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6일 (토)
(녹)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자유게시판

★ 아름다운 이름 대건 안드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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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미정 [NATALIA99] 쪽지 캡슐

2001-07-12 ㅣ No.22280



감상해 보세요~♡ "

P.S:" 옆에 있는 고운 詩들도

나탈리아 올림.

2001년 7월 12일 

- 아멘 -

오늘 깊이 기도 드려 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묵상해보며,

그 분의 생애 내내- 풍겨져나오는

부디 바라며....

닮아갈 수 있는 날들이기를

나 먼저,  그 분의 삶과 사랑을

바로 사랑이 아닐까 합니다.

바로 키울 수 있을까요?

우리는 무엇으로 우리들의 신앙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셨는데...

죽음 앞에서도 그분은

to.

1984년 5월 6일 시성됨.
 
혜화동 가톨릭대학으로 이장됨

1960년 7월5일에 다시

소신학교 성당으로 이장됨
  
1951년 서울 수복 후 서울 혜화동의 소신학교 성당으로 이장됨

용산 성직자 묘지로 이장되었다가

예수성심 신학교 성당에서

1950년 6월 25일 유해가 

김대건 신부님의 축일로 정함.

로마 교황청에서 7월 5일을

한국 성직자들의 대주보로 결정. 

1949년 11월 15일 

이민식(빈첸시오)에 의해 미리내에 안장됨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9월 15일 반역죄로 사형 선고를 받음

마지막 회유문 작성

8월 29일 조선 교우들에게 보내는

지리 개설서를 저술함

이 무렵 세계지도를 작성하고, 

페레올 주교에게 마지막 서한 작성.

보내는 마지막 서한 작성

7월 30일 프랑스 신부들과 최양업에게 

6월 22일 이후 40여 차례에 걸쳐 문초를 받음

서울 포도청으로 이송

6월 9일 해주 감영으로 압송
 
1846년 6월 5일 체포됨.

순위도 등산진으로 귀환

편지와 지도를 탁송

백령도에서 중국 어선과 접촉, 

순위도(巡威島) 등산진(登山鎭) 도착

5월 25일  연평도 도착

교우들과 함께 마포를 출발

개척하라는 페레올 주교의 지시를 받고 

5월 14일 서해 해로를 통한 선교자 입국로를 

미사 후 서울로 출발
 
1846년 4월 13일 은이공소에서

서울 및 은이 공소 순방.

충남 강경 부근의 황산포 나바위에 도착

제주도 표착(4차 입국)

라파엘(Rephael)호를 타고 상해 출발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약 30리 되는 만당(萬堂) 성당에서 첫 미사.
 
같은 해 8월 24일 상해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

8월 17일 상해 연안에 있는 금가항(金家港) 성당에서

1845년 6월 4일  상해 도착

교우와 상봉하여 조선으로 귀국(3차 입국)

1845년 1월 1일  봉황성 변문으로 나가 조선 
 
12월 25일  탁발례부터 부제품까지 받음

소팔까자로 귀환하여 신학 공부 계속

경원(慶源)에서 조선 교우 상봉

훈춘을 거쳐 조선으로 귀국(2차 입국). 

탐색을 우해 훈춘으로 출발

1844년  페레올 주교의 명으로 북방 입국로 

최양업을 만나 귀국길에 오름. 

1842년 파보리트(la Favorite)호를 타고 온 

양자강 하구 도착, 오송(吳淞) 도착

대만을 겨유, 양자강 앞바다의 주산도(舟山島)에 입항

마닐라 출발. 대만으로 향함

마카오로 출발  마닐라 도착

세실 함장의 에리곤 호에 탑승하여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프랑스 함대

신학 과정 입문.

1841년 11월  최양업과 함께 철학 과정 이수, 
 
11월 27일 동료 신학생 최방제 열병으로 사망
 
1838년 겨울 마카오로 귀환.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신

1837년 8월  마카오 민란으로 인해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신

르그레조아(Legregois) 신부님에게서 수학.

대표:Libois신부에서 칼레리(M.Callwry)와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대표:Libois신부)에서

중국 대륙을 남하하여 마카오에 도착 이후

1837년 6월 7일에는 

샤스탕(Chastant) 신부 댁에 도착

조선 입국을 위해 요동에 머무르고 있던 

정하상(바오로)·조신철(가롤로) 등의 인도를 받아 변문으로 출발

세 신학생이 함께 순명과 봉사를 서약

서울의 모방 신부님 댁에서 합류

최양업(토마), 최방제(프란치스코)와 

앞서 신학생으로 선발된 
 
신학생 후보로 선발됨.

모방 신부에게 영세를 받은 뒤

1836년 4월 경기도 용인의 '은이 공소'에서

순교자들로 일가를 이루었다.

이처럼 김대건의 가계는

103위 성인 중 한명이 되었다.

참수 순교함으로써,

1839년 서울 서소문에서

김대건 신부님의 아버지 제준은

1824년 덕산에서 옥사하였다.

그에 앞서 남편 손영욱(요셉)은

서울 당고개에서 교수되고,

종한의 딸 데레사는 1839년 기해박해 때

그리고,

참수 순교하였다.

체포되어 1816년 대구 감영에서

살다가 여기서 1815년 을해박해 때

솔뫼에서 안동 우련밭으로 피해

진후의 셋째 아들 종한은

옥고를 치른 끝에 1814년 옥사 순교 하였다.

1805년에 다시 해미에서 잡혀 10년 동안

1801년때 유배 되었다가

신앙을 고백한 적이 있고,

그는 신해박해(1791) 때 체포되어 관가에서

이존창의 전교로 입교 하였다.

얼마 안되어 내포의 사도인

김진후는 한국 천주교회가 탄생된지

김대건의 증조부인 김진후 때였다.

천주교와 관계를 맺은 것은 

그의 집안은 몰락 양반의 가문으로, 

김재준과 상흥고 우르술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현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1821년(순조21) 8월21일 충청도 솔뫼 

신부님의 아명은 재복. 관명은 내선.

to.

날들이길 빌어 봅니다. - 아멘-

그분의 모습을 닮아가는

읽어보시면서 부디,

글 올려봅니다.

그 분의 생애에 대한 

굿뉴스에 실려 있는

있었으면 하는 바램 가득 담아

그 분의 믿음을 본받을 수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려 하셨던

시퍼런 죽음 앞에서도

우리들 신앙의 모범이시며

향기로운 시간이었습니다.

참 아름답게 느껴볼 수 있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죽어서도 전해지는 그 분의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유품 및 유물 전시회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혜화동 신학교에서 전시되었던

몇 년 전인가요?

축일이 있는 달입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이신,

7월은 최초의 한국인 신부님이고,  

to.

기도만을 받쳐드리겠습니다.

그 분들을 위해

저는 지금 힘든 이들이 있다면

올라와 있네요...!

게시판에 많은 글들이 

최미정 나탈리아입니다.

서울 노량진성당 주일학교 교사

안녕하세요?

♬ 배경 음악: 『 솔아 솔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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