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4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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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한일합방 직전까지 끈질기게 항거한 민영환志士의 숨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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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희 [edohyy] 쪽지 캡슐

2022-06-09 ㅣ No.225290

+ 찬미예수,


<근세사 歷史人物

민영환(閔泳煥) 愛國志士의 생애와 활동 >
(1861냔8월7일~1905년11월30일/향년44세)

조선과 대한제국의 대신(大臣)이자 척신(戚臣) 종묘배향공신이 되었다. 본관은 여흥이며, 민치구의 손자이자 민겸호의 친아들이며, 고종에게는 외사촌 동생이다.

명성황후 민씨의 친정 조카로 알려지지만 실제는 13촌지간이 되는 먼 친척에 불과하다. 자는 문약(文 若), 호는 계정(桂庭), 시호는 충정(忠正), 종교는 유교 性理學이다.

1878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이후 세도를 구가하던 민씨 척족의 총아로서 1881년 동부승지, 1882년 성균관 대사성에 오르는 등 쾌속 승진을 거듭하며 요직을 거쳤다.

하지만 임오군란때 生父 민겸호가 살해되자 거상(居喪)을 위해 사직하였다. 4년 후인 1886년에 이조참의로 제수되면서 다시 정계로 복귀하였고, 이후 도승지, 이조참판, 예조판서, 형조판서, 한성부윤, 독판내무부사 등의 관직을 지냈다.

1895년 8월에는, 주미전권공사에 임명되었으나 이해 10월에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부임하지 못한 채 사직했다. 그리고 곧이어 친러파가 축출되고, 친일적 경향의 제3차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자 낙향해 두문불출했다.

그당시 日本세력의 견제세력 수단으로, 高宗王의 왕명을 받아 먼길 러시아를 방문 러시아황제를 접근하며, 적극 親러시아 정책전략을 펼쳐왔으나, 러일전쟁(러시아-日本)에서 러시아가 패배 하므로 인해, 日本견제의 뜻을 이루지 못했었다.

1905년 11월17일에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기 위해 강제로 조약을 체결(을사늑약)한 것이다. 고종의 허가없이 외무대신 박제순이 단독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된 것은 열사흘 전인 11월 17일이었다.

용인에서 이 소식을 들은 민영환은 서울로 돌아와 전 좌의정 조병세(1827~1905,1962 대한민국장) 등과 대궐로 나아가 5적 박제순(외부대신), 이지용(내부대신), 이근택(군부대신), 이완용(학부대신),
권중현(농상부대신))의 처단과 조약의 폐기를 청원하였다.

그러나 일본 헌병들의 강제 해산으로 실패하였다.
그 결과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 사설이 국민을 크게 통분시켰으며, 국민들의 애국심에 불을 붙였으며 이어서 을사오적에 대한 물리적 공격, 전국적인 의병운동 등이 일어났으며, 을사보호조약을 통탄하며 그때 조병세와 민영환이 자결했다.

이때 민영환이 자결한 장소에서 대나무가 자랐다고 전해진다. 이 대나무를 혈죽이라고 부른다. 당시 일본에서는 항일운동이 번질 것을 우려하여 혈죽이 조작설로 일축했으나, 민영환의 후손들에 의해 현재까지 보관되어 내려왔다
.
그의 죽음은 망국에 대해 신료(臣僚)의 책임을 지고 속죄하는 것이었다. 향년 44세로 1994년 서울시 견지동에 자결할 당시 살던 집터에 표석이 설치되었다.

그 결과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 사설이 국민을 크게 통분시켰으며, 국민들의 애국심에 불을 붙였으며, 이어서 을사오적에 대한 물리적 공격, 전국적인 의병운동 등이 일어났으며, 그때 조병세와 민영환이 자결했다.

그후 1946년 10월 1일 서울시에서 시호(諡號)인 충정(忠正)을 따서 충정로라는 동명을 제정되었다. 또한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중장(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순림, 이영춘 시니어기자.


글옮긴이~李도희(아오스딩) 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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