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6일 (토)
(녹)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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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영성적인 평신도의 無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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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미숙 [shwang] 쪽지 캡슐

2001-05-04 ㅣ No.20083

 

배경음악은 영화 <미션>중 메인테마 가브리엘 신부님의 오보에입니다.

율법학자 한 사람이 와서 그들이 토론하는 것을 듣고

 

있다가 예수께서 대답을 잘 하시는 것을 보고

 

"모든 계명 중에 어느 것이 첫째가는 계명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첫째가는 계명은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느님은 유일한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

 

또 둘째가는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는 것이다.

 

이 두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마르코 복음 12장 28-31

 

안녕하십니까? 형제님, 반갑습니다.

 

형제님의 좋으신 말씀 잘 읽었습니다.

 

제가 평신도의 영성을 위해선 기도와 성서를 많이 읽자는

 

의견을 쓴 자매로써 형제님의 글을 읽고 덧붙여

 

제 의견에 보충적인 추가 의견을 간단히 드리고자 하오니

 

댓글로는 오해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형제님의 아래 질문에 답해 드리자면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던 백성을 구하기 위해

 

모세를 필요로 하셨듯이, 당신의 기도에 응답하기 위해 당신을

 

부르고 계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여전히 물음은 남을 수 밖에 없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무엇을 하실 용의가 있습니까?

저는 가톨릭 신자로써 제 자신과 남들에게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기도와 성서 읽기 그리고 신자로써의 나름대로의

 

성실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며

 

무엇을 하실 용의가 있으시냐?는 질문에 답해 드리자면

 

평신도 사제직에의 부르심에 올바른 응답을 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형제님 또한 같은 신자로써 저와 똑같은 질문을

 

제가 형제님께 드린다면 비영성적인 평신도들을 위한

 

변명 이전에 가톨릭 신자로써 형제님은

 

당신은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또, 무엇을 하실 용의가 있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시대인들이 아닌

 

신약시대인들입니다.

 

구약시대는 율법의 시대로 이는 이로,눈은 눈으로 죄를 처벌하는

 

율법이 지배하는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와서 예수님은 구약의 율법 대신

 

그러나 나는 새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라"

 

새로운 계명을 주십니다.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 이야기는 예수님의 새로운 계명인

 

"사랑"이 선포되고 있는 복음입니다.

 

분명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이 여인은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데 주님은

 

"네 죄를 묻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아주 차원높은 사랑의 율법을

 

이 여인에게 적용시킴으로써

 

이 여인을 죽게하는 대신 살게해 주십니다.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이 여인은 죽지만

 

예수님의 새로운 계명

 

그러나 "서로 사랑하라"는 새계명에 의해

 

이 여인은 목숨을 건지고 지나간 죄속의 삶을 용서받고

 

치유받으며 새로운 삶을 향해 떠나갑니다.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은 신약시대의 새로운 계명

 

"사랑"의 율법을 받았고 당연히 우리 신자들의 삶속에

 

이 사랑이 완성되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예수님이 이 여인과 이 여인을 끌고 온 이들의 양심에

 

"죄"를 자각시키는 방법은 "너는 음탕한 여자다.

 

너는 간음하다 붙잡힌 죄인이다"라는 비난 이전에 비록

 

"너는 음탕한 죄를 지은 죄인으로 죽어 마땅하지만,

 

네가 무슨 죄를 저질렀건 나는 네가 흙으로 빚어진

 

나약한 인간으로

 

언제든 너 뿐만 아니라 너를 끌고온 이들 또한 너처럼

 

똑같은 죄를 저지를 수 있고 혹은 감쪽같이 저지르고

 

살아왔을 수도 있다는 걸 알고있다.

 

나는 건강한 이를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바로 너

 

그리고 너를 끌고온 죄인들을 부르러 왔다.

 

내가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온 목적이 바로 간음하다 붙잡힌

 

너와 같은 죄인을 부르러 왔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왜 죄인을 부르러 이 세상에 오셨을까요?

그건 우리처럼 나약하고 죄많은 바로 "나"를

 

LOVE 하기 때문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나에 대한 사랑이 너무도 지극하셨기 때문에

 

인간의 피와 살을 취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들도 서로 사랑하라는

 

지상명령을 주시고 승천하시지 않으셨나요?

 

비난 비판 단죄해서 죽이는 구약의 율법보다

 

몇 차원이 더 놓은 "사랑"의 계명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뛰는 기적이 일어나는 이야기가 바로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 이야기 뿐만이 아니라 성서 곳곳에 있습니다.

 

늘 죄속의 음지에서 살아온 간음한 이 여인과

 

이 여인을 끌고 온 이들의 "죄"에 대한 양심의 자각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에 의해 일깨워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새로운 계명인 "사랑"

 

구약의 율법과는 비교가 안되는...쉽게 표현하자면,

 

너무도 수준높고 고차원적인 죄에 대한 양심의 자각

 

즉 자신의 죄에 대한 스스로의 자각이 아닐까요?

 

예수님의 사랑으로 이 여인은 자신이 저지른 죄를 보게 되었고

 

다른 이들 역시

 

자신들의 감추어진 죄를 보게됩니다.

 

다시말해 예수님의 사랑이 이 여인과

 

이 여인을 끌고온 이들의 마음을 움직인게 아닐까요?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이 여인은 단죄받아 죽게 되고

 

그렇게 해서 이 간음한 여인은 어쩌면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자각도 없이 그냥 그렇게 죄짓고 살다

 

죽어버린 여인이 될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자신의 죄를 보게 되고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죽음 대신

 

다시 살게 되어 새로운 인생을 향해 떠나갑니다.

 

그 뿐인가요?

 

이 여인을 끌고 온 이들 또한 자신들의 죄를 들여다보고

 

깨닫고 치유받은 채 떠나가게 됩니다.

 

예수님의 새 계명 "사랑"은 그냥 무조건, 무비판적인 수용

 

그리고 무책임한 도덕적인 책임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인간으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고차원적인 비판이 아닐까요?

 

사람의 목숨을 건져내면서까지요.....

우리는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구약은 그림자이고 신약은 그림자의 오리지날 원형인

 

예수님의 시대입니다.

예수님의 시대는 바로 사랑의 시대가 아닌가요?

 

이웃을 사랑한다는게 그냥 말로만 사랑한다 해서

 

사랑해 지는게 아니라, 그건 입술만의 사랑이고

 

너에 대한 내사랑의 가장 확실한 표현이

 

너를 위한 나의 작은 기도가 아닐련지요?

 

기도는 저 산을 움직이고 뽕나무가 바다에 심어지는

 

기적이 일어나는데

 

내 기도를 받는 이 역시 산처럼 움직이게 되는

 

영적 변화를 겪지 않을까요?

 

그래서 기도하는 것 필수이고 최우선입니다.

 

또한 요한 복음 5장에 나오죠.

 

더구나 아버지께서 보내신 이를 믿지 않으므로

 

마음 속에 아버지의 말씀이 들어 있지 않다.  

 

너희는 성서 속에 영원한 생명이 있는 것을 알고

 

파고 들거니와 그 성서는 바로 를 증언하고 있다.  

 

요한 복음 5장 38-39절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요한I서에서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사랑자체인 나 예수를 알기 위해선 성서를 파고드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신자들

 

기도와 성서 읽기 하지 않고서는 주님을 올바르게  

 

알기 힘들며 내 영성이 커나기기가 힘듭니다.

 

아니 불가능합니다.

 

형제님 또한 어쩌면 한집안의 가장이시거나

 

한사회 구성원으로써 어떤 조직안에 계실텐데요,

 

한집안의 가장 그리고 한사회의 조직원으로써 책임과 의무가

 

주어져 있을텐데 그 책임과 의무를 회피하거나 게을리 하시면서

 

나는 집안의 가장이다 혹은 우리 회사의 부장이다 등등 .....

 

주장하시면서 다른 변명을 하실 수 있으실까요?

 

예를 들면

 

가장이 가족들을 위한 생계유지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으면서

 

다른 변명이나 다른 합리화가 주장되어질 수 있을까요?

 

마찬가지로, 우리 신자들 자신의 평신도 영성을 키우는데

 

스스로의 책임감과 의무감 주어졌고 교회 역시 평신도 영성을

 

키워주기 위한 책임감과 의무 있습니다.

 

교회에서 이 책임감과 의무감을 실현하기 위해

 

성직자 수도자들 계십니다.

 

우리 평신도들 스스로의 평신도 영성개발에

 

각자 책임감과 의무감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영적 무지의 병을 고치기 위해선

 

비영성적인 평신도를 위한 변명은 없고

 

비영성적인 평신도를 위한

 

끈임없는 자기 노력과 교회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제 결론을 조심스럽게 말씀드리자면,

 

비영성적인 평신도를 위한 변명이란 자기 자신만의 궤변이고,

 

자기 책임의 회피에 대한 변명이며 자기 합리화라고 여겨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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