 휘말려서 막 천당과 지옥을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입장에 서서, 하느님의 바탕 위에서 올바르게 내가 균형을 잡으면서 걸어갈 수 있는 것 이것이 가능해진다 하는 거예요. 그런 것을 위해서 우리가 영의 식별을 하자 하는 거예요,. 그리고 또 무엇보다 중요한 것 한 가지는 하느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 그 하느님의 뜻을 식별한다 이럴 때도 안에 일어나는 이런 영의 움직임, 내 마음 판에서 일어나는 움직임들을 보면서 하느님의 뜻을 식별을 해야 되니까 그런 점에 있어서 이 영의 식별이 대단히 중요한 게 아닌가 하는 거예요.

 

어쨌거나 우리가 여기서 이렇게 영의 식별을 한다고 그럴 때 그 생각이나 느낌들이 올라오는 원천이 어디에 있는가. 그 원천을 따질 때 선신이니 악신이니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 것. 근데 여기서 우리가 선신이다 악신이다 할 때 이 선신은 성령하고는 좀 다르죠.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시고 선신 악신하는 이건 어디까지나 피조물인 거예요. 그래서 선신은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만의 하나 하느님의 뜻하고는 다른 쪽으로 움직일 가능성도 절대적으로 배제할 수는 없다 하는 거. 어쨌든 그런 점에서, 그런 여지가 남는다는 점에서 피조물 적인 존재로 봐야되는 것이다 하는 거예요.

 

그런 선신과 악신, 이 악신은 그냥 무슨 악령, 마귀, 사탄, 유혹자 어떤 식으로 이름 붙여도 괜찮겠죠. 이럴 때 이런 선신이니 악신이니 하는 이런 이야기들은 그저 중세 때의 그 세계관 내지는 성서적 세계관에 입각해서 저렇게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하는 거. 이 선신과 영의 식별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이냐시오 성인, 저희들 예수회를 창설하신 그 이냐시오 성인이 영신수련이라는 책을 만드셨죠. 이 책이거든요. 근데 이 책 저 뒤에 보면은 ‘선신과 악신을 구별하는 규범’ 이래가지고 장황하게 좀 나와있는 거예요. 그게 바로 영을 분별하는 그 문제죠. 그래서 그 당시 중세적인- 이냐시오 성인 15세기 말 16세기 초엽의 분이니까 그 당시의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설명을 하고 있는 개념이다. 따라서 저것을 현대 심리학적인 용어를 빌려서 얘기를 한다면은 뭐 프로이드 같으면은 ‘이드’라고 표현을 하겠죠. 이드, 에고 ,수퍼에고 이럴 때 그 ‘이드’ 라고 봐도 좋겠고 또 융 같은 분 같으면은 무슨 ‘원형’ 혹은 ‘집단적 무의식’ 이런 표현을 써서 봐도 좋겠다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지난 강의 때 그런 말씀을 드렸는지 지금 제가 졍확한 기억이 없는데 인간 구조에 보면은 맨 위에 의식층 있었죠. 의식층있고 그 밑에 내려오면은 개인적인 비의식층이 있고 더 내려오면은 집단적인 비의식층이 있는 거.

 

이 집단적인 비의식층 내지는 성령께서 머무시는 이 영역에서 일어나는 움직임들, 이 차원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이 의식층에다가 여러 가지 싸인들을 보내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 지금 올라오는 것들을 보면은 선신이라든지 악신이라든지 내 영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있는 거죠. 그래 이 차원을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 올라오는 것을 분별하는데 이것은 그래서 적어도 저런 존재가 있다 하는 것을 우리가 가정을 하고 들어가야 할 것이다 하는 거예요. 그리고 저런 존재는 우리가 무슨 생각한다든지 혹은 의지력으로 콘트롤이 안 되는, 통제가 안 되는 영역이다. 뭐 단적인 예는 그런 걸 볼 수도 있어요. 어떤 남자가 어느 여자를 좋아하게 되면은 갑자기 이렇게 보고 싶은 사랑의 마음이 이래 솟아오르면은 그거 사실은 깊은 영의 차원에서 올라와서 의식 차원에서 사랑이라는 이런 느낌들 이거 맛보고 있는 것이죠. 그럴 때 물론 의식 차원에서 일어나는 사랑도 있을 수가 있지만은 영의 차원에서 이렇게 올라올 때는 이거 내가 콘트롤이 안 되는 거다 사실은. 사랑 안 해야지. 이렇고 저렇고 하니까 사랑해선 안 된다. 그렇게 마음먹고 결심한다 이래가지고 그게 무슨 사랑이 안 된다든지 혹은 미운 사람은 또 그런 쪽으로, 미워해선 안 된다 하고 마음먹는다 해가지고 그것이 간단하게 정리가 되는 건 아니죠. 그래서 이런 것들이 사실은 영의 차원에 뿌리를 두고 있고 그 점들을 우리가 봐가면서 정리를 하지 않으면은 여러 가지 어려움에 부대낄 것 아닌가 하는 거예요.

 

근데 인제 여기서 우리가 선신 악신 이럴 때 좀 조심했으면 하는 것은 지난 강의 때도 여러분에게 아주 강조했다고 생각을 하는데 우리가 영적 여정을 걸어가는데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은 이원대립론적인 사고다 그랬죠. 그래서 보통은 이런 식으로도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선신으로부터 일어나는 움직임은 받아들이고 악신으로부터 일어나는 움직임은 없애는 것, 배척하는 것 그것이 영의 분별의 목적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그것도 조심해서 알아들어야 할 것이 단순히 선신-좋은 것, 악신 -나쁜 것 이렇게 딱 분류를 해놓고 선신만 취하고 악신은 없애버리려고 덤비는 것 이런 움직임 아니라고 보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은 이런 식으로 알아들어도 되는 거예요. 내 바깥에 이런 어떤 선신의 존재가 있고 악신의 존재가 있고 이런 식으로 알아들어도 좋겠지만은 어떤 면에서는, 더욱 더 정확하게는 이미 내 존재 안에 선신의 존재와 악신의 존재가 함께 어우려져서 있는 것 이것이 오히려 우리가 알아들음에 있어서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 것 아닌가 하는 거예요. 그럴 때 역시 이것도 지난 강의 때 얼핏 언급했다시피 음양의 관점에서 알아들었으면 하는 거예요. 악신이 없으면은 선신이 따로 없고 선신이 없으면은 악신이 따로 없는 거예요. 악신과 선신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내 안에서 내 존재와 생명을 유지해 나가는 것. 이 차원에서 알아 들을 것 아닌가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를 들면은 이런 악신이라는 것은, 선신이라는 것은 계속 이래 좀 더 생명을 향해서, 긍정적인 힘을 향해서 이렇게 나아가는 그 움직임이라고 본다면은 악신이라는 것은 생명으로부터 이탈하려고 하는, 밑으로 가라앉으려고 하는 이런 움직임이 있는 것이다. 이런 상반된 두 힘이 내 안에서 공존하고 있고 그 힘이 적절히 균형을 이루고 있을 때 내가 참된 생명, 참된 존재를 형성해 나갈 수 있다 하는 거죠. 그래서 함부로 이거 무슨 악신이다 이래가지고 이것은 무슨 없애버려야 할 존재 이런 식으로 알아들을 것 아니다 싶은 거예요.

 

나는 오직 하느님만 바라보고 그렇게 열심히 성실하게 올바르게 잘 걸어가려고 하는데 바깥에서 악신이라는 놈이 내한테 와서 사탄이라는 녀석이 끊임없이 내 발목을 끄집어당기고 그래서 내가 힘이 달려서 마지못해서 그쪽으로 쓰러져서 유혹에 떨어지고 죄를 짓는 것. 그렇게 꼭 볼 것 아니다 싶은 거예요. 이게 이.. 독버섯 이야긴데 독버섯이라는 거 사실 그렇죠. 그 독버섯은 본래 자기가 다른 버섯보다도 좀 더 이쁘고 아름답게 생긴 거예요. 근데 이제 그건 따먹으면 독이 있으니까 죽는 거죠. 내가 그게 몸에 좋다고 온 산으로 들로 헤매다가 독버섯 찾아내 가지고는 그거 따먹고 내가 죽은 것이지 독버섯이 무슨 날 따먹어라 이런 식으로 나를 유혹했다든지 그렇게 볼 것 아닌 거 아니냐 하는 거죠. 독버섯이라는 것은 본래 자기의 존재가 그런 모습을 띠고 있고 독을 가지고 있고 그저 그렇게 있을 뿐이다 하는 거. 근데 그것을 내가 뭐 몸에 좋니 어쩌니 하면서 돌아다니다가 보고는 혹 해가지고는 따먹고 내가 탈이 난 것. 그러면서 무슨 독버섯은 죽일 놈이라는 둥 이런 식으로 떠들어대면은 듣는 독버섯 섭하지 않으냐 하는 거예요. 악신도 마찬가지 경우다 하는 거예요. 우리가 이것을 의인화시켜 가지고 인격적인 존재로 만들어서 그렇게 계속 설명들을 하고 있는데 그렇게도 설명할 수 있지만은 꼭 인격적인 측면을 떠나서 단순히 우리 안에 있는 한 에너지의 움직임으로, 어떤 두 상반된 힘의 움직임으로 그렇게 볼 수도 있는 것이다 하는 거죠. 이럴 때 우리는 그저 두 개로 쪼개 가지고 이원대립론 적으로 두 개를 쪼개서 하나만 취하고 하나는 버릴려고 그렇게만 덤비는데 그것 아니고 선신과 악신 우리 안에 있는 두 기운의 힘이 적절히 균형을 잡을 때 제대로 된 생명을 얻어 누리는 것 아닌가 하는 것.

 

사랑과 미움 하는 이것도 마찬가지예요. 우리 가톨릭 신자들 같으면은 끊임없이 신부님들이 강론 때 강조하는 것이 사랑하십시오, 사랑하십시오. 그 사랑이라는 것도 그래서 사랑이라는 것하고 미움이라는 것하고 이거 구분해 가지고 미워해서는 안 되는 것 미움이라는 것은 나쁜 것, 내 안에 미움이라는 기운이 올라오면은 이것은 가능하면은 없앨 수만 있다면은 없애버리면은 좋은 것. 그래서 끊임없이 내 안에서는 사랑이 차고 넘치는 것. 여러분은 그렇게 살려고 계속 애를 쓰죠. 그리고 혹 그 미움이 발동해 가지고 어떻게 하면은 뭐 성사를 보니 안 보니 이러고. 성사봐봐야 또 별 뾰족한 수도 없으니까 더욱 더 깊은 자책감에 떨어지고. 이거 심각한 유혹이다 싶은 거예요. 그 관점에서 탈피하는 것. 그럴 때 미움하고 반대되는 상대적인 관점에서 서로 반대되는 그 미움과 사랑. 그러면서 이 사랑만 하려고 덤비는 이것은 이건 바람직하지 않은 거다 싶은 거예요. 그것은 미워하는 거나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싶은 거예요. 오히려 그 미움과 사랑을 양자를 통합하는 가운데서 참된 의미의 사랑으로 나아가는 것. 이것이 중요한 것 아닌가. 여러분들 잘 생각을 해보세요. 미워하는 마음이라는 것이 내 안에 없다면은 오히려 사랑이, 제대로 된 사랑이 될까 하는 것. 그저 무비판적이고 맹목적인 사랑은 가능할지 모르지만은 참된 사랑은 안 될 거다 싶은 거예요.

 

제가 알아듣기로는 예수님도 바리사이파나 율법학자들과 끊임없이 논쟁을 벌이고 다투시죠. 당연히 그 사람들 예수님 마음 한 켠에 미운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하는 것. 근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밉다 이래가지고 미움과 사랑을 쪼개 놓고 미운 것 이것 없애버리려고 이렇게 안 하셨던 것. 미움에도 불구하고 그 미움의 긴장 속에서 비로소 다른 사람들을 향한 사랑도 온전한 사랑으로 커 가는 것. 그러면서 전체를 아우르면서 참된 의미에서의 사랑을 펼쳐 내시는 것. 이것 아닌가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안에는 이 양자의 긴장 관계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싶으죠. 그래서 그 미워하는 마음이 있을 때 비로소 사랑하는 마음도 온전하게 가능해지는 것. 그래서 올바르지 않은 것,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미워하는 마음이 당연히 있어야되는 거예요. 뭐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끊임없이 사랑이다 이래가지고 그렇게 쭉 다 받아들이고 사랑하려고 하는 것 이건 오히려 엉뚱한 길로 가는 것 아닌가 하는 거예요.

 

그래서 부부간에도 난 그렇다고 보는 거죠. 우리 부부는 금실이 좋아서 단 한번도 여태까지 싸움을 해본 적이 없는데요. 그래 얘기하면 난 그 부부의 사랑은 가짜다 싶은 거예요. 그것 아니다고 보는 거예요. 싸움이 있을 때, 그런 갈등 구조가 일어날 때 비로소 사랑이 참된 의미를 향해서 더욱 더 성숙하고 발전돼 나가는 것 아닌가 하는 것. 영적 위안 같은 게 있거든요. 영의 상태를 분별을 할 때 영적 위안이라는 것도 있고 영적 고독이라는 것도 있고 그런 거예요. 근데 이런 영적 위안을 모태로 해 가지고 여기서 하느님의 뜻이 배태되어 나온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데 이럴 때 우리가 영적 위안을 통해서만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것 이렇게만 볼 것이 아니고 물론 그것이 중요하지만은 영적 위안 상태에 있을 때 내 마음에 일어나는 움직임도 보고 고독상태에 있을 때, 고독 상태에 있을 때는 주로 악신이 움직이는 걸로 보니까 이런 고독 상태에 있을 때는 또 내 마음이 어느 쪽으로 움직이고 있는지 이런 양자를 보면서 그렇게 균형을 잡아서 하느님의 뜻을 식별해 나가야 되는 것 아닌가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저 무슨 고독, 악신이 이야기하는 이런 고독은 그저 나쁘기만 한 것이다 그래서 없애면은 좋은 것이다 이런 식으로 볼 것들은 아니다 싶어요.

 

그래서 이런 관점들을 우리 안에 두고 있으면은, 어떤 면에서는 제가 극단적으로 좀 이야기해버리면 그렇다 싶은 거예요. 선신과 악신의 두 상반된 움직임이 우리 안에서 균형을 잡고 있다 하는 것은 밥을 먹는 것과 함께 배설을 하는 것, 먹는 입뿐만이 아니라 배설하는 항문이 함께 균형을 잡으면서 있을 때 온전한 생명 건강을 유지하는 것 그것과 꼭 마찬가지다 싶은 거예요. 그리고 우리 인간 존재가 이런 식으로 우리 안에 선한 기운 악한 기운 우리가 그렇게 상대적으로 분별을 해놨지만은 그런 반대되는 두 기운이 함께 있으면서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것처럼 하느님 당신 자신이 그렇고 모든 우주 만물이 그렇고 모든 사건들이 그렇다 하는 것. 그래서 모든 것이 적어도 인간적인 눈으로 봤을 때 선하니 악하니 좋니 악하니 이렇게 분별을 한다면은 그 양면이 함께 있는 것이지 한 쪽 면만 있는 것 이런 것 일절 없다 하는 거예요.

 

우린 아픈 것, 몸이 아프면은 질병에 걸리는 것, 이런 것은 나쁜 것으로, 아픈 것의 궁극적인 모습이 죽음이니까 그런 것도 그저 단순히 나쁜 것, 피해야할 것 이런 식으로 볼 것 아니다 싶은 거예요. 아프면은 몸이 힘들고 마음도 가라앉고 이런 어려운 점들이 있죠. 한편으론 그런 점이 있는가하면은 한 편으론 몸이 그렇게 가라앉으면서 훨씬 더 부드러워지고 겸손을 되찾게 되는 이런 면도 있는 거죠.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건들도 그렇고 자연 현상들도 역시 그렇다 싶은 거예요. 밤이라는 것도, 밤낮 할 때 이 밤도 그저 어둡고 그러니까 어떤 불안함, 두려움 이런 것들도 함께 밤과 더불어 찾아오지만은 또 한편으로는 밤을 통해서 깊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안온함, 부드러움 이런 것들도 함께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늘 우리 안에 있는 것들을 상반된 두 면을 함께 바라보는 것, 그리고 다 필요한 것이다 하고 받아들이는 것.

 

여러분 가족 안에서도 그렇고 본당이라든지 이런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그렇고 이 사회 안에서도 그렇고. 그래서 이런 상반된 움직임을 어떻게 통합시켜 낼 수 있을 것인가 이 점이 중요한 것이지 한 쪽만 취하고 한쪽 버릴 것 아니다 싶은 거예요. 그래서 이런 것들을 염두에 두고 우리는 영의 식별을 해나가야 되겠다 싶은 거예요. 그럴 때 우리가 이제 영을 식별한다 이럴 때 이 식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제 조건이 두 가지가 갖춰져야 된다 하는 것.

 

영의 식별을 한다면은 그저 덥석 영의 식별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먼저 우리가 살펴봐야될 것이 뭐냐하면은 도대체 이 사람이 성숙하고있는 사람인가 퇴보하고 있는 사람인가 이것을 봐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한테는 그런 경우가 없을지 모르겠지만은 이래 수녀님이나 신부님들한테는 신자분들이 오셔 가지고는 “저, 영적으로 신앙 상담을 좀 했으면 좋겠는데요.” 이러면서 찾아올 수가 있죠. 그럴 때 이제 “아, 자 그럼 이야기를 좀 해보자” 이럴 때 맨 먼저 짚어야 될 것은 이 사람이 도대체 영적으로 성숙하고 있는 사람인가 퇴보하고 있는 사람인가 이 점을 짚어야 되는 거예요.

 

그게 왜 그런가 하니까 성숙하고 있는 사람과 퇴보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영의 이 선신과 악신의 움직이는 방향이 다른 거예요. 이 성숙하고 있다 이러는 것은 점점 더 큰 생명을 향해 나아가는 것. 점점 더 큰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 그래서 선에서 더 나은 선으로 점점점 나아가는 것. 더 큰 생명으로 나아가는 것 혹은 더 큰 사랑으로 나아가는 것 혹은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것 이런 이미지로 우리가 이야기를 할 수가 있죠. 퇴보라는 것은 그것과는 반대되는 측면 하느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것, 생명이나 사랑으로부터 점점점 멀어지는 것. 죄에 죄를 거듭하면서 점점점 나쁜죄로 떨어지고 있는 것. 이런 움직임들. 근데 그럴 때 성숙하고 있는 사람은 선신은 더욱 더 큰 성숙을 향해서 나아가도록 격려하고 힘과 용기를 북돋아준다 하는 것. 그래서 열매를 잘 맺는 나무 같으면은 가지를 더 잘 치면서 더욱 더 가꿔 가지고는 열매를 더욱 더 풍성하게 맺도록. 예수님 우리한테 오신 이유는 그렇다 그러죠. 양들을 생명을 누리게 하되 더 큰 생명, 더 온전한 생명 그것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 당신께서 오셔서 움직이시는 것이다. 같은 측면인 거죠.

 

근데 이제 그런가 하면은 그렇게 성숙하고 있는 사람에게 악신은 어떤 식으로 또 움직이느냐 하면은 근거 없는 불안이라든지 두려움, 기만 이런 것들을 불러 일으키면서 생명에도 나아가지 못하게끔 끄집어 당기는 이런 역할을 하는 거예요. 근데 이제 지금부터 제가 영의 식별에 있어서 계속 말씀드리는 것은 우리한테 익어있는 관점에 좇아서, 즉 선신이라든지 악신이라든지 이런 것을 인격적인 존재로 간주하고 그렇게 계속 이야기를 할 거예요. 근데 인제 그럴 때 여러분이 알아들으시는 것은 그런 인격적인 측면에서 쭉 해석할 수도 있고 에너지의 두 흐름, 두 상반된 힘의 두 흐름 이런 측면에서 그런 것을 염두에 두면서 알아들으셨으면 좋겠다 싶어요.

 

그래서 성숙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쓸 데 없는 불안들, 두려움들 이렇게 야기시켜서 나아가지 못하게끔 하는 것. 그럴 때 이제 여러분들 같으면 우리 그럴 수 있죠. 뭘 이래 피정도 좀 하고 강의도 좀 듣고 이러면서, ‘야 이제부터는 좀 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해야되겠다. 그래서 이제는 주일 미사뿐 아니고 평일미사도 내가 매일 나가야되겠다.’ 그러면서 힘과 용기가 일어나면서 막 나가려고 하는 이런 움직임이 한 켠에서 일어나는가 하면은 또 한편에서는 어떤 은밀한 목소리가 또 들려오는가 하면은 ‘야, 신앙 생활을 해도 꼭 그런 식으로 티를 내야 되겠느냐? 니가 무슨 수도자도 아닌데 뭘 매일 미사드리고... 주일 미사 드리는 것만 해도 얼마나 좋으냐? 그리고 지금은 니가 나이라도 젊으니까 그렇게 새벽에 일어나서 나가기도 하지만은 니가 나중에 나이가 한 50, 60되가지고는 몸이 어려워지고 힘들 때 그때 이제 안 나가기 시작하면은 사람들이 얼마나 니를 손가락질 하고 비난을 하겠느냐?’ 이런 생각들을 막 불러일으키면서 ‘아, 진짜 그래. 내가 너무 과민하게 움직이는 것 아닌가? 그냥 뭐 안 그래도 지금까지 잘 가정을 꾸리면서 살아왔는데...’ 이러면서 주저앉으려고 하는 이런 움직임이 함께 일어나는 거죠. 이런 거 우리 그냥 살아가면서 계속 안에서 상반된 움직임이 일어나는 거 보죠. 이걸 우리는 그저 아, 이런 기분이 든다 이런 생각이 든다 이러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깊은 뿌리 차원에서, 영의 차원에서 이런 움직임들이 막 일어나고 그걸 우리가 의식 층에서 알아들으면서 좀 분석을 하고 식별을 해야 될 것 아닌가 이런 작업인 거죠. 근데 이제 퇴보하고 있는 영혼에게는 이건 이제 또 거꾸로 온 거예요.

 

퇴보하는 영혼은 점점 나락으로 떨어지게끔 악신은 더욱 더 잘한다 잘한다고 부축이는 거. 그래서 계속 어떤 상상 속에서 쾌락을 맛보게끔 만들고 그런 식으로 이래 몰고 가는 거예요. 예컨대 뭐 여러분들 자제분들 다 키우시죠. 요즘 이래 애들 중고등학생쯤 되면은 한참 이래 성적인 호기심 이런 게 참 많을 때죠. 이럴 때 애들 요즘 더군다나 뭐 컴퓨터가 또 하도 극성을 부리면서 인터넷 상에 들어가면은 뭐 소위 음란 싸이트 하는 거. 이제 그런 것들. 애가 이래 점점점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으면은 그럴 때는 악신은 대번에 이제 그런 식으로 부추기는 거죠. ‘괜찮다. 거 뭐 대단한데? 그래 잠시 들어가서 머리 식히고. 그거 좀 보고는 머리 식히고 나서 마음 가다듬고 다시 더 열심히 공부하고 그러면은 얼마나 좋으냐?’ 그러면서 이제 머리 속으로 온갖 상상을 하게끔 만들고 상상 속에 쾌락을 맛보게끔 만들고 이런 식으로 쭉 이끌어 가는 것 악신의 움직임이죠. 거기에 비해서 선신은 계속 소위 양심이라는 것을 사용해서 그 양심에다가 브레이크를 거는 거예요. ‘야, 꼭 그래야 되겠느냐? 그것이 가지고 있는 후유증들이 얼마나 큰 지 아느냐?’ 이런 식으로 다시 한번 더 생각하게끔, 다른 부정적인 요인들도 함께 보고 신중하게 결정하게끔 그렇게 이끌어 가는 거. 이런 식으로 성숙하고 있는 사람인가 퇴보하고 있는 사람인가 그 여하에 따라서 우리 안에 있는 영의 움직임들이 달리 나타나고 있다는 거.

 

근데 이 성숙인가 퇴본가 이것을 따질 때는 제일 중요한 것이 첫 번째가 ‘방향성’을 가지고 따진다 하는 거. ‘방향성’ 하는 거. 이 ‘방향성’이 뭐냐하면은 예를 들면은 루가복음 15장에 나오는 그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 이야기 있죠. 이 잃어버린 아들 이 경우를 보면은, 이 집이 미아리죠. 집이 미아린데 아버지한테 돈 받아 가지고는 다 부산까지 내려와서는 다 털어 먹었었죠. 그러고나서는 ‘아, 내가 아버지와 하느님께 죄를 지었구나!’ 이러고는 회심을 하고는 이제 아버지께 돌아가야 되겠다 해가지고는 돌아가기 시작하는 거예요. 근데 이제 뭐 돈은 한푼도 없고 이러니까 털레털레 걸어서 유리걸식을 하면서 쭉 오죠. 그렇게 이제 오다가 수원쯤 와 가지고는 ‘아, 여기 어느 할아버지 신부님이 있다던데 가서 성사도 보고 앞으로 어떻게 살면 되겠는지 조언도 좀 받아야 되겠다.’ 이래 가지고는 와서 이야기를 쭉 하는데 들어보니까 도대체 세상 천지에 사람의 탈을 쓰고 이런 녀석이 없죠. 그래서 아, 이 녀석은 영적으로 퇴보하고 있는 영혼이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그 다음에 영의 분별에 들어가면은 오류다 하는 거예요.

 

이 ‘방향성’. 아무리 바닥을 모르는 데까지 내려가서 바닥을 쳤다하더라도, 그렇게 깊게 타락을 했다 하더라도 일단 회심을 하고 방향을 틀었으면은 그 방향을 튼 시점에서 분별을 할 때는 성숙하고 있는 사람으로 분별을 한다. 그래 이럴 경우에는 이렇게 보면은 이 사람 원체 바닥을 쳐놓으니까 회심을 했다 하더라도 만약에 뭐 그 사람의 어떤 윤리적인 덕이라든지 이런 수준을 따지면 한 3정도밖에 안 된다, 10이 만점이라고 할 때. 이럴 때 3정도밖에 안 되는 이런 사람이라 하더라도 방향성에서 틀어가 있으면은 성숙하고 있는 사람으로 보는 거. 근데 반대로 한 수녀님은 아주 종신서원까지 다 했고 정말 자타가 공인하는 모범적인 그런 수녀님이죠.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데 이 수녀님이 어느 날, 어느 날이 아니고 한 2,3개월 전부터 좀 기도도 하기 싫어지고 수도생활에 대해서 아무런 의미도 없어지고 그저 텔레비전만 애국가 나올 때까지 다 보고 그것도 모자라면 비디오 찾고 있고 공동체 다른 식구들이 막 보기 싫고 짜증이 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체 갈고 닦은 실력이 있어놓으니까 지금 그렇게 내려가고 있다손 치더라도 수준이 한 7쯤 와있다고 한다 하더라도 이미 한 2,3개월 전부터 이렇게 쭉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이 시점에서 영적 지도 내지는 영적 상담을 받으러 이렇게 오면은 퇴보하고 있는 영혼으로 분별을 한다.

 

그래서 지금 객관적인 수준이 어느 정도 갖춰져 있는가 이런 것을 보는 것이 아니고 영의 움직임, 동적인 움직임의 상태가 방향이 어느 쪽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여기에 좇아서 분별을 해야 된다. 이렇게 방향성을 가지고 분별을 할 뿐만 아니라 또 성숙이나 퇴보를 분별을 할 때는 전체적인 측면에서 바라봐야 될 것이다 하는 거예요. 이 전체에서.

 

이 전체성이라는 게 뭐냐하면은- 예를 들면은 부자청년 이야기, 부자 청년 이야기가 있죠. 그게 어디서 나오나 마태오 복음 19장인가? 그 부자 청년 경우에 이렇게 보면은 자, 부자 청년은 이 사람은 성숙하고 있는 사람인가 퇴보하고 있는 사람인가? 이렇게 물으면은 정말 시간이 없어서 일일이 다 못 묻고 그냥 넘어가죠. 근데 대개는 한 반반씩 나뉘어요. 성숙파가 있고 퇴보파가 있고. 근데 “이제 퇴보하고 있는데요” 하고 퇴보파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그 근거를 무엇을 들이대느냐하면은 예수님 그러시죠. “야, 너가 가진 재산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그러고 나를 따라라.” 이러자 이 사람이 재산이 많아 가지고 그 예수님의 초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고 슬픈 표정을 짓고 떠나간 거. 즉 예수님의 그 초대에 응하지 않았던 것 이런 것을 보면서 퇴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전체적으로 바라본다 하는 거예요. 부자 청년 경우에 그렇죠. 와서는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묻죠. 그럴 때 예수님이 “야 너 이런 저런 계명 알지 않느냐 그것을 지켜라.” 이랬더니 그 부자 청년이 “아 그런 거야 어릴 때부터 전부 다 지켜왔는데요” 이러죠. 그러자 예수님도 그 부자 청년을 대견한 눈빛으로 바라 보셨다. 이러는 거예요. 그 말은 예수님도 인정을 하신다 하는 거죠. 그렇게 여러 가지 계명을 다 지키면서 살아가는데 거기서 한 발자국 더 내딛어 가지고는 영원한 생명까지 얻으려면 어떡하면 좋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움직이고 있으니까 이 사람은 성숙하고 있는 사람으로, 전체적으로 이렇게 봤을 때 성숙하고 있는 사람으로 봐야될 것이다 하는 거예요.

 

그저 문제가 되고 있는 어느 한 측면 거기에만 사로잡혀 가지고 이거 그 측면이 수용이 안 된다, 그 측면을 수용을 못하고 있다 이래가지고는 퇴보하고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볼 것은 아니다 하는 거죠. 이런 식으로 해서 이 사람이 도대체 성숙하고 있는 사람인가 퇴보하고 있는 사람인가 이점을 우리가 충분히 보는데 이 점을 이렇게 다 보고나면 그 다음에 우리가 봐야 될 것은 분별을 하기 위해서는 이 사람이 어느 측면이 문제가 되고 있는가 이 점을 보는 거예요.

 

이 ‘어느 측면’ 하는 것은 영어로 단어를 표시를 하면은 disposition(디스포지션)이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어떤 내적인 마음의 태도 뭐 이런 뜻이죠. 그러면서 우리는 인간들은 이렇게 보면은 예수님을 제외하고는 인간적으로 이렇게 완전히 통합이 된 인간은 한 명도 없다고 보여지는 거예요. 우리가 그토록 존경하고 있는 열두 사도들만 봐도 그렇죠. 우리 교회의 수장이셨던 베드로 사도, 그 교회를 향한 열정, 하느님 나라를 향한 열정이 뭐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아주 크고 좋았지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경솔한 면들이 많이 있죠. 성급하고 경솔하게 판단하고 움직이는 이런 면들이 있고 또 다른 뭐 요한 사도 같으면은 요한 사도는 우리가 사랑의 사도다 이렇게 이야길 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마리아에 들어갔을 때 그 예수님과 자기 제자들 그 일행을 맞아들이지 않자 격노해 가지고는 그러죠. “예수님, 하늘에서 불을 내려다가 저 놈들을 다 태워버릴까요?” 그러자 우리 그 복음서 밑에 우리 공동번역 성서, 거기 보면은 밑에 주에 이래놨죠. <다른 사본에는 이런 구절도 있다> 이래 놓고는 예수님께서 요한 사도에게 “너는 지금 어느 영에게 사로잡혀 있는지 모른다” 이러면서 꾸짖으시는 대목이 있는 거예요. 그럼 어느 영이냐? 당연히 그는 악령에 사로잡혔다 이 말이죠. 이런 식으로 그 사랑에 가득 차 있는 요한의 사도, 사랑의 사도라고 함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올바른 진리 위에 서있지 않고 하는 그런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대단히 매서운 눈길로, 아주 엄격한 눈길로 그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 이런 것 역시 온전한 차원에서 인간적인 통합을, 하느님의 차원에서 통합을 이뤄내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는 여러 가지 측면들이 있을 수 있죠.

 

그렇기 때문에 어느 측면이 더 문제가 되고 있는가, 지금 상담을 하려고 하는 차원이 어느 차원의 문젠가 하는 것을 짚어줄 필요가 있는 거예요. 그럴 때 조금 전에 우리가 봤던 그 부자청년의 이야기, 이 부자 청년 같은 부분. 이 부자 청년은, 만약에 그 부자 청년이 예수님한테 와 가지고는 “제가 요즘 기도를 하는데 자꾸 분심이 많이 들고 기도가 잘 안되는데요.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질문이 되었다면은 즉, 기도 내지는 영적 신앙생활에 대해서 질문이 주어졌다면 그 측면에 있어서는 이 부자 청년은 성숙하고 있는 사람으로 봐야 될 것이다 하는 거예요. 근데 이 부자 청년이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경우는 경제적인 측면이죠. 재산에 대한 측면에 있어서만 아직 하느님의 관점에서 온전한 통합을 이뤄내지 못하고 있는 것. 이 점들 성숙하고 있는가 퇴보하고 있는가 그 다음에 어느 측면이 문제되고 있는가 이 점들을 명확하게 보고 그 다음에 영의 식별에 들어가는 거죠.

 

근데 여기서 이제부터 이야기가 좀 더 어려워질지 몰라요. 어려워질지는 모르지만은 이 문제가 적어도 제가 볼 때는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고 영적 여정을 걸어가는데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문제다 싶은 거예요. 그러고 이제 이런 분별의 문제는 사람들에 따라서 천차만별이다 하는 거. 내 마음 속에 일어나는 이런 움직임들을 보면서 하느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 이거 식별을 해나가는 차원이기 때문에 이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고 움직인다 하는 것은 그저 무슨 큰 계명들만 이야기를 하면서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뭐 도적질하지 말라 이런 계명들만 지키는 것 거기에 하느님의 뜻이 있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것은 말할 것도 없고 지극히 구체적인 우리의 삶의 장면 장면에 하느님의 뜻이 다 있는 것이다 하는 거예요. 그래서 명색이 크리스챤이다고 할 때는 유일한 목표는 한 가지 밖에 없다싶은 거예요. 하느님의 뜻이 지금 내가 처해있는 이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하느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 그거 식별하고 거기에 좇아서 살아내는 것.

 

따라서 여러분들도 그저 그냥 타성에 젖어서 인간적인 관습에 젖어서만 쭉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매 순간 순간 하느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식별하는 거. 당장 여러분들 이런 강의가 끝나고 나면은 그 다음에 식사를 뭘 어떻게 할 것인가, 오늘 저녁 반찬은 찌개를 해먹을 것인가 국을 끓여 먹을 것인가. 이런 점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의 뜻이 다 있는 거. 근데 그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읽어드리기 위해서는 내 마음 판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생각이나 느낌들을 단초로 해서 그 움직임을 보면서 하느님의 뜻을 식별해 나가야된다고 보는 거예요. 근데 이제 이런 것 보통 우리 살아가면서 그저 신앙생활하고 있을 뿐이지 내 안에 지금 영의 움직임이 어떠니 하느님의 뜻이 어떠니 이런 것 식별하려고 잘 안 덤비죠. 근데 이런 것들을 실행해 옮길 때 그리고 이런 것들을 몸에 붙여 나갈 때 비로소 우리의 영적 여정이, 신앙 생활이 올바른 궤도에 들어설 것 아닌가 하는 거예요. 내가 처해있는 지금 이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남편이 있고 자녀들이 있고 시부모가 있고 이런 상황 속에서 내가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하느님의 뜻 어디에 있는가 이런 것 식별하기 위해서 영신수련 피정을 하는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영의 분별을 철저하게 이용하면서 그렇게 나아가야 하는 것. 근데 이제 이런 작업은 단순히 예수회원들만을 위한 작업이 아니다 하는 거죠.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그래서 이런 영신 수련 작업을 이렇게 해나가면은 평신도는 평신도 나름대로 자기의 고유한 모습을 아름답게 꽃피우고 봉쇄수도회의 수녀가 하게되면은 봉쇄수도자로서의 자기의 영성을 온전히 꽃피울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물론 교구 사제가 하면은 교구 사제로서의 삶을 제대로 살아낼 수 있도록 자신의 고유한 모습을 완전히 꽃피울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거. 이 작업을 하는 것이 영신 수련 피정을 하는 거죠.

 

그리고 그 영신 수련 피정에 전반적으로 영의 움직임들이 깔려있는 것이고. 그래서 신학대전을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께서 쓰셨다 이래가지고 그것을 도미니코회의 전유물이다 이런 식으로는 아무도 이야기 안 하죠. 교회의 유산이다 하는 것. 영신수련이라든지 영의 식별이라든지 이런 것도 역시 예수회의 전유물이 아니고 교회의 유산이고 이런 것들을 통해서 우리의 영적 여정을 더욱 더 탄탄하게 밟아 나가야되는 것 아닌가 하는 거예요. 됐어요? 예.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다음 주에 좀 더 본격적으로 영의 분별에 대해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영광송으로 마치겠습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698 0댓글쓰기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