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7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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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보나롤라와 마르틴 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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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경 [kreuz] 쪽지 캡슐

2002-04-28 ㅣ No.32482

 

두 사람의 종교개혁가가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하느님을 열렬히 사랑하던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를 더 낫게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살았습니다.

한 사람은 교회 안에 머물러 개혁을 외치다 화형에 처해졌고,

다른 한 사람은 교회를 떠나서 새로운 종교를 만들어버렸습니다.

 

예수님 시절에, 하느님에 대한 열렬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종교적 열정이 하도 넘쳐서

그들은 삶의 모든 부분을 완벽하게 통제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교회에서 죄인들을 쫓아내고, 완벽하고 순결한 교회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못박았습니다.

 

교회 해체론과 교회를 위한 냉담론을 읽었습니다.

매우 뛰어난 신학지식과 오랜 가톨릭교회 경험이 없이는 나올 수 없는 글이라고 봅니다.

즉, 다른 이들보다 신학적으로 혜택도 받고,

핍박 없이 편안하게 가톨릭신자로 살아온 사람이 아니라면 쓸 수 없는 글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심하게 말하자면, 누릴 것 다 누리며, 배부른 데서 나오는 소리라고까지 하고 싶어집니다.

 

교회를 사랑하기에 교회를 없애버리라고 하고,

교회를 사랑하기에 구성원들이 떠나야 한다고 말하는 글을 읽고

감동하시는 분들은 도대체 어느 대목에서 감동하셨는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만,

그것은 제 두뇌에 문제가 있어서 이해력이 그분들보다

만분의 일로 떨어진 탓이라고 넘기겠습니다... 제 탓이요.. 제 탓이요...Mea Maxima Culpa.....

 

그러나,

카타리나 성녀를 비롯한 수많은 개혁 성향의 성인 성녀들은

결코 교회를 떠나신 적이 없다는 것만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많은 순교 성인 성녀들, 우리의 신앙의 선배님들께서

그토록 한 사람이 가볍게 쓴 글로 해체되어야 한다고 난도질 당할 교회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고, 피를 뿌렸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는 말씀만 드리고 싶습니다.

 

어렵게 가톨릭신자가 되어본 사람,

미사 한 번 참석하기 위해 가슴을 졸이고 핑계를 대야 하는 사람들은 아마 제 말을 이해할 겁니다.

 

끝으로,

제가 존경하는 성인 중 한 분의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

그분 역시 교회가 최상의 권력층에 올라 최고로 부패하고 악해졌을 때

소리없이 한 시골에서부터 교회를 정화한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교회를 해체해야 한다거나 교회를 이루는 사람들이 떠나야 한다는

말로 교회를 정화하겠다고는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 성인은,

개혁되어야 하는 모습 그대로 스스로가 살아내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덕분으로, 교회는 다시 세상 낮은 곳으로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교회는 말로는 깨끗해지지 않습니다.

말로는 세상 아래로 내려오지 않을 겁니다.

 

금구요한님이나 스테파니아, 서유경님 같은 분들이

스스로 프란치스코 성인의 본을 받아

정화하고 싶은 교회의 모습대로 살아내면,

교회는 그렇게 될 겁니다.

 

사보나롤라는 교회 안에서 교회를 지켰고,

마르틴 루터는 교회 밖으로 나가 교회를 산산조각내며 수많은 분파로 나누어진 개신교를 만들어냈습니다.

 

.....

 

 

사보나롤라 [Savonarola, Girolamo, 1452.9.21 ~ 1498.5.23]

 

이탈리아의 도미니크회(會)의 수도사 ·종교개혁가.

 

국적 : 이탈리아

활동분야 : 종교

출생지 : 북이탈리아 페라라

주요저서 : 《십자가의 승리》

 

북이탈리아 페라라 출생. 도미니크회 수도원에 들어가 공부하고, 1491년 피렌체의 성마르코수도원장이 되어, 교회혁신을 위한 설교와 예언자적 언사로써 신도들을 지도하여, 시민의 정신적 지도자와 같은 지위에 올랐다. ‘하느님의 노여움’이라고 그가 예언한 1494년 프랑스 국왕 샤를 8세의 프랑스군의 이탈리아 원정은, 이탈리아인들에게는 신벌(神罰)로 받아들여졌으므로, 프랑스인들은 이와 결탁하여 민주정치와 신재정치(神裁政治)를 혼합한 헌법으로 피렌체를 통치하려고 하였다.

교회 내부개혁에는 많은 사람이 동조하였으나, 1497년의 사육제(謝肉祭)에서는 시민의 사치품과 이교도적 미술품 및 서적을 불태운 이른바 ‘허영의 소각’을 비롯한 과격한 방법을 취함으로써 크게 반감을 샀다. 프랑스군이 철수한 뒤, 반대세력이 우세해지고 교황 알렉산드르 6세와의 불화, 프란체스코회와의 대립 등으로 지지 기반을 잃어 다른 2명의 도미니크회 성직자와 함께 화형(火刑)에 처해졌다. 주요 저서에 《십자가의 승리 Triumphus crucis, ‘Compendium revelationum’》 등이 있다.

 

루터 [Luther, Martin, 1483.11.10 ~ 1546.2.18]

 

독일의 종교개혁자·신학자.

 

국적 : 독일

활동분야 : 종교

출생지 : 독일 작센안할트주 아이슬레벤

주요저서 :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1520) 《로마서 강의》(1515∼1516)

 

1483년 11월 10일 작센안할트주 아이슬레벤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만스펠트로 이주하여 광부로 일하다가 광산업을 경영, 성공하여 중세 말에 한창 득세하던 시민계급의 한 사람이다. 그는 엄격한 가톨릭신앙의 소유자였고 자식의 교육에도 관심을 가졌다. 마르틴은 1501년 에르푸르트대학교에 입학, 1505년 일반 교양과정을 마치고 법률공부를 시작하였는데, 자신의 삶과 구원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무렵 도보여행 중 낙뢰(落雷)를 만났을 때 함께 가던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그 해 7월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학업을 중단, 에르푸르트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들어갔다. 계율에 따라 수도생활을 하며 1507년 사제(司祭)가 되고, 오컴주의 신학교육을 받아 수도회와 대학에서 중책을 맡게 되었다. 1511년 비텐베르크대학교로 옮겨, 1512년 신학박사가 되고 1513년부터 성서학 강의를 시작하였다.

그는 이때, 하느님은 인간에게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에게 접근하고 은혜를 베풀어 구원하는 신임을 재발견하였다. 이 결과가 당시 교회의 관습이 되어 있던 면죄부(免罪符) 판매에 대한 비판으로 1517년 ‘95개조 논제’가 나왔는데, 이것이 큰 파문을 일으켜 마침내 종교개혁의 발단이 되었다. 그는 교황으로부터 파문칙령(破門勅令)을 받았으나 불태워 버렸다.

1521년에는 신성로마제국 의회에 환문되어 그의 주장을 취소할 것을 강요당했으나 이를 거부, 제국에서 추방되는 처분을 받았다. 그로부터 9개월 동안 작센 선제후(選帝侯)의 비호 아래 바르트부르크성(城)에서 숨어 지내면서 신약성서의 독일어 번역을 완성하였다. 이것이 독일어 통일에 크게 공헌하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비텐베르크로 돌아와서는 새로운 교회 형성에 힘썼는데, 처음에는 멸시의 뜻으로 불리던 호칭이 마침내 통칭이 되어 ‘루터파 교회’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에서 파생된 과격파나 농민의 운동, 농민전쟁에 대해서는 성서 신앙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이들과는 분명한 구분을 지었다. 그 뒤 만년에 이르기까지 가톨릭 교회와 종교개혁 좌파 사이에서 이들과 논쟁 ·대결하면서, 성서강의·설교·저작·성서번역 등에 헌신함으로써 종교개혁 운동을 추진하였는데, 영주(領主)들간의 분쟁 조정을 위하여 고향인 아이슬레벤에 갔다가, 병을 얻어 그곳에서 죽었다.

그의 업적은 대부분 문서 형태로 남아 있어, 원문의 큰 책이 100권(바이마르판 루터전집)에 이른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1520)는 《로마서 강의》(1515∼1516)와 함께 초기의 신학사상을 잘 나타내고 있는데, 루터는 상황 속에서 자기를 형성하고 발언하는 신학자였기 때문에, 만년에 이르기까지의 많은 저서와 강의를 통하여 그의 사상을 남김없이 토로하였다.

그는 신학의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신의 철저한 은혜와 사랑에 두고, 인간은 이에 신앙으로써 응답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하느님께 반항하고 자기를 추구하는 죄인이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자유로운 군주’이면서 ‘섬기는 종’이 되는 것이며, 신앙의 응답을 통하여 자유로운 봉사, 이 세계와의 관계가 생겨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런 면에서는 특히 모든 직업을 신의 소명(召命)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한 것이, 그 이후의 직업관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더욱이 이러한 견해는 성서에만 그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실천한 것도 중요한데, 1525년 카타리나와 결혼한 것도 이같은 실천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 당시의 정치적·사회적 정세 속에서 이러한 신앙적 주장을 관철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인데, 칼뱅이나 다른 종교개혁자와 함께 종교개혁을 르네상스와 함께 근세에의 전환점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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