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7일 (일)
(녹) 연중 제14주일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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隔世之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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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식 [bukhansan] 쪽지 캡슐

2017-05-10 ㅣ No.212715

 

                                                                           

 

                                                                                                                                ?

 

 

隔世之感

 

 

물론, 조회 수와 그 글의 가치가 정비례하는 건 아닙니다만 어쨌건 제가 자게에 올린 졸문(2016.12.25 / No.211914 /‘추접스런 중산층화’)의 조회 수와 추천수를 보면서 시쳇말로 참 오래살고 볼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여 년 전부터 교회 여기 저기 쭈뼛거리며 몇 글자 엮어서 올릴라치면 여척 없이 삭제 또 삭제 ... 툭하면 차단... 접근금지...를 당했더랬습니다. 재작년, 작년엔 왠 금고 6개월, 1년을 연달아 감수하고 그렇게 해서 사라져버린 글이 남은 것보다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얼마나 무식하고 무례하고 삐딱했으면 그랬겠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제 글발이야 예나 지금이나 그게 그거고 어쭙잖게 제 관심주제는 평신도의 평신도 이야기 시리즈 등 언제나 평신도위상과 교회쇄신이었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돌팔매를 참 많이 맞았습니다. 제가 교회 봉사를 좀 열심히 했다고 말하면 예수님께서 눈을 흘기시며 에이그 이 칠뜨기 같은 위인아, 누군 너만 못하더냐?...”하시겠지만 반평생 교회 봉사랍시고 얼쩡대던 경험으로 이죽거리는 섣부른 글이었습니다.

 

 

가장 힘들었던 건 쇄신이란 단어의 자만 들어도 귀를 씻으려는 바로 우리 평신도들의 돌팔매였습니다.

때리는 서방보다 말리는 시어머니가 더 밉더라는 속담처럼 글을 지우는 관리자보다 절 배교자, 배신자, 궤변자로 줄줄이 몰아세우는 댓글 의 비아냥거림이 더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샌가 응달이 양달 되듯이 사정이 바뀐 것 같습니다. 이제 교회쇄신에 대한 담론이나 논문이 언론이나 개인이나 간에 격의 없이 소통되고 또 연구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거룩하시고 무죄하시고 죄를 모르시며 다만 백성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오셨지만, 교회는 그 품안에 죄인들을 품고 있으므로 성스러운 동시에 항상 정화되어야 하며 회개와 쇄신을 끊임없이 계속하는 것이다"(교회헌장 8).

 

교회는 이러한 쇄신의 능력을 주님의 약속(마태 28:20)과 성령의 도우심으로(요한 16:13) 이미 갖추고 있다(교회헌장 9). 쇄신의 원리는 더욱 더 복음정신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교회는 신앙의 유산을 거룩히 보존하고 성실히 진술하기 전에 경건하게 들어야 한다(계시헌장 10).

  

 

  

우리 골목에 월세로 여러 가구가 들어 있는 주택이 있는데 다른 동내에 살고 있는 이 집 주인영감이 오토바이에 연모랑 자재를 때려 싣고 하루걸러 들릅니다. 하루는 골목에서 만나 자주 뵙네요. 집에 손볼 게 많으신 가 봅니다.” 하고 인사를 했더니 이내 정색을 하면서 손보기는요. 우리 집은 고칠 게 없어요. 그냥 들러 보는 거예요.”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은 누전이 되고 엊그제는 천정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장마철에 반 지하 방에서는 방바닥에서 물이 나서 아예 방구석에 구덩이를 파놓고 물을 퍼내는데도 말입니다. 달포 전에는 그런 일로 세입자와 대판 욕설을 질러대며 싸우는 소릴 들었는데도 말입니다. 집값이 떨어질 가봐 그러는 건지 단순히 자존심이 상해서 그러는 건지 여하튼 밉지 않은 거짓말을 하는 겁니다.

 

 

예전엔 집안에 장애아가 있으면 남이 알까봐 밖에 데리고 나가기는커녕 쉬쉬하는 집이 많았지요. 요즘은 어떻습니까?

우리 교회도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누가 교회쇄신론 비스무리한 걸 도마 위에 좀 올려놓을라치면 하릴없는 삐딱한 불평분자 취급을 하거나 몹쓸 돌림병이라도 들어온 것처럼 자리를 뜨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이분들은 교리·교의· 교도권 등이 신앙의 대상인 듯 보여 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제도교회의 모순이나 부작용이 아예 지각되지 않거나 교회의 허점이 외부에 들어나는 게 마치 주가를 떨어뜨리게 하는 악재쯤으로 여기는 듯합니다. 치부가 고질이 되도록 돕는 격입니다.

 

 

교리·교의의 변천사를 대충이라도 개관(槪觀)해 보면 공의회는 왜 여는 것이며 시노드는 뭐하는 것인지 모를 리 없을 터인데 제도교회에 대하여 토를 다는 사람이 막무가내 사탄으로 보이고 그 걸 보는 것만으로도 독성죄를 짓고 부정 타는 것처럼 질색을 합니다.

교황님(요한 바오로 2)은 왜 세계만방에 대고 고개 숙여 과거 교회의 잘못을 사죄하셨는지 모를 리 없건마는 열린 지식정보화시대에 아직도 맹신의 끝자락이 남이 있습니다.

 

 

신자는 무릇 교리라는 수례를 타고 하느님께 나아갑니다.

이 수례는 하늘나라 메이커 라벨이 붙은 게 아니라 인간이 만든 것이기에 성령의 도우심을 받았지만 완전하지 못합니다. 쉼 없이 수리를 하고 부품을 교체 해 왔고 앞으로도 고쳐가면서 타고 갈 것입니다. 교리는 신앙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 쇄신론이 햇볕 아래 나오고 자유롭게 거론이 된다고 하여 마냥 기뻐 할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돌멩이를 던지던 신자들이 그 돌멩이를 거둬들인 게 아니라 아예 무관심이 된 건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미사꾼들이 자꾸만 줄고 냉담자들이 자꾸만 느는 판세에 이렇궁 저렇궁 쇄신론을 들춘들 가타부타 참견할 자가 몇이나 있겠는가하는 겁니다.

제사상 진설하는데 홍동백서니 예법을 놓고 옳으니 그르니 티격태격하는 것도 제꾼들이 있어야 생길 수 있는 거니까 말입니다. 옛날 어느 영화에 나오는가장 불쌍한 여인은 잊혀진 여인이다.‘ 라는 대사가 떠오릅니다.

어쨌건, 돌팔매를 맞든 비아냥거리든 따져보면 서로 교회사랑 한마음이었으니 지난날이 그리워집니다.

 

 

언감생심 돌팔이 신학으로 글을 썼습니다. 권위주의의 허구에 대하여, 평신도의 위상에 대하여, 사목회 운영에 관하여....

하여지간 아직도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는 건 교세가 줄어드는 게 그리스도의 진리가 바랬기 때문이 아니라 쇄신이 더딘 탓이라는 겁니다. 지식정보사회에 합당한 열린 신앙으로 나아가면 그동안 방황하던 영혼들이 다시 운집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쇄신에 굼뜬 것이 권위주의의 종교집단이고 보면 급변하는 세상에 점점 더 작아지는 느낌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얼마 전 해외토픽에 프랑스에서는 오랫동안 텅텅 비어 카페로 슈퍼마켓으로 매각되어 나가던 교회에 어느 샌가 신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해서 전국 어딜 가나 미사꾼들이 꽉꽉 들어찬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사실인지 오보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렇게 되리라 믿습니다. 세상이 열 번 바뀐들 어떻게 하느님의 집에 인적이 뜸할 수가 있겠습니까!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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