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7일 (일)
(녹) 연중 제14주일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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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롱, 거진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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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훈 [johnnara] 쪽지 캡슐

2013-07-30 ㅣ No.11296

어제 저녁 늦게 두 아들, 세 집 식구들이 우리집 거실에 한데 모였다. 모처럼 만난 아이들 셋은 신이 났다. 이 학년짜리 오라비들은 티비 모니터로 오목을 둘 때도 그러더니, "오빠들, 나도 좀 같이 하자, 응?" 하고 아무리 보채고 졸라대도 '연관 낱말 잇기 놀이'에서도 역시 두 살 아래 여동생을 끼워 주지 않았다. 노는 레벨 차가 있는 걸 어쩌랴!

기미를 파악한 글라라 공주가 혼자 하는 새로운 놀이를 준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메모지 철에서 빈 메모지를 몇 장 꺼내서는 다른 사람이 볼 수 없도록 팔을 웅크려 가리더니 군청색 색연필로 거기에다 뭔가를 쓰고 그리는 듯했다. 그런 모습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안나가 소리 없이 웃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이것 좀 알아 맞혀 봐요!" 하면서 공주가 내민 메모지 카-드엔 '대박'이라고 쓰여 있었다. 도대체 뭐가 대박이라는 것일지 궁금했는데, "이 카-드 뒤에다 그림들을 그려 놨는데, 무슨 그림인지를 알아맞히는 놀이에요!" 그러니까, 이를테면 '그림카-드 놀이'였던 것이다. 안나가 잘 모르겠다는 듯 눈을 치켜 뜨며 "뭘~까?" 하더니 "공주님, 힌트를 좀 줘 보세요!" 하자,

"네, 그럼 힌트를 드리겠습니다! 이건 아주 커다랗고, 힘도 세고, 털도 많~지요... 아니, 내가 힌트를 너무 많이 드렸나? 아무튼 알아맞혀 보세요!" 안나가 물었다. "그럼, 그게 사나운 들짐승인가요, 아니면 순한 애완동물인가요?" 공주가 대답했다. "사납기도 하고, 순하기도 하지요!" 안나가 헷갈려 하더니, 이내 답했다. "알았어요, 그건 그러니까... 그게 침팬진가 봐요!"

회심의 미소를 띤 공주의 고사리 손이 'X'자를 만들며, "땡! 틀렸습니다. 이건 겨울잠도 잔다구요, 이젠 아시겠어요?" 안나가 나에게 눈짓하며 "이번엔 요한 할아버지가 맞힐 차례입니다. 히말타구 할아버지, 저건 뭔가요?" 내가 미간을 좁히고 사뭇 어렵다는 표정을 지으며, "몸이 작은 잠자리나 나비는 졸때 아니고...겨울잠은 자지만 털이 없어서 비암도 아닐 테고, 그럼 답은 오직 하나, '곰'이로군요, 곰!" 겸연쩍게 웃던 공주가 뒷그림을 보여 주더니, 두 팔로 'O'자를 만들며 "딩동댕! 대~박!, 잘 맞히셨습니다!" 하였다.

"자, 그럼 이건 무얼까요?" 하고 신나 하며 내민 공주의 메모 카-드엔 '헐'이라고 한 글자만 쓰여 있었다. 이번엔 내가 나섰다. "예쁘고 친절하신 공주님, 사랑의 힌트를 하나만요!" 드뎌 공주가 힌트를 하사하시었다! "음, 꼬리가 있는데요, 눈은 똥그랗고...더운 나라에 많이 있답니다!" 대략 감이 왔으나 짐짓 모른 체하며 딴전을 피울까 하다가 그냥 바로 갔다.

"걔네는 '버내너'를 좋아할 수도..." 공주가 얼른 내 말을 짜르며, "아차! 제 힌트가 너무 셋나 봐요!" 하길래, 한 바퀴 슬쩍 돌렸다. "아~뇨! 너~무 어려운데요,.. 그리고 참, 안나 할머니가 맞힐 순서가 됐군요, 그럼, 이 문제는 뚱보 할머니가 맞혀 주세요!" 안나가 나섰다. "날씬하지는 않지만,그렇다고 육십 키로이상 그렇게 뚱뚱하지도 않은 안나 할머니가 맞히겠습니다. 조게, 오랑우탄일까나~? 아니, 그건 아니~죠! 엉덩이가 빠알간 몽키, 원숭이지요!" 낙담하는 표정을 짓던 공주가 아까랑 같은 동작으로 "허~ㄹ, 딩동, 댕동! '올라~잇!" 하며 요즘 나오는 악동 뮤지션의 시엠송 흉내를 냈다.

뒤를 이어서 나온 '메롱' 글자 카-드엔 다람쥐가, '거짓말'이란 글자 카-드엔 여우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렇게 재밌던 놀이를 다 끝내고 나서 공주가 건네 준 카-드를 받아 자세히 봤더니, 카-드 글자가 '메롱' 대신 '매롱'이, '거짓말'이 아닌 '거진말'이 적혀 있는 게 아닌가! 빵 학년, 공주 마마의 한글 맞춤법이 아직은 '매롱'이랑 '거진말'인 것을... 공주 몰래 입을 가리고 눈으로 웃던 안나가 날 쳐다보길래 요때다 싶어서 질렀다. "자, 뚱보가 아니라시던 우리 안나 할머니가 몸무게를 직접 달아서 보여 주신다네요. 그럼, 안나 할머니, 달~아 주세요!"

안나가 꽁무니를 빼자, 지들 엄마를 볼 때마다 '육 개월 동안 십일 키로 감량에 성공한 아빠처럼 해 보라'며 다이어트를 권해오던 아들 녀석들이 또 등을 떠밀었다. 마지못해 하던 안나가 마침내 디지털 저울 위로 결코 가벼울 리 없을 몸을 실었다. 기계는 정직하였다. '육십삼'이었다. 드디어 거실엔 엄마의 다이어트를 집요하게 재촉하는 형제 녀석들의 합동 구호가 힘차게 터져 나왔다."매~롱, 거~진~말!! 매~롱, 거~진~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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