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4일 (목)
(녹)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자유게시판

인생은 아름다워라! ♥♥뽀빠이 이상용 헨리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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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15-07-05 ㅣ No.209188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주님의 사랑 안에서 행복하세요.


금요 월례 특강

    - 주제 : 인생은 아름다워라!

    - 강사 : 뽀빠이 이상용 헨리코

    - , :  73() 오후 8, 창5동 대성당


↓↓▼▼ 아래 제목을 클릭하세요.(음성을 들을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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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월 금요월례특강(뽀빠이 이상용 헨리코) [녹음]   2015-07-04





  뽀빠이 이상룡의 삶


    성공이란 


  • “혼자 정리한 음담패설 3만개 이게 내 ‘밥퍼토리’죠”
  • 최보식기자 직격인터뷰… '뽀빠이' 이상용
  • “노인잔치 사회 도맡아 마이크만 잡으면 혼자 3시간을 웃겨요
                                      할아버지·할머니들에겐 내가 배용준이라니까”
  • 최보식 기자 congchi@chosun.com
    입력 : 2007.04.20 23:00 / 수정 : 2007.04.21 09:41

    • 요즘 알람(자명종) 시계가 불티나게 많이 팔린다고 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일요일 새벽(6시10분)이면 내가 나오는 TV프로 ‘늘 푸른 인생’을 보려고 말이죠. 이 뽀빠이가 떴다 하면 ‘배용준’인양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까무러쳐요.”

      솔직히 ‘뽀빠이’ 이상용(63)을 만날 일은 없었다. 신문을 넘기다 건강식품 광고에서 팔뚝 알통을 과시하는 사진과 마주치지 않았다면. 뭘 하고 지냈던 걸까. 전화를 걸자, 이상용은 이 기회에 ‘잊혀진’ 자신의 모든 것을 홍보하려고 했고, 혹 내가 빨리 전화를 끊을까봐 조바심을 냈다.

      그래서 묻지도 않은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술·커피를 한 방울도 입술에 묻히지 않은 사람은 대한민국에서 이 뽀빠이밖에 없다”는 자랑까지 했다.

      경남 진주방송에서 녹화를 마치고 열차 타고 올라왔다는 그는 작고 새카맸다. 알통만 굵은 것이다. 커피숍에서 기다리면서 사인펜으로 달력에 스케줄을 표시하고 있었다.

      “오늘만 6군데서 섭외가 왔어요. 지방으로 바쁘게 쫓아다니니 얼굴이 다 탔지.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내가 골프 치고 탄 줄 알아. 어떤 날은 지방 행사로 4군데쯤 뛰어. 아무리 힘들어도 사우나 한번 하면 스프링처럼 발딱 일어서요.

      이 나이에도 오라는 곳이 많아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습니다. 내 친구들은 한두 명 빼놓고 지금 다 놀고 있어요. 한번은 고등학교 동창회를 갔더니 마치 ‘아버님 동창회’ 같았어. 모두들 보청기나 틀니 이야기를 해서, 나는 중간에 나와버렸지.”


    • ▲사진=정경열 기자 krchung@chosun.com

    • 그는 우유를 주문했다. “해해해…” 습관성 웃음을 흘리며 설탕까지 태웠다. “커피나 인스턴트는 입에 안 대요. 대신 식혜나 젤리, 설탕을 좋아하죠. 운동을 많이 하니 단 것을 먹어도 당(糖)이 없고 혈압도 정상”이라고 덧붙였다.

      “내 나이가 되면 그저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지요. 그래서 출연료 액수는 꺼낸 적이 없어요. 주최측에서 혹시 ‘얼마 드릴까요?’물으면, ‘책정된 대로 달라’고만 합니다. 명색이 ‘뽀빠이’인데, “돈 적게 주니 나 거기 못 가겠소”라고는 할 수 없지요. 초대가수나 악단의 지원 없이도 내가 마이크 잡으면 혼자서 3시간을 웃길 수 있지, 출연료 부담 없지, 그러니 나를 한번 써본 사람들은 나만 쓰려고 해요. 지방이나 시골로 갈수록 나를 더 알아줍니다.”

      10년 이전으로만 돌아간다면, 어찌 지방뿐일까. 한때 모든 어린이들의 ‘아저씨’, 모든 병사들의 ‘맏형’이었다. 그리고 “뽀빠이, 살려줘요”라는 구조요청에 응하는 만화영화의 주인공처럼, 가정 형편이 어려운 심장병 어린이들을 수술시켰다.

      그러나 1996년 말 그가 심장병 어린이를 도울 후원금을 횡령했다는 보도가 터져 나오면서, 대한민국이 그를 향해 열광했던 시간은 끝났다. 그 뒤로 그가 먹고 살려고 얼마나 바쁘게 뛰어다녔는지 모르나, 그의 존재는 우리에게 사라졌던 것이다.

      “그 사건으로 혈압이 200까지 올라갔고 수면제를 두 대씩 맞아도 잠을 못 잤어요. 물만 마셔도 토했습니다. 후배들이 교대로 병실 보초를 섰어요. 내 불 같은 성격에 혹시 머리를 찧고 죽을까봐 병실 벽에 스티로폼을 붙였을 정도였으니. 처음 그렇게 한 달을 보냈어요.”

      3개월 뒤 무혐의 결론이 났다. 당시 신문을 찾아보니, 그 무혐의는 1단 크기의 기사로 실려있었다.

      “나를 죽일 때는 죽이더라도 내가 한 일은 크게 내줬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심장병을 고쳐준 거, 무료도시락을 싸준 거, 이런 좋은 일을 하다가 이렇게 됐다고 해야지. 내가 심장병을 하나도 안 고쳐줬다고 났어요. 567명을 수술시켰는데…. 벤츠 문고리도 잡아본 적이 없는 내가 벤츠를 타고 다녔다고 쓰고, 내게 전화 한 통화만 해도 확인이 됐을 텐데 어이가 없었어요.

      또 나를 죽일 때 크게 보도했으면, 무죄로 판명됐으면 적어도 두 배 크기로 기사를 내도 모자랄 판인데…. 저를 예뻐하시는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너무 화가 나서 병원에 찾아오셔서는 ‘눈이 왔다, 쓸지 말고 떠나라, 봄이 와서 눈이 녹으면, 그 모습은 다시 나타난다’라는 말씀을 주셨어요.”

      ―왜 언론을 상대로 소송을 하지 않았나요?

      “주위에서 ‘그렇게 당하고 왜 바보같이 사나’라고들 그랬지요. 하지만 이미 다 잃었고, 되돌려지는 것도 아닌데, 법적으로 한들 돈 몇 푼 보상 받을 뿐인데, 그런들 뭐하겠어요. 여전히 서운한 것은 기자들이 내게 확인하기 위해 전화라도 했어야지. 연합통신에서 받았다고 기사를 다 똑같이 쓰면…, 내가 얼마나 속상했겠어.”

      그는 “다 잊고 이제 열심히 살고 있는데, 왜 과거 기억을 떠올리게 해”라고 침울하게 말했다. 그러다가 금방 씩~ 웃음을 지었다. 기자에게만은 잘 보여야겠다는 의식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세상은 내 뜻대로만 안 되는 거지. 그때 이후로 난 그걸 알았어요. 큰일을 당하고 나면 인생 도사(道士)가 돼. 죽었다 되살아난 기분이어서 누룽지를 먹어도 기쁘고 그저 작은 것들에도 크게 감사하며 살아요.”

      그 험한 시기에 그는 연대보증 사기까지 당했고 집을 날렸다. 친구 집 지하실에 가재도구를 맡겨놓고 9평짜리 사글세를 구해 살았다고 한다. “아내는 성당에 나가 기도할 줄만 알지 그때 이런 내용을 전혀 몰랐다”고 했다. 그는 미국으로 혼자 건너갔다.

      “혐의가 풀렸지만 국내에서는 일을 할 수가 없었어요. 먹고 살려면 돈은 벌어야 하는데. 단돈 40만원을 챙겨 미국으로 떠났어요. LA에서 라스베이가스까지 관광버스를 타면서 가이드일을 했지요. 볼품이야 없었지만 뭐 그때도 괜찮았어요. 팁을 많이 받았고 공짜로 여행도 다녔으니. 일년쯤 지나 아내가 ‘그만 고생하고 제발 귀국하라’고 했어요.”

      국내에 들어와서 그는 ‘음담패설’ 테이프를 만들어 팔았다. 경찰 단속을 피해가며, 고속도로 휴게실 화장실 앞에서 직접 팔았다고 한다. 그는 허리를 숙여 단속을 피하는 제스처를 취해 보였다. 그러면서 “운전하다가 이 테이프를 들으면 너무 재미있어 차가 거꾸로 갈 정도”라고 낄낄거렸다.

      “3년간 그런 테이프를 팔았지. 지금 15집까지 나왔어. 그 덕에 내가 먹고 살았어요. 나는 음담패설에 관한 레퍼토리만 3만개나 돼요. TV 화면에서만 보면 내가 건전하지만, 실제 행사 현장에서는 음담패설로 관객들을 사로잡지. 슬슬 풀면 두 시간 동안 단 한 명도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아요. 한번 행사할 때마다 200개쯤 준비합니다.”

      그는 상의 속주머니에서 “이건 비밀인데…”라며 비닐수첩 안에 접어 끼워놓은 대학노트 한 장을 꺼냈다. 3가지 색(色) 볼펜으로 글씨가 빡빡하게 적혀있었다.

      "키 크고 잘생긴 사회자를 이기는 방법은 공부밖에 없어. 시간이 가면 갈수록 시청자들은 키 작고 볼품없이 생긴 내게 와요. 내가 말을 잘하니까. 입담이 좋으려면 머리에 든 것이 있어야 해요. 나는 한 달에 책을 50권쯤 삽니다. 실수담 경험담 에피소드 같은 류의 책이지요. 소설은 지루해 못 봐. 읽은 책들은 다 태워버려요. 뭐, 좁은 집 안에 쌓아놓을 데도 없으니까.

      책을 읽으면서 중요한 대목을 볼펜 3가지로 메모해요. 빨간색은 야한 내용, 파란색은 새로운 내용, 검은색은 웃기는 내용. 일주일이면 이런 노트 한 장이 나옵니다. 바로 이게 내 ‘밥퍼토리’(밥을 위한 레퍼토리)요. 나이 칠십이 넘으면 이걸로 내 책을 쓰고 싶어요. 하지만 지금은 안돼요. 이걸 쓰면 다른 경쟁자들이 읽고서 베껴먹을까봐 쓸 수 없어요. 송해 선생님은 일주일에 한번 ‘전국노래자랑’ 하지만, 나는 이 ‘밥퍼토리’로 전국 노인잔치를 다 사회보고, 주부대학· 시청·도청·군청의 공무원 강의를 독차지하지요."

      ―이렇게 바쁘면 수입이 엄청나겠군요?

      또다시 그는 기염(氣焰)을 토했다. 과거 전성기로 되돌아온 것 같았다.

      “연예인 수입원은 CF와 밤업소인데, 지금껏 밤무대 문지방을 한번도 안 넘어간 연예인은 나밖에 없어요. ‘어린이의 영웅’, ‘병사의 영웅’인데 어떻게 그걸 할 수 있어요? CF도 ‘라면땅’과자밖에 안 찍었어요. 난 평생 방송 출연료로만 살았어요. 그러니 집 한 채 제대로 장만 못했지요.”


    • ―얼마 전 제가 본 건강식품 광고는 뭔가요?

      “에이 그건, 이제는 먹고 살고 돈 벌어야 해. 그거 200만원 받았어요. 아까 얘기했지만 6년 전까지 9평 아파트에 사글세로 살다가, ‘그 꼴이 뭐냐’며 친구가 40평 빌라를 내줬어요. 그 집값을 지금 갚아나가고 있는 중이오. 아들이 결혼하는데 체면을 지키려면 내 집이라도 있어야지.”

      그는 신이 난 듯 알통이 나온 벗은 몸매의 사진도 보여줬다. “밥은 건너뛰어도 하루에 달리기 7km, 역기 500회를 꼭 한다”며 자랑했다. 그런 뒤 ‘무대행사 멘트’를 읊듯이 이렇게 풀었다.

      “나는 5살까지 누워있었고, 6살 때 걸음마를 겨우 시작했어요. 너무 병약해서 가족들이 ‘죽도록 내버려두자’고 결정했을 정도로, 어렵게 탄생한 장남이었지요. 초등학교 때는 아버지가 가방을 학교까지 들어다 주셨고, 12살에 아령을 들면서 운동을 시작했어요. 그런 내가 가장 건강한 ‘뽀빠이’가 됐어요. 고등학교 체육선생님이 ‘술과 커피는 건강에 안 좋다’고 해서, 그 말씀을 듣고 지금까지 한번도 입에 댄 적이 없어요. 햄버거, 콜라 등도 안 먹어요. 미국에 머물렀을 때도 끼니는 한국식당에서 해결했어요.”

      ―연예인 생활하면서 커피와 술을 안 마시기가 어려웠을 텐데요?

      “방송 촬영이나 행사가 끝나면 나는 혼자서 바로 나옵니다. 출발한 뒤에 ‘급한 일이 있어 먼저 간다’고 알려줘요. 뒤풀이 회식에 어울린 적이 별로 없어요. 술자리에 앉아있기가 싫어서. 그리고 혼자서 편하게 식사를 해결하지요.”

      나는 내 방식대로 “그러면 인간관계가 외롭겠습니다”라고 슬쩍 떠봤다.

      “천만에요. 대신 술을 안 좋아하는 후배들과 고스톱을 치고 그 돈으로 맛 집을 찾아 다니죠. 전국에 400여 개의 가격 대비 맛 집을 내가 알고 있어요. 또 체육관에 가서 후배들과 어울려 역기를 드는 것을 좋아해요.”

      ―술 마시고 다음날 후회하는 저 같은 사람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내가 말한다고 고칠 것도 아니면서. 술 마시는 사람을 보면 ‘저걸 무슨 맛으로 마시지’라는 딱한 생각도 들고…. 술 마신 뒤 한 소리 또 하고 한 소리 또 하면 나는 그냥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남자가 술 안 마시면 돈 쓸 일이 별로 없지요?

      “나를 위해서는 돈을 많이 쓰지 않아요. 지금껏 신용카드가 없습니다. 카드라고는 항공사 마일리지 카드가 전부이지요. 돈은 현찰로 찾아 꼭 우편봉투에 넣고 다녀요(안주머니에서 현금이 든 봉투를 꺼내 보였다). 20만원이면 며칠간 씁니다. 난 항상 새 돈을 갖고 다니는데 새 돈이면 아까워서 더 잘 안 쓰게 돼요. 천원 권도 꼭 넣고 다닙니다. 그래야 거스름돈을 쉽게 날리지 않아요.”

      ―어쩌다 이 연예계로 오게 됐나요?

      “고려대 응원단장 시절부터 미팅주선이나 행사 사회를 보기 시작했어요. 공부와는 담을 쌓고 지냈지요. 한 학기 내내 한번도 안 들어간 강의도 있었어요. 하지만 제가 학교에서 워낙 유명했기 때문에 낙제는 시킬 수 없었지요.

      그렇게 농대를 졸업하고 나오니 취직할 자리도 별로 없었고, 시험마다 다 떨어졌어요. 강원도에서 오징어를 떼와 장사를 하기도 했고, 책·화장품 외판원은 8년이나 했어요. 그렇게 먹고 살려다 보니 얼굴이 두꺼워진 것 같습니다.

      서울 삼선교의 유명한 점집에 갔더니 외판원을 그만두고 TV에 한번 나가보라는 거요. 그래서 MBC앞에서 청소를 하면서 알아주길 기다리다가, 고등학교 선배 PD를 만났지요. 막무가내로 매달려 ‘유쾌한 청백전’ 프로에 나갔는데 그게 히트였어요. 단 한번으로 신문에 ‘학사출신 최초의 코미디언’이라고 대서특필됐어요. 이를 계기로 ‘너는 키가 작으니 어린이 프로 맡는 게 좋겠다’고 해서 ‘모이자 노래하자’라는 프로를 진행했고, 그때 어린이 ‘왕초’가 된 거죠.”

      ―키가 얼마죠?

      “160”

      ―그렇게 안돼 보이는데?

      “내 키가 얼마인지 나도 몰라. 키가 작아서 키를 안 재요. 그런 거 자꾸 묻지 말아.”

    • 후원금 유용 의혹 휘말려 10년 ‘우정의 무대’ 下車 석달만에 무혐의 밝혀져 

      뽀빠이 이상용은 1986년부터 96년까지 10년간 ‘우정의 무대’를 맡아 진행했다. 당시 군대에 자식을 보냈던 부모에게는 결코 잊지 못할 명프로였다. 이를 포함해 국민장병 위문 공연횟수만도 2980회였다. 대한민국 군인들의 ‘맏형’에 손색없었고, 그의 개인 경력에서도 절정기였다.

      그러나 1996년 말 심장병 어린이 후원금 유용 의혹 사건이 터져나오면서, 바로 그 다음 주 이 프로는 막(幕)을 내렸다. 이 사건은 세간에 엄청난 충격을 던졌고, 일순간 그는 영웅에서 사기꾼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조사 결과 3개월 만에 무혐의로 결론 났다. 서울지방검찰청의 당시 문서(1997년2월28일)를 찾아보면, ‘사기 혐의 없음, 업무상 횡령 혐의 없음’으로 되어있다. 실제 아무 근거가 없이 의혹설(說)에 매스컴이 놀아났던 셈이다.

      그 시점 그가 왜 후원금 유용 의혹의 덫에 걸리게 됐는지는 아직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는 “당시 총선을 앞두고 김현철씨 측근이 대전 유성구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출마해줄 것을 요구했는데 내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그 앙갚음으로 그렇게 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정치적 음모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의 주장을 입증할 만한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김현철씨 측근도 이를 반박한 적은 없다.

      이상용은 ‘우정의 무대’말고도, 어린이 프로 ‘모이자 노래하자’를 15년간, 라디오 ‘위문열차’를 24년간 진행했다. 이처럼 그는 늘 장수(長壽) 진행자였다. 그는 “열심히 하고 같이 일하는 PD들의 속을 안 썩혔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뽀빠이 이상용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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