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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28 ㅣ No.5071

 

 

경신성사성 차관 인터뷰


(2007.2.23, 가톨릭 월드 뉴스-CWNews.com-의 기사(www.cwnews.com/news/viewstory.cfm?recnum=494600)를 번역. 원(原) 기사는 월간 인사이드 더 바티칸-Inside the Vatican-에 게재되었음. 괄호 안의 내용은 역자가 이해의 편의를 위해 삽입한 것임.)


인터뷰 전문(全文) :


교회의 전례에 관심이 있는 모두가 교황이 옛 미사의 거행을 허용하는 자의 교서를 곧 반포할지 여부와 (만일 그렇게 된다면) 그 교서의 세부 내용은 무엇일지에 관해 궁금해 하고 있다. 바티칸의 한 전례학자가 교황의 계획을 밝혀준다.


Athony Valle(로마의 신학자이자 작가. 이하 V) : 대주교님, 대주교님께서는 경신성사성 차관이 되신 이래 전례와 관련하여 외신과 몇 번의 인터뷰를 하셨습니다. 대주교님의 몇 가지 발언은 의도하신 명백함을 제공했다기보다 오히려 오해되고 논쟁을 일으켰습니다. 좀 설명을 해 주시겠습니까?


Albert Malcom Ranjith Patabendige Don 대주교(경신성사성 차관. 이하 A) : 제가 그 인터뷰들을 통해 의도한 바는, 공의회 이후의 전례개혁이, 오늘날을 사는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해 지기 위한 교회의 영성적·선교적 쇄신이라는 목적을 달성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긍정적인 결과도 있습니다. 하지만 부정적 효과가 더 큰 것 같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대열에 많은 혼란을 야기하고 있습니다. 성당들은 비어가고, 전례의 방향 상실은 일상의 규칙이 되어가고 있으며, 미사의 진정한 의미와 중요성은 모호해졌습니다.

  그렇다면, 그 개혁 과정이 실제로 올바르게 진행되었는지 의문을 가지기 시작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이 일어났는지 살펴보고, 기도하고, 그 원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고, 주님의 도우심과 더불어 필요한 정정(訂正)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V :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 트리덴틴 미사의 거행을 자유롭게 하는 자의 교서를 반포하실 것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 사제들이 부당하고 완고한 방해를 받지 않고 트리덴틴 미사를 거행할 수 있도록, 그 자의 교서가 사법기구를 설치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그 방해들은 다른 믿음을 가진 이들이나 세속 권력이 아니라, 아이러니컬하게도 장상과 주교들에게서 올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새 사법기구에 대한 이런 희망은 현실성이 있습니까? 그런 기구가 필요할까요?


A : 트리텐틴 미사의 복구에 대한 요구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들 지도층 몇몇은 최근 신문을 통해 대중적 요구까지 이끌어내고 있는 형편입니다. 교황께서 이 문제에 주목하시고 교회에 최선의 결정을 내리시리라 저는 확신합니다.

  그러한 결정의 이행을 위한 새로운 사법기구의 실현가능성에 대해 말씀하셨는데요, 저는 이것이 그렇게까지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 보다 중요한 것은 사목자의 태도입니다.

  주교들과 사제들이, 트리덴틴 미사에 관한 지시와 권고를 거부함으로써, 교황께서 내리신 결정의 이행을 확실히 하기 위한 사법기구를 창설할 필요성을 만들어낼까요? 그런 식으로 가야 합니까? 저는 그렇게 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사목자들은 다음과 같은 적절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야 합니다. 주교로서 또는 사제로서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에 단 한 명이라도 가까이 데려오기 위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트리덴틴이냐 Novus Ordo(현재 일반적으로 거행되고 있는 바오로 6세 미사를 말함)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단지 사목자의 책임과 감각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트리덴틴 미사가 신자들의 영적 풍요로움을 향상시키는 길이라면, 사목자는 그것을 허용해야 합니다.

  중요한 문제는 무엇이라기보다 어떻게입니다. 교회는, 우리 신자들이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고, 그분의 음성을 느끼며, 그분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하도록 돕기 위해 항상 노력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Novus Ordo 또는 비오 10세 미사의 거행을 통해 성취된다면, 불필요하고 분열을 일으키는 신학적 침소봉대 대신에, 무엇이든 최선의 것을 위한 공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그런 일은 머리가 아닌 마음을 통해 결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1988년의 자의 교서 하느님의 교회(Ecclesia Dei)에서 트리덴틴 미사의 거행이나 참례를 원하는 이들의 문제에 관하여 관대하게 대처할 것을 주교들에게 요청하셨습니다.

  그밖에 우리는 트리덴틴 미사가 르페브르 대주교 추종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가톨릭 교회의 일원으로서 우리 자신이 받은 유산의 일부분입니다.

  베네딕토 교황 성하께서 2005년 12월에 교황청 구성원들에게 명백히 말씀하신 바와 같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완전한 새로운 시작이 아니라, 시대의 요청에 대한 보다 나은 응답인 새로워진 (종교적) 열정·새로운 전망과 함께하는 연속성을 바랐습니다. 

  또한 우리는 서방 세계의 신자수 감소에 대해 심각한 문제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스스로 물어보고 필요한 적절한 단계들을 밟아 나가야 합니다. 저는 이 상황이 단지 세속화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다루고 있는 전례상의) 문제와 큰 관련이 있는, 무의미한 전례실험과 (조잡한) 새로움과 진기함(의 추구)의 흐름이 깊은 신앙의 위기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때때로 형식주의와 무미건조함이 많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거룩함과 신앙의 신비에 대한 진정한 감각을 회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만일 신자들이 트리덴틴 미사가 거룩함과 영성에 있어서 (다른 미사-Novus Ordo) 보다 나은 것을 제공한다고 느낀다면, 우리는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자의 교서의 반포시기와 성격에 관하여, 알려진 바는 없습니다. 교황께서 결정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교황께서 반포하셨을 때,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제시한 바를 완전한 순종으로 받아들여야 하며, 교회를 위한 충실한 사랑으로 그분을 돕고자 힘써야 합니다. 이에 거스르는 행동은 어떤 것이든 교회의 영적 사명을 해치고 주님의 뜻을 방해할 뿐입니다.


V : 오늘날의 많은 가톨릭 신자들처럼, 저희 부부는 주일에 Novus Ordo 미사에서 영성적으로 고무되기보다, 화나고 혼란스러운 상황에 놓이는 느낌을 받곤 합니다. 왜일까요?


A : Novus Ordo 미사의 거행에 있어서 제대 위에서 행하는 일에 대해 진지해져야 합니다. 사제가 내일 미사에서 뭘 할까?를 잠자리에서 꿈꾸고, (이튿날) 제대(祭臺)로 나아가 자신이 만들어 낸 온갖 종류의 전례문과 전례 행위를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거룩한 성체성사는 교회에 속합니다. 따라서 그것은 집전 사제 개인의 개성에 맡길 수 없는, 그 자체의 의미를 가집니다. 교회의 전례가 가지는 모든 요소에는 각기 오랜 발전의 역사와 중요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적 전통의 소산이거나 (사제들이) 저마다 조작할 수 있는 대상이 결코 아닙니다.

  사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다른 그 누구도 비록 사제일지라도 결코 자기 마음대로 전례에 어떤 것을 더하거나 빼거나 바꾸지 못한다.(전례헌장 22항)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좌와 주교들이 개별적으로 한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교회의 어떤 영역의 전례 행위에서 많은 방향 상실이 관찰되는데, 이는 근본적으로 전례신학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서 비롯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거룩한 성체성사의 신비는 모든 종류의 전례의 남용에 문을 열어놓은 채로, 종종 잘못 이해되거나 부분적으로만 이해되어 왔습니다. 거룩한 성체성사의 거행에 있어서 어떤 부분은 사제의 주도적 역할이 지나치게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대 위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하여 사제가 결코 주인공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주인공은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또한 모든 전례의 거행에는 나그네들인 우리가 걸어 나아가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에서 거행되는(전례헌장 8항) 천상 전례의 차원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친교와 관련지으면서 잔치 내지 식사의 차원을 강조하는 방향으로만 성찬례를 설명합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한 사항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친교가 성찬례에 참여하는 사람들에 의한 친교가 아니라, 주님 자신으로부터의 친교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주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것으로 삼으시고, 우리는 그분과 하나가 된 다른 이들과 함께 그분 안에서 친교에 놓입니다. 즉 이는 사회적 경험이 아니라, 신비입니다. 친교의 의미로서도 성찬례는 천상적 경험인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성체성사의 희생적 차원입니다. 성찬례를 거행할 때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구원의 순간으로서 갈보리산의 희생을 재현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사실이 사제의 고유한 품위·위치와 그 정체성의 원천이 됩니다. 사제는 세상의 구원을 위한 갈보리산의 희생을 재현함으로써 부패할 수 있는 빵조각을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몸으로,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피로 바꾸는 놀라운 신비를 거행하도록 그리스도께서 임명하신 사람입니다. 그리고 성찬례를 거행할 때마다 사제는 이를 잘 수행하고, 이해하며, 믿어야 합니다. 사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미사의 희생적·구원적 효과를 강조합니다. 즉 사제는 성찬례 거행에 있어서 그리스도가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막중한 소명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성찬례를 경건하게 거행하면, 신자들은 헤아릴 수 없는 영적 선익을 받고, 천상 양식을 찾아 계속하여 (성체성사로) 돌아올 것입니다.


V : 어떤 이들은, 오늘날 가톨릭 교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전례의 위기 -그리고 기저의 신앙의 위기- 의 해결책으로서 트리덴틴 미사의 배타적인 사용을 실시할 것을 주장합니다. 한편 다른 이들은,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개혁을 개혁하는 것 다시 말해 Novus Ordo의 개혁이라고 주장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A : 양자택일적 태도는 불필요하게 교회를 갈라놓을 것입니다. 사랑과 사목적 고려가 동인(動因)이 되어야 합니다. 교황께서 원하시면 양자의 공존은 가능합니다. 그것(트리덴틴 미사의 복구)은 우리가 Novus Ordo를 포기해야 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 로마 전통의 상호작용을 통해 하나가 다른 편에 결과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이로써) 모든 것이 완성되었다거나 끝났다거나 새로운 일이 일어날 수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사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전례의 급작스런 변화를 결코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공의회는 기존 형식들에서 유기적으로 발전하는(전례헌장 23항) 변화를 선호했습니다.

  공의회 이후 전례문 개정을 담당한 위원회에서 매우 존경받는 일원이었던, 안토넬리 추기경 같은 분은, 공의회 이후의 몇 가지 전례상의 변화는 충분한 성찰 없이 우연히(함부로) 도입되었으며, 이후에 시행되게 되었다.고 일기에 적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손 영성체는 성좌가 그것을 수용하기 전에 (우선적으로) 적절히 연구하고 심사숙고했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우연한 기회에 북유럽의 몇 나라에 도입되었고 나중에 가서야 시행되었는데, 결국에는 많은 나라에 펴졌습니다. 오늘날에 보기에 그것은 피해야 했던 상황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전례개혁에 대한 그러한 접근을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V : Lex orandi, lex credendi, lex vivendi. (기도의 법은 믿음의 법이며 생활의 법이다.) 우리의 예배 방식·기도 방식이 우리의 믿음에 영향을 미치고,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진실일까요? 다시 말해, 전례가 우리의 도덕적 삶에 궁극적으로 영향을 미칠까요?


A : 그럼요. 신자들이 하느님의 영광을 접하고 깊은 영감을 얻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들로 하여금 윤리적·도덕적 선택의 기로에서 희생을 하도록 납득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특히 그러한 일은 인간의 영혼이 하느님의 구원의 영광을 가장 친밀하게 경험하게 되는 예배의 순간에 일어납니다. 예배에서, 신앙의 내면화가 이루어지고 영감과 굳건함이 흘러넘치게 되며, 그 결과 사람은 신앙과 조화를 이루는 도덕적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전례에서, 우리의 마음에 하느님께서 가까이 오심을 강렬하게 느껴야 하며, 그럼으로써 우리는 이제 열렬하게 믿기 시작하게 되고, 옳은 행동을 하도록 요구받게 됩니다.


V : 교정이 필요한 이 시대의 전례적 경향과 문제점은 무엇인지요?


A : (먼저) 몇 나라에서 주일 미사 대신 에큐메니컬 전례에 가는 경향을 들겠습니다. 그러한 전례 행위에서는, 가톨릭 평신도들과 프로테스탄트 목사들이 함께 전례를 거행하고 목사가 설교를 하도록 초대됩니다. 거룩한 성찬례와 분리된 주일의 말씀의 전례는, 사제가 없는 경우에 허용되는 것인데, 만일 이것이 에큐메니컬 행사화(化) 된다면 신자들에게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습니다. 성체성사 없는 주일이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성체성사는 교회를 만들며, 우리 가톨릭 신자들에게 핵심입니다. 그것이 쉽게 말씀의 전례로 대체되거나 소위 에큐메니컬 기도모임에 의해 (상황이) 악화된다면, 가톨릭 교회의 정체성은 물음표 속에 남게 될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프로테스탄트 목사에 의해 다양하게 변형된 모습으로 성찬례가 거행된다는 사례들도 접하고 있습니다. 이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으며, 죽음의 위협을 만들어 내는 행위입니다.

  에큐메니즘은 개별 성직자가 그때그때 (제멋대로) 선택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지지하는 진정한 에큐메니즘이란, 교회의 중심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진정한 에큐메니즘으로 향한 길은, 그러한 종류의 논의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간주되는 이들이 누구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려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컨대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한 주교회의와 교황 성하 자신 같은 경우가 그러한 이에 해당합니다. 일치를 위한 복잡·미묘한 연구와 탐색을 어떠한 방식으로 파악하여야 하는지를 알 만한 능력과 자격이 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것은) 많은 성찰과 기도가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에큐메니즘이란 미명하에 전례에 새로움과 진기함을 넣으려는 시도가 개별적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 확산되고 있는 경향은, 평신도가 주재하는 유사 전례적 모임이 사제가 거행하는 미사를 점점 대체하는 것입니다. 이는 물론, 사제가 미사를 거행할 수 없고 주일의 의무를 이행하기 위한 물적 조건이 미비한 경우라면 합법적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외이지, 원칙이 아닙니다. 위험한 일은, 사제를 과소평가하여 사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신도 사도직 지도자들이 사제에게 유보된 사항들에까지 월권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사제가 있는데도 평신도 지도자가 사제를 대신하여 강론을 하고, 사제는 제대 쪽에 한가하게 남겨 놓고 평신도가 성체를 분배하는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신자들의 보편 사제직과 성품사제직이 정도(위계)만이 아니라 본질에서 다르다.(교회헌장 10항)고 확언하고 있음을 강조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제의 성스러운 의무를 평신도에게 넘기는 것은 중대한 (전례의) 남용이라 하겠습니다. 불행하게도 사제가 평신도가 되고 평신도가 성직자가 되는(성직자와 평신도의 역할 구분이 모호해지는) 경향이 전세계적으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 또한 공의회 정신에 반하는 것입니다.

  주일미사를 토요일로 바꾸는 것이 거의 정상적인 행태가 되어가는 경향도 증가일로에 있습니다. 일요일을 진정한 주일로서, 영적·육체적 휴식을 취하는 날로 보기보다는 그 중요성을 감소시켜 전세계적인 오락의 날이 되게 하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교황 교서 주님의 날에서 이러한 경향에 대해 경고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짚고 넘어가고 싶은 점은, 예를 들어 아시아와 같은 선교 지역에, 변화라는 이름하에 그들의 문화적 전통에 반함에도 불구하고 도입된 행위들입니다. 몇몇 아시아 국가들에서, 서서 손으로 영성체를 하는 경향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아시아의 문화에 전혀 합치하지 않습니다. 불교 신자들은 바닥에 손을 대고 엎드린 자세로 예배 행위를 합니다. 무슬림들은 예배를 위해 모스크에 가기 전에 신을 벗고 발을 씻습니다. 힌두교 신자들은 순종과 공손함의 표시로 가슴을 드러내고 사원에 들어갑니다. 태국이나 일본의 국왕에게 나아갈 때 (사람들은) 존경의 표시로 무릎을 꿇습니다. 그러나 많은 아시아 국가에서 교회는, 성체를 향하여 무릎을 꿇는 대신에 단순히 허리를 굽혀 절하는 것과 서서 손으로 성체를 영하는 것을 도입했을 따름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이 아시아 문화에 대한 적응이라고 볼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러한 결정을 내릴 때, 오늘날 교회에서 그 역할이 향상된 평신도들의 의견은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모든 상황은 교회를 위해 좋지 않으며, 우리는 이러한 경향을 정정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정정을 통해 이러한 상황이 극복된다면,)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께서 단언하신 대로, 우리가 거행하는 성체성사는 “영원한 생명의 약이요, 죽음의 해독제”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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