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일 (화)
(녹)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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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식 [goodactor] 쪽지 캡슐

2023-10-21 ㅣ No.229475

하느님은 사람들인 우리가, 우리의 됨됨이로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양식과 방식을 배제하지 않고 모든 것을 만들고 꾸미신다

자연의 양식 뿐만이 아니라 인격에 기초한 인본과 인위의 양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결코 사람들인 우리 속으로, 우리 곁으로 훅 치고 들어오는 게릴라 식의 전술 같은 방식으로 우리를 놀래키거나 우리 속을 교란하고 우리 삶에 혼란을 일으키는 방식을 우리에게 쓰시지는 않는다
그런 면면들은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성, 사람들인 우리 서로 간에 관계성이 무엇에 뿌리를 두고 무엇을 중심으로 하며 무엇을 토대로 바람직하고 온전하며 완전하고 충분해야 하는지를, 그래서 하느님과 함께 평화롭고 평온하며 이울러 우리 서로도 행복하게 함께 살 수 있는지를 알려주고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님도 그런 삶의 핵심으로 신의와 자비를 말씀하셨다
단지 약속이나 계약 같은 룰과 사건에 준하고 소급되는 한정된 사이가 아니라 (그런 거라면 십일조나 경신례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존재의 본질에 잇닿고 결속된 실체적 진실이 살아있는 관계성을 이루는 차원인 것이다
그러하기에 계명을 잘 지키는 것도 우선적이고 바람직한 일이지만 하느님과의 본질적인 관계성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하느님의 본질과 성격에 united되도록 하는 공동체성과 공동선을 수용하고 수렴하는 진일보한 차원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성모 마리아는 그런 차원의 모범인 것이다
그리고 카톨릭의 모든 성인들은 그런 차원으로 들어간 사람들이다
무엇이 더 중요한데, 한때 이런 말이 유행어로 나돌았던 때가 있었다
결코 우리 기준으로 중요성을 말하거나, 하느님을 기준으로 더 중요시되는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존재와 삶의 본질에 비추어 그런 것이다
돌아온 방탕한 아들의 비유에서도 예수님은 그런 관계성의 본질이 다시 살아나도록 할 수 있는 것은 그런 관계성 속으로 다시 돌아가고 들어가는 것이라는 진실을 분명히 알려 주신다
우리는 보통 하느님을 위해서도 무엇을 해야하고(의무) 무엇에 소홀한지(책임)와 같은 일을 많이 생각하며 보다 삶으로 본질에 가깝게 합하고 함께 하는 데에는 미치지 못하거나 다가가지 못하기도 한다
그런 학습과 습성의 태도로부터 우리는 부모와 온전히 자유로운 어린이의 모습을 찾아 보기 어렵다
부모와 함께 사는 삶을 일로 여기는 어린이는 없다
아마도 모든 것에 대한 백지 상태가 어린이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부모와 함께라면 무엇이 그리 좋은지 어린이들의 행복하고 즐거운 모습이 차차로 이해되지 않는 나이가 되어가면 그런 삶의 입장에서의 온갖 근심과 걱정거리 속에서 허덕이는 인간상이 점차로 굳어져 간다
삶의 갖은 문제들이 눈덩이처럼 불거지고 대책도, 해결도 별로 없어 보이는 가운데 살다 보면 어느덧 삶이 지나가고 죽음이라는 끝에 다다르게 된다
사람으로서 모든 것을 종합해 한 가지 결론에 이른다는 것은 어려워 보이는 삶이다
그래서 삶의 단편들이 삶을 이루게 되는데 때론 어떤 문제들은 감당이 안 되거나 이해가 안 되는 일이 되며 대체로 억울함이라든가, 괴로움이라든가, 상실감이라든가, 권태라든가, 불안감이라든가, 걱정스러움이라든가, 원망스러움이라든가, 분노스러움이라든가 하는 감정들은 카타시스적인 슬픔에도 이르지 못하는 뭔가의 해결이나 해소가 필요한 감정상태로 인간 자신과 스스로의 삶을 휘어감고 휩싸이게 만들기도 한다
카톨릭의 성인들은 사람으로서 감정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다
감정이 없다면 사람다움이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범죄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관계성의 악화를 부른다
사람에게는 언제나 하느님과의 관계성이 모든 관계성의 뿌리를 이룬다
보이는 형제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라는 말은 단지 연역적, 귀납적 방식으로 그 이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형제를 사랑하라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계명이다
원래부터 이웃을 사랑하는 DNA와 유전자는 사람이 지닌 실체적인 것이 어니라 사람에게 가능할 수도 있는 가능태로 주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런 가능한 본성이 현실태를 이루려면 사람은 반드시 하느님의 뜻에 따라, 계명을 지키고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는 명제를 충분하게 충족시켜야 한다
그래야 하느님과 함께, 사람들 서로 간에도 함께 그런 뿌리와 바탕에서 평화롭고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사는 세상의 현실은 언제나 그렇지 않다
온갖 범죄와 폭력이 난무하고 끊이지 않는다
계명의 속성은 다른 사람들이 계명을 지키도록 만드는 일이 아니라 스스로가 지켜서 이루는 일이다
많은 어리석고 무지한 인간들이 자행하는 악의와 악덕과 악행은 스스로가 지키기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강제하고 강요하는 세태와 행태에서 많이 나온다
그런 습성들이 결정화되는 것이 대체로 범죄와 폭력이다
바람직하게 계명을 이룬다면 성인이나 의인이 될 법할 일인데 그 반대로 계명을 수단화하고 도구화하면 불행한 악인들과 비참한 죄인들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세상에는 언제나 첫 인간들의 원죄가 살아있다
하느님과의 관계성은 모든 이들에게 생명의 현주소와도 같다
그런 현실에서 그 관계성의 상실과 단절을 부르는 일이 범죄와 폭력이다
그것은 그 관계성의 실체적 진실인 신의와 자비를 해치는 것이다
사람들만의 독특한 행태인 범죄와 폭력은 사람들 자신의 의식과 감정상태에서 나온다
아담과 하와도, 카인도, 노아 때의 인간들도, 소돔과 고모라의 인간들도, 요셉의 형제들도, 예수를 죽인 유다인들도 모두 다 그렇다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른다고 해서 하느님은 사람들의 본성을 수술하시거나 바꿔놓겠다고 하는 일들은 벌이시지 않는다
모든 이들이 자신의 본성대로 하며 사는 것은 각자의 삶에서 끝까지이다 

그 가운데 누군가는 본성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돌리고 개선하며 나아지게 하기도 하지만 누군가들은 더욱 그릇되게 삐뚫어지기도 한다
선악과의 비유에서처럼 사람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시고 그에 맞는 자기행위를 하도록 한 사람들의 존재성에는 분명히 이마고 데이라는 본성도 살아있는 것이다
그러한 본성에 칼자국을 내거나 수술자국을 남기는 일 같은 것은 하느님의 격에 맞지 않는 일이다
카톨릭의 모든 성인들은 그 증거이며 표징들이다
구원의 신비는 결코 수술방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내 인생에서 마치 훅 치고 들어오는 사건이 벌어진 것은 서른 살 때이다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말이다
보통은 불이 나듯 자연발화와 인과를 매개로 해서 모든 일들이 일어나고 사건이 벌어지지만 나에게 벌어진 일은 전혀 그런 성격이 아니었던 것이다
당시 교정사목위원의 직함과 천주교 수도회 수사, 그렇게 나에게 있어 두 가지 축으로 관계를 맺게된 사람이 자신과 뜻이 통하는 사람들과 의기투합해 벌인 일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 대부분이 천주교 신자들일 것이다
문제는 바로 그 모든 일에 있어서 그 관계성의 측면이고, 신의와 성실을 서로에게 다해야 할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그 일을 벌이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어떤 사안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고 중대하게 여기는 것은 사람들의 입장이고 태도이다
그것을 또한 삶의 몫에 포함시키고 있기에 사람들은 자기 의식과 감정을 가지고 그에 맞게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그릇된 것인지에 대한 것이고 잘된 일인지, 잘못된 일인지에 대한 것일 것이다
성모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났고 성모 마리아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과 사명을 천사는 알려 주었다
하느님의 방식에 대체로 천사들이 많이 등장하는 것은 하느님의 본질과 성격에 비추어, 그리고 눈과 귀와 입과 지성을 가진 사람의 입장에 비추어 가장 바람직하고 합리적인 것이다
바로 본질과 성격이 달라도, 실체와 입장이 달라도 서로가 지성을 가진 존재라면 그 관계성에 있어서, 그런 관계성을 바탕으로 소통과 커뮤니케이션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표본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무엇보다 평화로워야 하는 하느님과의 관계성은 바람직한 소통과 커뮤니케이션으로 다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마치 밀리터리 오퍼레이션, 군사작전처럼 벌인 그 사람들의 일방적인 사건은 여러 모로 악화된 잔상들을 퍼뜨리고 남기게 된 것이다
누군가에 대한 사랑인지, 누군가에 대한 염려인지가 그 사람들 스스로에게서도 잘 판단되지 않았던 일인 것이다
본인들의 심리상태조차도 성찰되지 않았던(이것은 사람이 모든 일을 하는 데에 있어서 간과할 수 없는 의식과 감정의 저변이다) 가운데 무엇이 그렇게 앞서서 우선적으로 성급하게 그 모든 일을 꾸미게 되었는지 이제라도 그 성찰의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하느님이 사람들을 위해 마련하신 삶의 질서와 시간들이 일순간에 무너지고 그 폐허에서 살아야 했던 한 사람에게 자신들을 통해 하느님의 뜻이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그 사람들 가운데 아직도 있다면 그것은 성모 마리아와 모든 성인들을 모욕하는 것이다

이제라도 그 모든 사람들이 참다운 반성과 회개를 했으면 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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