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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와 손녀의 정치 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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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요하 [jiyoha] 쪽지 캡슐

2002-11-07 ㅣ No.43023

 

                          할머니와 손녀의 정치 토론

 

 

 

 

 요즘 중학생 시절의 마지막 기말 시험을 코앞에 두고 공부에 여념이 없는 딸아이가 얼마 전에 온 가족에게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기쁨 하나를 안겨 주었다.

 

 지난 10월 중순 경 학교에서 학예발표회와 체육대회로 이어지는 ’목련제’라는 이름의 행사를 가졌는데, 마지막 날 행사로 ’도전! 여중 벨을 울려라’라는 퀴즈 게임이 있었다고 한다. 요즘 KBS에서 방영하는 ’골든 벨을 울려라’라는 퀴즈 게임 프로를 모방한 것이었던 모양이다.

 

 그 퀴즈 게임에 참가한 딸아이가 50문제를 다 잡아서 단독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집에 와서 그 얘기를 하면서 딸아이는 그 퀴즈 게임 도중에 ’꺅!’소리가 두 번 크게 났다고 했다.

 

 40번 문제에서 거의 모든 참가자들이 떨어져 나가고 단 두 명이 남았는데, 다른 한 명은 1학년 학생이었다나. 41번 문제에서 그 1학년 학생이 탈락하게 되자 한 번 꺅! 소리가 났는데, 3학년 석의 환호와 1학년 석의 비명이 합쳐진 묘한 소리였다고 한다.

 

 결국 딸아이 혼자 남아 나머지 아홉 문제를 모두 맞추었는데, 마지막 50번 문제를 맞춘 순간에는 KBS의 골든 벨 순간을 방불케 하는 함성이 온 교정에 가득 찼다고 했다.

 

 아이에게서 그 얘기를 들으며 누구보다도 가장 즐거워하는 이는 역시 어머니였다. 손녀의 등을 두드려 주며 함빡 웃음 짓는 모습은 행복 그 자체였다. 어머니의 손녀 사랑은 참으로 극진하다. 아이가 ’야간자율학습’을 하는 날마다 밤 9시가 되려면 아직 한참이 남았는데도, 아이가 춥지 않도록 미리 가서 기다리고 있다가 태워오라며 나를 채근하시질 않나, 아이가 좋아하는 귤을 꼭꼭 준비해 놓았다가 손수 까주시지를 않나, 아침마다 아이의 저녁 도시락을 손수 챙겨 주시는 둥, 할머니 없는 아이들이 보면 서러워 못살 것만 같은 모습을 보여 주시곤 한다.

 

 아이는 온 가족이 함께 밥을 먹는 아침상 앞에서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곧잘 얘기해 주곤 한다. 엊그제 아침에는 꽤나 흥미로운 얘기를 했다. 교실에서 과거 일제 시대의 친일파, 민족 반역자들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고 했다.

 

 대다수의 아이들이 일제 치하가 36년이나 지속되었는데 그 세월에 친일파가 아니었던 사람이 몇이나 되었겠느냐는 말에 동조를 하더란다. 일제 치하에서 밥을 먹고살았다는 자체가 친일이나 다름없는 것이었으니, 이제 와서 친일파 문제를 논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주장들이었다고 한다.

 

 이에 딸아이가 열변을 토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일제에 항거한 민족 지사들, 목숨 걸고 갖은 고생 다하며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은 뭐가 되는 것이냐? 그렇게 말한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며 독립운동에 헌신한 분들의 그 애국애족도, 그 무엇도 다 무가치해지는 것이 되지 않느냐?

 

 난, 우리 할아버지가 저 만주 벌판에 가서 총을 들고 독립 투쟁을 하신 분은 아니지만, 일제 통치에 순응하며 사신 분이었다고 해도 결코 친일파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시절에 친일파가 아닌 사람이 몇이나 되었겠느냐는 말은 내 스스로 우리 할아버지도 친일파로 모는 짓이고, 나라를 잃고 이민족의 지배 속에서 젊은 시절을 슬프게 사셨던 할아버지를 더욱 욕되게 하는 짓이라고 생각한다.

 

 설령 힘없는 백성으로서 일제 통치에 순응하며 산 것 자체가 친일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더라도, 지금 우리가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이유로 친일파에게 눈을 감아주는 것이야말로 생각이 좁은 비열한 짓이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친일파 문제를 생각하고, 친일파를 철저히 단죄하는 것이야말로 일제 시대를 살았던 우리 조상님들을 명예롭게 해 드리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중학교 3학년 어린아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참 기특하고 대견스러울 뿐만 아니라 고맙기 그지없었다.

 

 "야, 우리 딸의 이런 말을 들으면 하늘나라에 계신 할아버지가 가장 좋아하시겠다. 우리 딸이 하늘나라에 계신 할아버지에게까지 효도를 다하네."

 

 이런 내 말에 어머니도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그저 우리 딸이 효녀라니께. 아빠가 할아버지 생각허는 말두 허게 허구." 이렇게 멋진 말도 했다.

 

 나는 딸아이에게 말했다.

 "야아, 니네 교실 풍경 차암 멋지다. 어린 여자 애들이 그런 토론까지 다허구…. 난 느이들이 맨날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들 얘기만 허는 줄 알었는디…."

 

 그러자 딸아이의 대답은 더욱 재미있었다.

 "우리 교실에서는 정치 토론을 많이 해요. 대선 후보들에 대한 얘기두 많이 허구요. 그런데 남중학교 애들 교실에서는 ’야인시대’ 얘기밖에 없대요. 김두한이 진짜 영웅인 줄 알고…."

 

 나는 어머니를 돌아보며 동의를 구했다.

 "어머니, 우리 딸 진짜 똑똑허쥬?"

 

 그러자 어머니의 대답은 다소 의외였다.

 "그래두 난 우리 딸이 외지루 고등핵교 가는 거 반대여. 여자애가 고등핵교 시절부터 외지루 가서 하숙 생활허며 공부허는 거, 내 맴이 안 놓여서 안 되어. 객지에서 얼매나 고생이 클 티어. 집 생각두 많이 날 테구. 그 고생허는 거, 내 눈으루 뭇 봐."

 

 그리고 어머니는 그새 한없이 가엾어하는 표정으로 어린 손녀딸을 바라보셨다.

 이처럼 내 어머니는 손녀를 사랑하신다. 조손 간의 사랑이 정말 각별하고도 극진하다.

 

 그런데 그런 할머니와 손녀 사이에 어제 아침에는 약간의 마찰이 발생했다. 아침식사 자리에서였다. 어머니에 의해서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 후보의 아버지 이홍규 옹의 장례식에 관한 이야기가 화제로 오른 것이 발단이었다. 어머니는 그 얘기를 시작하면서 "이회창이 천주교 신자데잉?"라는 말을 했다.

 

 "그걸 여태 모르셨어요?"

 나는 의아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에 이회창 아버지 장례식을 보면서 처음 알었어."

 "아니, 지난 97년의 선거 때 이미 확실히 아셨구, 그 후에두 지가 여러 번 얘기를 혔을 텐디유. 원젠가 그 양반이 아들 병역 문제와 관련헤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다’구 헌 말에 대헤서두 얘기를 허면서…."

 "그랬었남? 그런디 내가 왜 여태 그걸 몰랐지…."

 

 이 대목에서 어머니의 정신 상태를 조금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팔순이 다 되신 노인네답지 않게 기억력이 참 좋으신 어머니인데…. 그런 어머니께도 어떤 불길한 조짐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 싶어지면서 은근히 걱정과 우려가 마음 한구석에 매달리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김수환 추기경과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대주교가 집전한 이홍규 옹 장례미사 얘기를 ’자랑스럽게’ 했다.

 "텔레비루 잠깐 보았는디두, 장례미사가 참 거창허구 장엄한 것 같데. 원체는 그랬을 겨. 추기경님허구 대주교님이 집전을 허셨으니…."

 

 그리고 그 말끝에 어머니가 한 말은 이런 것이었다.

 "나, 이번 선거에서 이회창이 찍을 겨."

 

 나와 아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데, 딸아이가 한마디하고 나섰다.

 "같은 천주교 신자라서요?"

 "같은 천주교 신자니께, 같은 값이면 신잘 찍어야지."

 

 그러자 또 딸아이가 말했다.

 

 "누굴 찍든지 간에 그건 할머니 뜻에 달린 일이에요. 하지만 같은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무조건 찍는 것은 옳지 않아요. 후보들을 서로 비교도 해 보고, 누가 더 올바르게 참되게 살아왔고 크고 옳은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가, 앞으로 이 나라가 진정으로 발전을 하려면 누구를 선택하는 것이 최선의 길인가, 진지하게 고민을 한 다음에 찍어야 한다구요. 그런 고민을 한 다음에 찍는다면 누굴 찍는다 해도 문제될 게 없겠지요. 하지만 종교가 같다고 해서 무조건 찍는다고 한다면, 경상도 사람은 무조건 경상도 찍고, 전라도 사람은 무조건 전라도 찍고, 충청도 사람은 무조건 충청도 찍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어요.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어요. 그건 나라를 망치는 일이에요. 어른들은 빨리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야 해요."

 

 딸아이의 이런 말에 즉각 맞장구를 치는 건 올해 초등학교 6학년인 아들녀석이었다.

 "맞아. 누나 말이 맞아."

 

 나와 아내는 잠시 서로 마주 보았다가 한마디씩 했다.

 "내가 할 말을 우리 딸이 다 허네."

 "엄마두 잘 허지 뭇허는 말을, 어린 딸이 엄마보다 몇 배루 잘 허네."

 그리고 우리는 어머니의 답변을 기다렸다.

 

 잠시 후에 어머니가 말했다.             

 "이 늙은 할미두 어린 손녀헌티 배울 때가 있다니께. 허지먼, 앞으루 내 맴이 워떻게 배뀔 지는 물르지먼, 그래두 아직은 이회창이여."

 

 같은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 때문만은 아닐 터였다. 어머니의 그런 마음속에는 텔레비전이 보여 준 이홍규 옹의 장례미사 장면도 크게 작용하고 있을 터였다.

 

 이회창 후보의 부친 이홍규 옹이 적당한 시기에 아들을 크게 도와주었다는 단순 미묘한 말들이 회자되고 있는 것에 더하여 김수환 추기경도 이 후보를 도와주고 있다는 세간의 오해일지 진실일지 모를 시각도 엄존하고 있는 현실을 놓고 볼 때, 현재 내 어머니에게는 그 무언가가 통했다고도 볼 수 있겠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노인네이신 내 어머니의 그런 무조건적인 태도를 내 어린 딸이 감시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아직 투표권도 없는, 이제 겨우 중3인 딸아이가….

 

 이제 어른들이 아이들을 가르치기만 하는 세상은 아니다. 어른들은 알게 모르게 아이들로부터 감시를 당하는 세상이기도 한 것이다.

 비록 이 세상이 다수 ’대중’들에 의해서 좌우되기는 할 망정…. *

 

 

 11/07

 충남 태안 샘골에서 반딧불 작가 지요하 막시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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