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6일 (토)
(녹)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자유게시판

밥해먹기와 밥해먹이기의 차이

스크랩 인쇄

윤종관 [gabie] 쪽지 캡슐

2003-04-22 ㅣ No.51377

저의 친구 한 분이 동문 홈페이지에 올린 글을 퍼다가 소개합니다. 한번 쯤 가슴에 담아볼 이야기라고 생각되어 소개합니다.

 

----------------------------------------------

 

이제 한달 남짓이면 나는 혼자 밥해먹기에서 해방된다. 정년퇴직으로 이젠 가족과 함께 살게 된다.  

 

처음 이곳 지방 회사의 직원 아파트에 입주하고부터 소위 말하는 주말부부가 된지 오늘날 어언 13년째다.

 

밥 해먹이기가 아닌 혼자 해먹기란 그 얼마나 머리 속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일인가?

끼니를 사서 배를 채움이 간단할 것만 같아도 그것이 어쩌다 한두 번이지 연달아서 연속 사흘만 사 먹어보라!

 

이 집 것도 그 맛, 저 집 것도 그 맛, 설렁탕 맛이나, 곰탕 맛이나, 갈비탕이나, 육개장이나, 자장면이나, 짬뽕이나, 그 맛이 그 맛으로 느껴짐이 좋은 음식의 참맛을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마저 들게 한다. 비단 그뿐인가? 음식점에서 파는 음식에는 어떤 조미료가, 또 얼마만큼이나 뿌려져서 이 아둔한 인간의 혓바닥 오감을 마비시켜 가고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일... 미각을 잃어버림은 그것 또한 슬픔과 불행인 것 아닌가?

 

그래서 나는 결심한 것이다. 스스로 밥 해먹기다. 무공해 건강식으로 말이다. 완벽한 주방시설을 그냥 두고 날마다 메뉴 선정에 고심하면서도 매식의 간편함을 추구하는 나의 모습이 바보스럽기도 했기 때문이다.

 

처음 한동안 나는 압력 밥솥에 쌀 씻어 앉히고 생선 토막 내어 냄비에 넣고, 서울 집의 아내한테 장거리 시외 전화하기를 수십 번이었다.

물은 얼마를 부어야하며 간 맛은 어떻게 조절해야 하며 갖은 양념은 또 무엇이며 그때그때 나로서는 실감나지 않는 설명을 몇 번이고 되물으며 조리를 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밥하기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은 나는 압력 밥솥 뚜껑을 닫고 가스 불을 적당히 조절한 후 취사완료를 알리는 딸랑 딸랑 딸랑이의 경쾌한 신호 소리를 기대하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매트에 고단한 몸을 잠시 눕힐 참이었다. 베개 두개를 포개서 등허리 밑에 받치고 텔레비전을 켠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면서 나의 두 눈꺼풀은 점점 무거워졌고 초점 잃은 눈동자를 사정없이 덮어 오기 시작한다.

잠시 탈혼 상태가 간헐적으로 진행되기 몇 분이나 지났을까? 야릇한 향기가 콧구멍을 자극하여 퍼뜩 눈을 떴다. 딸랑이 소리를 듣지 못 했는데 이상했다. 콧구멍을 벌름거린다. 그것은 밥 타는 냄새였다. 순간 매트에서 몸을 일으켜 후다닥 주방으로 달렸다.

 

이게 웬일인가? 딸랑이는 솥뚜껑위로 모가지를 젖혀 버렸고, 밥 김이 빠져 나오는 구멍으로는 밥 김이 아닌 희뿌연 연기가 풀풀 솟아나고 있었다.

얼른 가스불은 껐지만 솥은 온통 싯누렇게 타버렸고, 심지어 밑바닥은 야구공에 맞은 마빡 부어오르듯 불룩하게 부풀어 있었다. 녹아내릴 판이었다.

멍청해지는 머리 속을 대충 정리하며 살펴보니 이 바보가 딸랑이를 제자리에 끼워두는 것을 깜박 까먹은 것이었다. 그러니 압력 밥솥은 가스 불에 뜨거워지면서 딸랑이가 막고 있어야할 구멍으로 증기압과 밥물이 죄다 흘러 나와 버렸으니 픽픽 증기를 뿜으며 딸랑대야할 그놈이 주인장에게 신호를 보낼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일단 솥뚜껑을 열었다. 내부 압력이 없으니 쉽게 열렸다. 합성 실리콘 패킹은 높은 열에 오그라들고 밥알들은 아프리카 부시맨 색갈이였다.

결국 나는 그날 저녁 라면 한 냄비로 끼니를 때울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압력 밥솥은 그날로 폐솥(?) 처분되었다.

 

혼자서 밥해먹기가 왜 이렇게 번거롭고 귀찮게 느껴지는가?

곰곰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혼자이기 때문이라는 사실로 결론 지울 수 있었다.

 

밥은 나눔이다. 나누어 먹어야 하는 것을 혼자 제 뱃속 채우려고 허덕거리니 귀찮고 짜증나기 십상이다.

 

아내는 수십 년을 솥뚜껑과 씨름하는데도 잘 견디어 내고 있다. 왜 일까?

사랑하는 남편과 나누고 자녀들과 나누려고 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나눔을 위한 밥하기라면 그것을 귀찮게 여길 인간은 아마도 드물 것이다.

“여보! 준비 다 됐어요. 식사하세요!”라는 정겨운 목소리를 오랫동안 들으려면 아내에게 사랑을 보이자!

그렇지 않으면 국물도 없을지 모른다!



432 0

추천 반대(0)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