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7일 (일)
(녹) 연중 제14주일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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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외국인천주교교구장-나길모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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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열 [gapnuri] 쪽지 캡슐

2002-04-14 ㅣ No.32025

 

♥♥♥’마지막 외국인 천주교 교구장’ 나길모 주교

 

 

25일 인천교구장직을 은퇴하고 고향인 미국 매사추세츠주로 떠나는 `마지막 외국인 천주교 교구장’ 나길모(76) 주교를 인천시 답동주교좌성당에서 만났다.

“그땐 비록 가난했지만, 서로 돕는 따뜻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지요. 그 마을엔 정신병 환자가 있었는데, 병원도 거의 없을 때라 시골에 그냥 방치돼 있었지만 마을 사람들이 그를 보살피더군요. 그런 공동체성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6.25직후인 1954년 27살의 나이로 미국의 메리놀회 한국선교사로 와 부임했던 충북의 한 시골 성당에서 지내던 추억을 회상하는 노 주교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5남매의 장남으로서 64년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고도 갈 형편이 되지 못하는 가난한 나라에서 살면서 청빈이 몸에 깊게 배었다. 교구에 차가 있긴 하지만 그 차를 언제 탔는지 잘 기억하지 못할 정도다. 그는 승용차 대신 늘 마을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한다. 당시 한국의 어려움을 알리고 도움을 호소하느라 밤새 두들겼던 수동타자기를 아직도 편지 봉투의 주소를 적는데 쓰고 있다고 한다.

 

나 주교는 한국인들이 가난의 터널을 지나 기적적인 발전을 이룬데 대해 기뻐하면서도, 서로 돕던 공동체 정신이 파괴되고, 개인만 생각하는 과소비, 낭비가 만연되는 풍조를 안타까워 했다.

 

“지금도 북한이나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은 먹을 것이 없어 굶거나 죽어가고 있어요. 음식점에 가보면 너무 많은 음식을 남겨서 가슴이 아픕니다. 남긴 음식만으로도 북한 사람들을 모두 먹이고도 남을 겁니다.” 나 주교는 아침에 먹은 스프를 저녁에 다시 데워먹는 `인천 깍쟁이’로 살아왔다.

 

그런 가운데서도, 어려운 이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잃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나 주교는 독재정권 아래서 일쑤 미행을 당하거나 도청을 당했다고 한다. 인천의 대우자동차 부평공장 노동자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 일이 그를 `몹시 안타깝게’ 한다.

 

나 주교가 은퇴하고, 후임으로 내정된 최기산(54) 주교가 인천교구장에 부임하면 한국 천주교에서 외국인 교구장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그가 1961년 35살의 젊은 나이로 서울 교구에서 독립한 인천교구의 교구장을 맡을 당시만 해도 당시 11명의 주교 가운데 한국인은 노기남·서정길 대주교 등 4명에 불과했다.

 

“당연한 일이고 좋은 일입니다. 한국인 사제들의 능력은 뛰어납니다. 예전엔 유럽과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 교회를 도왔지만 지금은 유럽과 미국에선 사제가 없어서 교회 운영이 어려울 정도입니다. 이제 반대로 한국의 사제들이 유럽과 미국으로 파견돼 그 교회들을 도울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나 주교도 사제가 없어 성당 2개를 통합할 수 밖에 없는 고향의 성당일을 도우며 여생을 보낼 계획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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