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4일 (목)
(녹)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자유게시판

그림을 감상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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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 [umbrella] 쪽지 캡슐

2003-12-24 ㅣ No.60027

  며칠 전에 목포엘 다녀왔습니다. 유달산의 조각공원도 보고, 남농 허건 선생의 기념관도 보았습니다. 남농 선생은 ‘한국화’를 하시는 분들께는 대단하신 분이시라고 합니다. 기념관에서 남농 선생의 그림을 감상하는데 한 노인이 오셔서 그림 좋으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림이 좋다고 하니까 한국화를 감상하는 방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한국화는 다섯 가지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고 하시더군요.

첫째 원근이 잘 나타났는가? 먼 곳과 가까운 곳이 잘 표현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둘째 구도가 잘 잡혀있는가? 산과 강, 나무와 배, 꽃과 새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지 보아야 한다고 합니다.

셋째 선이 뚜렷하게 보이는가? 강과 산의 경계, 하늘과 산의 경계 땅과 물의 경계가 뚜렷해야 한다고 합니다.

넷째 명암이 잘 드러나는가? 밝은 곳과 어두운 곳이 잘 표현 되어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다섯 번째 여 - 백이 있는가? 여백이 아니라 여 - 백이라고 하시더군요.

 

 이 다섯 가지가 조화를 이루면  잘된 그림이지만 작품은 아니라고 합니다.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아, 묘, 신’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아는 선비 아인데 그림에 품격이 있어야 하고, 묘는 그림에 평범함을 넘어서는 묘함이 있어야 하고, 신은 그림에 신비함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런 3가지가 그림에 있으면 비로소 작품이 될 수 있다고 하더군요.

 

  설명을 듣고 그림을 보니 원근, 구도, 선, 명암, 여백이 잘 드러나 있었고 품위와 묘함 그리고 신비함이 있어 보였습니다.

 

  그 노인의 설명을 듣고서 예수님의 탄생을 잘 이해하는 법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무슨 이야길 들어도 그것을 강론과 연결시키는 버릇이 있기 때문입니다. 좋게 표현하면 프로의식이고 세상 사람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직업의식이라고나 할까요.

 

 예수님의 탄생은

첫째 하느님 약속의 실현입니다. 창세기 3장, 미가서 5장, 이사야서 7장에 예언된 하느님의 약속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사건입니다.

둘째 연약한 처녀 마리아의 응답을 전제로 합니다.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하느님은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으시지만 우리의 응답을 기다려 주신다고 하겠습니다.

셋째 역사의 기준이 됩니다. 기원전, 기원후라는 표현은 주님의 탄생전과 주님이 탄생한 해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넷째 주님의 탄생은 ‘마리아의 노래’에서 볼 수 있듯이 명암이 드러납니다. 권세 있는 자를 자리에서 내치시고 부요한 자를 빈손으로 보내시며 미천한 이를 끌어올리시고, 배고픈 사람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다섯째 예수님은 초라한 말구유에서 태어나셨고 평범한 시골 부부 사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많은 여백을 남긴 체 탄생하셨다고 하겠습니다.

 

 성탄을 맞이하면서 그 여백에 무엇을 채울 것인가를 생각했으면 합니다.   

잠시 우리가 지나온 길을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그 길에는 기쁨도 있었고, 슬픔도 있었습니다. 보람도 있었고, 아쉬움도 있었습니다. 즐거움도 있었고, 후회도 있었습니다. 누군가를 만나기도 했고, 누군가와 헤어지기도 했습니다.

 

 지난 대선 때 불법으로 모금한 자금이 몇 백 억원이 넘는 다고합니다. 돈을 건네는 방법도 다양합니다. 승용차를 이용하고, 트럭을 이용하고, 채권으로 전해 주기도 했습니다. 대통령의 측근들이 비리에 연루되어  줄줄이  구속되기도 했습니다.

 

 노숙자는 작년보다 더 늘어났다고 합니다.  신용불량자도 늘어났고, 오륙도, 사오정, 삼팔선, 이태백이라는 말이 우리 사회의 슬픈 현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과 딸을 한강 다리 아래에 떨어트려 죽게 했습니다. 중학생이 죽은 어머니와 6개월을 살아도 그 사실을 아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의 현실에 아기 예수님의 ‘탄생’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얼마 전 읽은 글의 이야기입니다.

“ 예전에 프랑스에서 성탄절 아침에 있었던 일입니다.

노숙자들이 있는 곳에 누군가 한 아기를 놓고 갔습니다.  아이를 놓고 간 사람도 오죽하면 그랬을까만 하필 집도 절도 없는 노숙자들이 있는 곳에 ‘아기’를 놓고 갔을까! 그런데 노숙자들 중에 1명이 우유를 얻어다가 그 아이에게 먹였고  그것을 우연히 방송기자가 보았습니다.

 

 그 기자는 그것을 찍어 성탄절에 방송으로 내 보냈습니다. 그러자 전국에서 그 노숙자와 어린이를 도와야 한다고 방송국에 전화를 하였고, 우유와 빵, 옷을 보내주겠다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

 

‘노사모’가 생겨난 겁니다. ‘노숙자와 버려진 아이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고나 할까요.  한 노숙자의 나눔이 전국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길에 버려지는 아이들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져서 그 해 성탄절은 뜻있게 지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신앙으로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에는 실재로 버려지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병들어 아파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불법 체류자가 되어 우리 사회의 그늘 속에 숨어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우유 한 병이 필요한 아이가 있고,  따뜻한 관심과 사랑이 필요한 이웃이 있고,  더불어 살아가야하는 죄인들이 있습니다. 비판과 질책보다는 관용과 용서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원적으로 공감(Sympathie)란 말은 ‘함께 고통을 겪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soun pathein)에서 유래 한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동정(Compassion)이란 말 또한 ‘함께 고통을 겪다.’라는 뜻의 라틴어 (cum patior)에서 나온 것이라 합니다.

 

 우리에게  성탄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사람이 되셨듯이  우리보다 힘들고 어려운 이웃들과 함께 하면서 주님의 성탄을 맞이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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