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7일 (일)
(녹) 연중 제14주일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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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편지]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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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황묵 [khm] 쪽지 캡슐

1998-11-11 ㅣ No.209

김황묵의 글쓰기 양식[FORM]

 

 

 꽃

 

제가 고 3 때의 일입니다. 담임이 국어 선생님이었는데, 우리에게 늘 곱고 아름다운 말 쓰기를 강조하셨습니다.

 

"우리 여학생들은 항상 아름다운 말만 써야 되겠어요... 욕은 물론이고 천한 말, 더러운 말도 절대 쓰지 말도록 합시다. 특히 여러분 화장실서 볼 수 있는 그.. 한 글자로 된....그거 있죠? 그걸 우리 예쁜 여학생들이 아주 거리낌없이 말하고 다녀서야 되겠어요? 이제부터는 그런 말 절대 쓰지 말고 대신 '꽃'이라 부르기로 합시다."

 

선생님은 정말 진지하셨고, 이것을 매일 반복 가르침으로써 우리를 세뇌 시키셨습니다. 그래서 화장실에 가는 것을 '꽃을 꺾으러 간다'라고 표현했고, 응아말고 쉬는 '작은 꽃'이라고 부르기도 했지요...

 

선생님의 세뇌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성공을 거두어 우리는 입에 완전히 익숙하게 되었답니다. 예를 들어, 수다 떨다 한 친구가 갑자기 일어나 나가려 하면,

 

"너 얘기하다 말고 어디가?"

"어... 저.. 장미꽃 한 송이만 빨리 꺾고 오려고......"

또 친구하나가 보이지 않다가 보이길래

"너 어디 갔다 오니?"

"어.. 민들레를 다발로 꺾다 보니 그렇게 됐어......"

 

 

이 꽃이란 말이 정말 좋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을 날이 있었는데요. 저희 학교는 월요일 애국조회를 했는데, 교장선생님이 마이크를 잡으면 보통 한시간... 그 시간을 운동장에서 열중쉬어 자세로 서 있는 우리에겐 큰 곤욕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몰래 빠져나가 다른 곳에서 놀다가 조회가 끝날 때쯤 눈치껏 교실로 들어오곤 했던 학생들이 종종 있었지요.

 

그 사건이 있었던 그날. 그날도 어김없이 애국조회 때문에 운동장으로 나가야 했는데, 그 날은 한두 명이 아닌 열 댓 명이 빠져나갔습니다. 어떤 아이는 친구생일이라고 꽃을 사러 교문 밖으로 나가는 거사를 감행했습니다.

 

그런데 일이 생기려고 그랬는지 그날 따라 애국조회는 20분 만에 끝나버렸습니다. 교실로 왔을 때 선생님은 상황을 눈치 채고 너무 화가 나셔서 수업은커녕 말씀도 제대로 못하시고 커다란 몽둥이를 들고 숨만 씩씩- 쉬며 교실 뒷문만 노려보고 계셨지요...

 

뒤늦게 하나 둘 들어오는 아이들에게 선생님은 화난 목소리로,

"뭐야! 뭐하고 이제와!"

그리곤 퍽-퍽!...

그리고 몇분 뒤 들어온 아이들에게도

"뭐야! 뭐하고 이제와!!"

퍽-퍽!

이렇게 연이어 숨막히는 분위기는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1시간을 꽉 채우고 제일 늦게 들어오는 아이가 있었으니, 그 아이는 바로 꽃 사러 갔던 아이였습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꽃 사러 갔다가 꽃은 못 사고 이가게 저가게 돌아만 다니다가 왔다고 하더군요.

 

선생님은 정말 폭발할 듯한 무서운 얼굴로,

"너 뭐야??? 왜 지금 와???"

그 아이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습니다.

"저..... 꼬....꼬....꽃 사러요"

"뭐? 꽃 싸러? ...... 그래? 흠..... 그건 생리현상 이니까 어쩔 수 없지...."

'꽃 사러'를 '꽃 싸러'로 들으신 선생님은 그 아이가 변비라고 생각했는지 한 대도 때리지 않고 그냥 들여보내셨습니다.

 

이만하면 꽃이란 말이 정말 좋은 말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좋은 점도 많았지만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뭐냐 면요, 국어책에는 유난히 '꽃'이란 말이 많이도 나온다는 겁니다.

 

김춘수의 "꽃"이란 시에는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너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우리는 모두 대절복통하며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꽃이 되었대...꽃이....우하하하하"

 

 

또,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나도 그에게로 가서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는 또 한번 폭소를 터뜨리며,

"야, 꽃이 되고 싶대- 꽃이- 푸하하하~~ 왜 하필 꽃이 되고 싶었을까?"

 

우리는 서로를 붙잡고 웃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시인은 생각나지 않지만 "절정" 이란 시는 더했습니다.

"꽃이 피네. 한 잎 한 잎..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

 

이렇게 시작하는 시인데 우리는 하나같이 무슨 장면을 생각하는지 다들 까르르 깔깔 푸하하 하면서 책상을 쳐대는 것이었습니다.

 

"아- 바로 그 장면이구나, 그 장면"

게다가 그 시의 끝은 이렇게 끝납니다.

 

"....마지막 떨구는 고비"

그럼 우리는 손에 힘을 주면서,

 

"그래 떨궈야지! 떨궈야 해! 힘줘. 힘줘.... 어떻게 이렇게 얘기가 딱 맞냐?"

우리는 너무 웃은 나머지 어떤 아이는 책상 밑으로 굴러 떨어지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선생님은,

"얘들 아! 시를 진지하게 읽어야지... 이렇게 아름다운 시를 읽으면서 웃으면 어떡하니? 그렇게 받아들이면 안되지! 얘들 아.... 얘들 아...."

하시면서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특히 '상춘곡'이라는 옛 수필의 내용에는

'봄이 되어 들판에 나오니 이쪽에는 무슨 꽃, 저쪽에는 무슨 꽃, 여기는 무슨 꽃이 한 송이, 저기는 무슨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고.... 꽃이 핀 길을 걸어가니 꽃 향기가 어쩌구 저쩌구.... 정신이 몽롱해지고 어쩌구 저쩌구....'

 

온통 이런 내용으로만 몇 장 가득이었답니다. 우리는 이 글을 읽으면서 지은이가 공중화장실서 쓴 글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답니다.

 

'꽃'이라고 부르는 그 버릇이 스물 여덟인 지금까지 남아있는 걸 보면 그 선생님은 예쁜 언어습관에 정말 큰 공을 세우신 것 같지요?

 

서울시 강남구 일원동 이애란 올림

 

--- 정이 넘쳐 흐르는 굿뉴스를 꿈꾸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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