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8일 (월)
(녹)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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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야 할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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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탁 [daegun011] 쪽지 캡슐

2001-08-20 ㅣ No.4421

                  내가 살아야 할 이유

 

사랑이 무엇인지도, 가정의 소중함은 더더욱 모르는 어린 나이에 나는 남편을 만나 가정이란 울타리를 만들었다.

첫아이를 품에 안고 난 뒤 고단한 삶을 헤쳐 나갈 생각보다는 주저앉아 설움과 후회로 가득한 울음만을 삼켰으며, 세월은 흘러 둘째를 가지면서 서서히 세상 살아가는 길에 발걸음을 들여놓을 줄 알게 되었다. 나태하기만 했던 남편과 나는 시골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빈손으로 보증금  30만워에 월 6만 원의 지하 단칸방으로 이사했다. 남편의 월급만으론 생활이 빠듯했던 터라 나는 마늘껍질을 벗기고, 구슬도 꿰고, 바느질도 하면서 10원, 20원 욕심에 밤을 꼬박 새우며 일했다.

 

그러다가 이웃 분의 소개로 음료배달을 하게 되었는데, ’이왕 고생하는 것’ 하는 생각에 이 악물고 새벽 우유배달까지 시작했다.

모두가 잠든 새벽, 졸린 눈을 억지로 치켜뜨고 손수레를 끌며 300여 집의 계단을 오르내리면 숨이 턱까지 차 올랐다.

 

하지만 더 참기 힘든 건 어린 두 아이에게 과자 한 봉지와 변기만 달랑 준비해 주고는 밖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배달하러 나갔다 돌아와 놀다 지쳐 잠든 아이의 모습을 보는 것이었다.

 

그래도 고생한 보람으로 몇 년 뒤에는 전세집도 마련하고 조그만 가게도 얻었다. 그러다 남편의 직장문제로 친정 근처로 이사했다.

어려서부터 새어머니와 정이 없었던 터라 이사한 것이 달갑지는 않았지만, 가까이 지내면서 차츰 새어머니와 정도 들고 근처에 사는 언니 동생들, 형부제부들과 어울리는 것이 그 동안 외롭게 산 우리 가족에게는 기쁨이 되었다.

 

그런데 그 기쁨이 내 삶 전체를 흔들어 놓을 줄이야!

유난히 성격이 좋았던 제부와 허물없이 지낸 걱이 화근이었다. 이사하고 얼마 두였다. 아무 때나 스스럼없이 찾아와 식사도 하고 차도 마시던 제부였기에 그날도 남편의 퇴근 시간 전에 찾아온 제부에게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제부가 느닷없이 내게 달려드는 것이 아닌가. 필사적으로 제부를 막느라 온 힘을 쓰고 있을때 갑자기 남편이 들이닥쳤다. 넋이 나간 채 서있는 남편 앞에 나는 무릅을 꿇고 허점을 보인 내탓이라며 무조건 빌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리 집은 하루아침에 풍비박산나고 말았다.

 

남편은 날마다 술로 지내며 살림을 부수고 내게 더러운 몸이라며 기절해 쓰러질 때까지 나를 때렸다. 그런 남편을 이해하며 모든 고통을 감수했다. 해골처럼 변해 가는 내 얼굴을 보며 별일없이 살고 있는 듯한 제부와 언니들, 새어머니에게 분노를 느끼고 찾아가 분통을 터뜨렸지만 ’네탓도 크지 않느냐, 네 운명이니 참고 살아라’ 라는 말에 더 이상 할말이 없었다.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남편의 폭력과 차라리 죽어 달라는 말에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던 나는 자살을 기도했다.

그날도 남편에게 시달리다 새벽 무렵, 잠든 남편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혼자 내뱉고는 준비해 둔 약을 먹었다.  

한참 통증으로 괴로워하다 어느 순간 몸이 땅으로 꺼져 드는 듯하더니 편안함이 느껴지면서 희미하게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아이들의 울음소리였다.

 

눈을 뜨고 싶었지만 이미 감겨 버린 눈은 움직이지 않았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누군가가 내 손을 주무르고 있는 것 같아 힘겹게 눈을 뜨니 아이들이 보였다. 기뻤다. 아이들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것이. 그리고 감사했다. 나를 세상에 있게 허락한 분께. 그 순간 나는 아직 세상에 남아 어쩌면 나보다 더 아플 남편과 아이들을 보듬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 뒤 언젠가는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작은 기대를 가지고 지금의 이곳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이사하기 전날, 새어머니와 언니들을 찾아가 ’피를 나눈 형제로서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냐고, 내게 고통을 준 제부보다도 더 큰 아픔을 주었다’ 고 미친 드시 펴붓고 돌아섰다. 그런데 이사하고 며칠 뒤, 주소지 정리를 하다 호적을 보게 되었는데 미심쩍은 부분이 있어 혹시나 하며 친척 어른에게 여쭤 보았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동안 피를 나눈 형제로 알고 있던 언니 동생들과는 다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문득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언제나 언니들과 엇갈렸던 기억들...

 

새어머니가 어린 나를 두고 언니들에게 했던 말이 하나둘 떠올랐다. "쟤가 네 어미 잡아먹을 거여, 이 다음엔 나와 제 애비를 잡아먹을 거여." 순간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형제들에게 있어 나는 곱지 않은 동생일 뿐더러 죄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약’ 이란 말처럼 내 상처도 조금씩 아물어 가는 듯하고 형제들이나 새어머니에게 가졌던 배신감과 분노도 서서히 거둘 수  있었다.

언니들과 동생 그리고 새어머니가 내게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남편에겐 더 이상의 아픔을 줄 수 없어 말하지 못한 형제들과 나와의 관계, 무덤까지 가져갈 나의 아픔들...  

이제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무리 큰 시련이 온다 해도 흔들림 없이 힘차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이숙희 (가명)/ 경기도 수원시 세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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