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6일 (토)
(녹)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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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st life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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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식 [goodactor] 쪽지 캡슐

2023-09-07 ㅣ No.229028

사람에게 자기 삶을 잃어버리는 일보다 더 비참한 일은 아마도 없을 겁니다

그것은 결코 희망적이지도 않을테니 말입니다
보다 분명하게는 하느님께서 뜻하신 자기 삶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그만큼 더욱 치명적인 일이 될 겁니다
그렇게 삶에 대한 이해는 어떻게 분별하고 판단되어질 수 있는 걸까요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어느 지점에서  그런 생각이 들 만큼 삶은 그 바닥을 치고 그 나락에 떨어지는 것일까요
과연 사람이 자기 자신의 삶을 그렇게 판단할 수는 있는 것을까요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뜻하신 삶은 인간생명의 창조에서부터, 곧 존재의 시작부터 이미 있었을 겁니다
문제는 사람이 자기 지성을 지니고 살도록(그렇게 자기지성을 사람에게 부여해 준) 해 주었는데 사람이 얼마만큼 자기 지성으로 자기 삶을 완전하고 충분하게 살 수 있는가, 있을까에 있고 그것은 모든 이의 삶에서 역력히 드러나는 실제 삶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성경을 통해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시는데 그것은 사람이 자기 지성을 가지고 알아 들을 수 있고 알아 볼 수 있도록 사람들의 삶과 세상의 역사도 함께 이야기됩니다
그렇게 사람이 자기 삶을 살아가는 문제는 하느님이 자신의 뜻대로, 자신의 마음대로 사람들을 꼭두각시처럼 움직이거나 노예처럼 부리거나 허수아비처럼 이 세상 속에 세워 두고 그냥 하느님이 하고싶은 대로 그렇게 사람을 만들고 사람의 삶이라는 것을 이루어 내는 일이 아닌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성경은 그러한 진실과 사실을 충분히 증언하고 증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가리옷 유다에게 이런 말씀을 합니다
'너는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었다'
분명 감정이 실리고 의식이 뚜렷하게 담긴 말입니다
이런 류의 말은 욥이 자기자신의 삶을 절망적으로 바라보는 가운데에서도 나온 말과도 유사합니다
자기를 낳은 어머니에게 뭐하러 낳았냐고 하는 그런 존재에 대한 부정이라기보다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괴로움과 고통과 서러움과 억울함과 아픔과 슬픔, 온갖 부정적 이데아와 페르조나가 의식과 정서에 일시에 뭉쳐 토로된 말과도 같이 여겨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가리옷 유다에게 한 말도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이라고 보여지기보다 가리옷 유다가 존재하고 있는 현재, 현시점, 그 현실에서 가리옷 유다가 보여준 자기 행태와 그런 사실들을 깊이 직관하며 해 준 말과도 같이 여겨집니다
너란 존재는 없어야 돼, 너는 있을 이유도, 곧 존재의 이유도, 존재할 필요도 없어 라고 하는 말이 결코 아니라는 것, 상대를 뿌리부터 부정하고 그 부정에 온갖 혐오와 멸시와 모욕과 경멸의 의식과 정서가 깃들어 있거나 그런 감정이 실리지 않았다는 것, 오히려 직관에 따른 진실된 통찰과 이해가 담겨 있다는 것이 사실에 가까울 겁니다
이처럼 사람이 자기 삶을 산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것, 문제가 있다는 것은 사람들의 삶과 함께 하는 문명의 모든 것을 보아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사람들과 어째서 함께 해야 하는지는, 최소한 필요라도 있어서 그렇다는 것이 그렇게 이해될 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자기 삶이 문제시되지 않고, 자기 삶을 문제시하지 않고 살 날이 언제쯤 오게 될 지는 몰라도 아마도 영원한 생명을 얻고 하느님 나라를 살기 전까지는 이 세상 속에서는 언제나 그렇지 않을까도 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삶의 문제, 삶에 대한 문제 가운데에서도 사람이 자기 삶을 잃어 버릴 정도의 현재 상태와 현실, 그런 삶의 현상들은 심각하다고 할 수 있는 일들입니다
그렇게 잃어 버린 삶은 다시 찾아야 할 일들로, 그런 희망이 있다면, 그 삶을 바라보는, 바라보아야 되는 인간지성의 개화와 이해를 또한 필요로 합니다
하느님이 살아 계시는 한, 언제나 사람 스스로가 끝낼 수 있는 것도, 끝을 낼 수 있는 일도 없습니다
언제나 희망은 영원합니다
구약의 요셉의 삶에도 그 삶의 과정속에서 절망스러울 정도로 악이 그 악화의 사실로 다가와 그 삶의 현재를 요셉에게 만들어 놓은 시점들이 있었습니다
요셉의 입장에서만 보자면 아버지 야곱과 형제들과의 삶은 요셉이 자기 삶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든 모르든 현실 속에서 요셉에게 자기 삶을 살도록, 자기 삶을 살 수 있도록 해 주는 인격적이고 공식적인 관계성과 공동체성을 분명하게 구체화시켜 주는 삶의 터전이며 배경이며 든든한 울타리가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요셉에게 그런 삶의 거의 전부와 전체성을 서포터해주는 삶의 사실들이 부수어지고 사라진다면 요셉의 입장에서 그런 모든 것을 잃어 버린다면 요셉에게는 자기 삶을 어떻게, 어떤 의식과 감정 상태에서 그 삶의 국면을 살아 가야 할 지가 그러한 상실과 동시에 남게 됩니다
절망스러울 수도 있고 막막할 수도 있으며 참으로 괴롭고 고통스러우며 억울하고 참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일들은 단지 사람이 자기 의식과 감정으로 극복해 내야 할 일들로만 남지 않습니다
삶에 심각한 데미지와 타격을 입히고 그 상처는 깊은 골의 트라우마로 남게 될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무엇보다 자기와 같은 피붙이들인, 형제들로부터 그런 일을 당하고 그런 악을 겪게 되면 사람의 정신이 온전하게 남아 있을지도 문제입니다
그러나 요셉에게는 깊은 신앙이 있고 바람직한 인간성이 있었습니다

결코 악에 함몰당하거나 굴복당하는 일은 요셉에게 일어나지 않았고 일어날 수도 없었으며 그렇게 요셉은 자기 자신도, 자기 목숨도 잃어 버리지 않았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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