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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용 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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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요하 [jiyoha] 쪽지 캡슐

2011-06-13 ㅣ No.176387

박재용 님께





한 특정인을 대상으로 글을 쓰기는 참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해 이런 글로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박재용님의 나에 대한 공격이 점입가경인 데다가 모욕적이고 방자한 언사들 속에 많은 무지와 몰이해가 똬리를 틀고 있기에 그것에 따르는 내 생각을 밝히고자 합니다.

언어의 도착 현상

제목이 <담담..>으로 되어 있는 박재용님의 176328번 글을 읽었습니다. 별로 기대를 하지 않으면서도 ‘담담..’이라는 제목에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는 심정이었습니다. 정말 박재용님이 담담한 마음으로 담담하게 술회를 한 담담한 글이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내용은 몹시 거친 언사로 나를 공격하는 글이었습니다. 글 속에 증오와 적의가 가득한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글을 쓰면서 어떻게 ‘담담’이라는 말을 제목으로 올릴 수 있는지요? ‘담담’이라는 제목과 글 내용과의 괴리, 배치, 모순 등을 느끼지 못하는지요?        

그렇게 증오와 적의가 똬리를 틀고 있는 공격적인 글을 쓰면서, 그런 글에 ‘담담’이라는 말을 제목으로 올리는 것은 일종의 기만행위가 아닐까요? 또 그것은 자신도 속이는 자기기만이 아닐까요?

박재용씨의 가장 큰 문제는 그런 것에 대한 고려와 분별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언어에 대한 포괄적인 인식을 갖고 있지 못하기에, 언어의 도착현상에 빠져 있으면서도 그것을 전혀 모르거나 아예 개의치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으로 연결됩니다.      

내 글에 대한 시비에 관하여

2001년 ‘가톨릭 굿 뉴스’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후 10년이 지나는 동안 ‘굿 뉴스’ 자유게시판에 1천 개가 넘는 글을 올렸습니다. 실로 많은 글을 올렸지만 도배를 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내 글 때문에 게시판 페이지가 쉽게 넘어가지 않도록 신경을 쓰며 며칠 간격으로 한 편씩 글을 올리곤 했습니다.

내가 ‘굿 뉴스’ 게시판에 올린 글들 중에는 다른 매체에는 올리지 않고 오로지 ‘굿 뉴스’에만 올린 글도 많습니다. 또 ‘오마이뉴스’에 처음 올린 게 아닌 글들도 많습니다. 나는 분량이 많은 소설을 제외하고, 종이 매체에 발표한 글들도 거의 모두 ‘오마이뉴스’에 올립니다. 교회주보나 교회잡지들에 발표한 글들도 일단은 ‘오마이뉴스’에 올립니다. ‘오마이뉴스’에 글을 올리면 적게는 수천 명에서 많게는 수십 만 명이 읽습니다. 고료가 있는 지면이고 또 많은 독자들이 있는 곳이기에 ‘선교차원’을 의중에 담고 교회주보나 교회잡지들에 발표한 글들도 ‘오마이뉴스’에 올리는 것입니다.

‘오마이뉴스’에서 적게는 수천 명, 많게는 수십 만 명이 내 글을 읽는다고 해서 ‘굿 뉴스’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종이 지면에서도 또 ‘오마이뉴스’에서도 내 글을 접하지 못한 분들을 생각해서 ‘굿 뉴스’에도 글을 올리는 것입니다(그렇게 여러 매체에 글을 올리는 이유는 이 글과 함께 댓글 형식으로 올리게 될 <글은 삶이고, 삶은 곧 글이기에>라는 글에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박재용님이 ‘오마이뉴스’를 언급하셨기에 좀 더 설명을 드립니다. ‘오마이뉴스’에는 정치면도 있고, 사회면도 있고, ‘사는 이야기’ 면도 있습니다. 나는 주로 ‘사는 이야기’ 면에 글을 올리지만, 가끔은 정치면과 사회면에도 글을 올립니다.

그리고 정치면과 사회면에 올리는 글은 거의 ‘굿 뉴스’ 게시판에 가져오지 않습니다. 최근에도 ‘오마이뉴스’ 사회면에 <검찰이 자존심을 가질 수 있는 길은…>이라는 글을 올렸는데, 그 글은 ‘굿 뉴스’ 게시판에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주로 ‘오마이뉴스’의 ‘사는 이야기’ 면에 올린 글들을 ‘굿 뉴스’ 게시판에도 올립니다. 내 ‘사는 이야기’들이기 때문입니다. 내 사는 이야기들 속에는 신앙 이야기도 많이 들어 있고, 아예 신앙 이야기가 주조를 이루는 글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선교 차원’도 의중에 두고 내 신앙 이야기도 곁들여 내 사는 모습을 진솔하게 고백한 글이라면 당연히 ‘굿 뉴스’ 게시판에도 올려야 하지 않겠는지요?

물론 내 ‘사는 이야기’들 속에도 정치적인 부분이 개재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네 생활 속에 정치가 있고, 정치 안에서 우리 생활이 이루어지지는 것이기에, 그런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정치적인 의사를 표현하게도 되는 것입니다.

나는 내 사는 이야기, 또는 신앙 이야기가 주조를 이루는 가운데에 부분적으로 정치적인 이야기가 곁들여지는 경우라면 괜찮으리라는 생각으로, 또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굿 뉴스’ 게시판에 올린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관리자로부터 경고를 받기도 했고, 경고 누적으로 한 달 간 ‘굿 뉴스’ 출입이 정지된 적도 한 번 있습니다. 그리고 내 글이 경고가 아닌 주의를 받거나, 경고 또는 주의 없이 내 양해에 의해 삭제된 경우도 몇 번 있습니다. 그 사실을 숨기고 싶지는 않습니다.

나는 한 번도 관리자에게 항의를 하지 않았고, 관리자의 고충을 헤아려 그런 조처를 말없이 감수하곤 했습니다. 관리자의 그런 조처에 미안함을 가질지언정 부끄러움은 없었습니다. 나는 ‘자유’라는 게시판 명칭에 의미 부여를 하고 싶지만, 관리자가 설정해놓은 규정도 있고, 또 관리자가 겪는 ‘고충’도 헤아리기에 승복을 하면서도, 내가 거짓말을 했거나 사리에 맞지 않은 글을 쓴 것도 아니고, 남을 저주하거나 증오하는 글을 쓴 것도 아니기에 부끄러워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독선과 과잉

내가 ‘굿 뉴스’ 자유게시판에 지난 10년 동안 1천 편이 넘는 글을 올렸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 글들 중에는 교회주보나 교회잡지에 발표한 글들도 많고, 내 사는 이야기(신앙 이야기)가 태반이라는 말도 했습니다.

그런 글들을 ‘오마이뉴스’에도 올린 글들이라고 해서 무조건 ‘굿 뉴스’에는 가져오지 말라고 하는 것은 다분히 언어도단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올린 글들이라고 해서 ‘신앙인의 글’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방자한 독단입니다. ‘굿 뉴스’에서 내 글을 읽고 공감하고 감동도 받는 이들에 대한 무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사려 깊은 말을 해야 하는 법입니다.

“작가라는 양반이 그런 글을 종교 게시판에 올리기 부끄럽지도 않으신지요...”라고 했나요? 무엇이 부끄러울까요? 규정을 어긴 적이 있으니 부끄러워하라는 뜻인가요? 전적으로 정치적인 얘기를 한 건 아니고, 내 삶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부분적으로 정치나 4대강 관련 얘기를 넣은 것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겠지 한 내 생각(또는 기대)에 대해서 부끄러워하라는 뜻인가요?

‘그런 글’은 무엇을 말하는 건지요? ‘그런 글’ 중에 내가 부끄러워해야 할 부분을 적시해줄 수 있는지요? 그렇게 해주신다면 그것에 관해 토론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나는 내 생각이나 기대가 관리자의 관리방침과 핀트가 맞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이해를 하고 또 인정을 하지만, 내가 결코 양심과 신앙을 저버린 글을 쓴 것은 아니므로 하등 부끄러워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중성’의 실체에 관하여    
        
나는 자유게시판에 ‘꼬리글’ 기능이 정지된 동안에는 ‘댓글’을 거의 쓰지 않았습니다. 게시판 페이지가 쉽게 넘어가는 현상에 내 댓글이 일조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다가 ‘꼬리글’ 기능이 회복된 이후로 간간이 ‘꼬리글’을 달기도 했는데, 그것이 오늘의 ‘화’를 부른 셈이 되었습니다.

박재용씨와 김복희씨가 나에 대해 찧고 까부르고 한 얘기들 속에 내 ‘이중성’을 지적한 언사들이 있었습니다. 내 글이 삭제된 적들도 있고, 한 번 출입이 정지된 적도 있기에 그 사실을 가지고 그런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글의 내용 중에 게시판 규정을 거스르는 부분이 있었다고 해서 그것이 ‘이중성’일까요? 그것에 이중성이라는 말을 갖다 붙이는 게 과연 적합할까요?

‘이중성’이라는 것은 내면의 불일치, 자기 언어의 배치현상을 일컫는 것입니다. 한 입을 가지고 하느님 신앙을 얘기하면서 한쪽으로는 저주와 증오를 내뱉는 행위가 바로 이중성인 것입니다.

박재용씨의 가장 큰 문제는 한쪽으로는 고매한 말을 하면서 다른 한쪽으로는 증오와 적의를 내뿜는 그 이중성입니다. 또 적의와 증오를 내뿜으면서 거기에 하느님을 끌어들이는 행위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온당하고 바른 얘기를 하면서도 함부로 하느님을 입에 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성향을 표현하면서 하느님을 입에 담는 것 자체가 죄송스럽기 때문입니다. 박재용씨는 그런 태도를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박재용씨가 게시판에 올린 <에언자>라는 글은 고매한 언어들로 이루어진 좋은 글이었습니다. 그 글로만 끝났으면 내가 ‘꼬리글’을 달지 않았을 것입니다. 박재용씨가 그 고상하고 멋진 글 밑에 달아놓은 ‘꼬리글은’ 그야말로 박재용씨의 이중성을 그대로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박재용(tinsoldier) (2011/06/11) : 내 이런 글도 읽고... 치를 떨 이들..... 그들의 마음 안에는 뭐가 있을까요...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발악을 하게 만들까요..”

하느님까지 동원한 고상하고 멋진 글 밑에 달려 있는 박재용씨의 이 ‘꼬리글’, 그야말로 이중성의 압권이 아닐까요?

‘치를 떨 이들’이라는 표현이며 ‘발악’이라는 말은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는 격입니다. 무엇이 왜 박재용씨로 하여금 그런 말을 하게 만들었을까요? 박재용씨의 마음 안에 무엇이 들어 있을까요? 방금 고상하고 멋진 표현으로 ‘하느님’까지 입에 올린 사람이 어떻게 그리 살벌한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예언자>라는 본문과 그 밑에 달린 박재용씨의 ‘꼬리글’을 대조해보면, ‘나는 이런 고결한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다’라는 자기만족과 자아도취 같은 것도 느껴집니다. 심히 치졸하다는 것이지요. 자기최면의 또 한 가지 유형일 듯싶습니다.  
  
★★
마지막으로 박재용씨께 부탁 한 가지 드립니다. 독단적으로 내 글들에 대해 신앙인의 글이 아니라고 매도하기에 앞서 내 글들을 읽지 마시기 바랍니다. 신앙인의 글이 아닌 글을 읽느라고 수고하실 필요도 없고 상심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읽지 않으시면 됩니다. 내 글은 읽지 않는다고 하면서 글 내용을 훤히 알고 있는 귀신같은 김복희씨도 있긴 합니다만, 내 글을 읽지 않으면 문제될 게 없습니다.

자신의 생각만으로 신앙인의 글이 아니라고 매도하면서 ‘오마이뉴스’에 올린 글을 ‘굿 뉴스’로 가져오지 말라는 말을 명령하듯 하시지 않기 바랍니다. 지난 10년 동안 해온 일입니다. 나는 ‘굿 뉴스’에 올린 글을 ‘오마이뉴스’에도 올리고, ‘오마이뉴스’에 올린 글을 ‘굿 뉴스’로 가져오기도 하고, 또 종이 지면에 발표한 글들을 인터넷에도 올리고, 인터넷에 올린 글들을 종이 지면에도 발표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이 시대를 사는 작가로서 내 삶의 증표인 글들을 가지고 좀 더 많은 독자들과 만나기 위한 것이며, 소통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만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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