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6일 (토)
(녹)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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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식 [goodactor] 쪽지 캡슐

2023-08-31 ㅣ No.228949

 사람들은 조금씩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회심과 회개와 같은 급반경을 트는 삶의 전환점이 있어도 그것을 생활에서 삶의 싦천으로 옮기는 경우는 성인들에 한해 그 변화가 뚜렷이, 역력히 보일 뿐이다
그런 자신의 삶이나 나아가 세상 모든 일에 있어서도 중요하고 중대한 순간이, 일생일대의 기회처럼 은총과 자비로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완덕이나 성화로 숭고히 승화시키고 나아가 확고히 변화되는 것은 성인들의 경우라 하더라도 일생을 거치기 때문에 딱 그 절대적 순간이 영원과 영속을 굳게 다지고 실현해 가는 과정의 현재로 모든 것을 확고히 비치거나 드러내지는 않는다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달라진 것 없이, 달라질 것도 없어 보이는 현재와 현실 속의 딱 그 사람들로 언제나 보이고 달리 눈을 씻고 찾아 보려고 해도 일일이 파악되고 해석되어 이해될 수 있을 정도로 달라져 보이는 (사람으로서의 그) 모습들은 (의식과 감정으로 직접 느낄 정도가 아니면) 피부에 와 닿을 정도가 아니면 언제나 똑같은 그 사람으로 보여지고 여겨질 뿐인 것이다
그렇게 존재를 알아 채리는 것은, 더욱이 현실성과 역사성을 내포하는 세계성 속에서 그 존재를 알아보고 알아차리는 것은 직관이 없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그 이해와 판단을 항상 뒤따르게 만들므로 더욱이 그 실체의 파악이나 정체의 이해에는 한계가 있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이 모든 경우들을 합해 보더라도 사람들이(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보고도 예수 그리스도의 신원과 정체, 그 실체를 보지 못하고 그 신존재로의 증언이나 증거에는 영 미덥지 못하고 탐탁치 않으며 오히려 억압과 폭력으로 그 존재성을 말살시키려고 하는 그런 사람들이) 존재의 현재나 변화를 알아 보는 것은 그 이기적이고도 사적인 이해관계로의 탐착과 이익추구로 언제나 바람직하거나 타당할 수가 없기에 실제 성인들의 경우처럼 남달라 보이는 행실이나 모습이 아니면 탁월하게 비치는 완덕이나 성화의 면면들이 보이지 않고서는 그저 그런 사람들로 보일 뿐인 것이다
악이라는 것은 여러 모로 시비와 그 검증에도 깊은 연관성이 있다
악화를 조장하고 온갖 해를 끼치는 악이 도대체 무슨 쓸모와 소용으로 세상 속에서는 언제나 사람들 속에서 현상되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는 삶 속에서 그 악에 대해 어떻게 처신하고 대응하며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해는 사람들이 지혜와 격언으로도 여기는 정도이니 악의 현존은 언제나 신비에 속한 영역일 뿐이다
악은, 악으로 인한 사건과 사태에는 언제나 고통과 괴로움이 있고 그 사후에도 큰 상처와 아픔으로 그 흔적이 계속 남아 있다
그래서 그런 악으로 인한 사건과 사태에 관련이 있거나 연루된 사람들은 그 악과와 그 상흔으로 당시에도, 또 오랜 시간 속에서도 그 데미지와 트라우마를 겪으며 그 스트레스가 계속된다
세상 모든 일의 다시 돌이킬 수도, 되돌릴 수도 없는 일사부재리한 성격은 더욱 더 그런 사실들을 사람들이 겪고 안고 지고 살아갈 수 밖에 없게 만든다
그러나 악에 대한 한 가지 지혜로운 통찰과 이해는 언제나 악이 진리의 도그마 속에 있다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악도, 저주로 나타나는 악화의 진상도 단지 사람들에 대한 상대적 대응만을 그 뼈대와 줄기로 삼아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잘못보면 혹 세상사의 논리로만 보자면 사람들은 언제나 그 삶과 행위에 대해서 대응이 필요해 보이는 것들로 여겨질 수도 있다
정의나 법치라는 것이 자존의 실체성을 그런 관점과 입장으로만 두면 언제나 사람들에게만 혈안이 되어 있는 괴물이나 악마처럼 어떤 자기만의 확증편향과 선입관, 편파적인 셀프 라이프만 추구하는 것으로 보여질 수도 있다
그것의 자존으로서의 성격, 사람들만 보면 달려드는 오컬트 무비의 괴물들이나 좀비들처럼 그런 맹목성이나 강박성, 집착 일변도의 행태가 가공하리만치 편집증적인 성격은 그런 괴물들과 좀비들을 상대하는 사람들조차 괴물들을 잡으려면 그 괴물들과 같은 괴물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펼치며 역시 괴물을 잡고 압도할 만큼의 힘이나 폭력이 당연히 필요하다는 논리도 거창하게 성립시키며 그런 이야기들에 진행되고 전개된다
그러나, 그런 괴물들이나 좀비들의 맹목성과 편집증 같은 성격의 폭력이나 파괴를 상대하려는 이야기에서 인간들은 뭔가 성격이 달라야 한다는 것이 대비되는 지점에서 보편적 인간성이나  다소 특이하고 독창적인 성격이 언제나 그런 강력한 에너지의 원천으로, 그 행동의 시발점으로 작용하고 작동해 이야기에 그런 시너지들이 발휘되게 하려는 생각들을 작가들은 하는 것 같은데, (이야기를 보면 대체로 그렇다) K 오컬트 무비나 드라마에는, 그런 류의 웹툰들을 가져다가 더욱 그럴듯한 인간적인 서사와 더욱 인간미 넘치는 성격을 그 이야기의 사건들과 상황 속에 온갖 형태로 나올 수 있는 갈등과 대립들을 성립시키며 끼워 넣고 꿰 맞추려는 숙고와 노력들이 그런 흔적들로 역력히 드러나는 것이다
악은 언제나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 그런 것일 수 있는 것일까
지킬 박사와 하이드라는 소설이 작가의 작품으로 나온 이후 인간성의 이중적인 성격이나 다중 인격에 대한 분석들은 이후 심리학이나 정신의학의 분야에서 많이 다루어지게 되었다
참으로 변화무쌍한 인간성은 딱히 도덕적이다, 윤리적이다, 법률적이다 하는 잣대와 자울추로는 쉽게 재어질 수 없는 것이다
보편의, 일반적인 평범한 성격은 누구나 대체로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그것을 일일이 재단하지 않더라도 다들 일상생활을 영위하고 주어진 일과를 감당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평범한 사람들도 이상증상을 보이듯, 갑자기 돌듯, 어떤 충동들이나 범죄적 성향들에 사로잡히거나 압도당한 것처럼 평상시의 자신이 아닌 그 충동이나 성향이 어디에서 나타난 것처럼 그들 자신이 그런 사람들인 것처럼 사건과 사고 속에서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교도소에도 많고 그런 경미하고 불미스런 일들로 치부되고 연루된 많은 일들에도 있다
그러나 딱히 사람들을 어떤 전형화된 성격이나 인물로 판단하는 것은, 사이코 패스처럼 도덕이나 윤리, 법률과 같은 잣대로는 잴 수 없는, 그래서 반사회적이다라고 하고 공동선과 공동체의 여러 기준들에 못미치고 벗어난 부류로 낙인이 찍힐 수도 있는 그런 판단을 하는 것은 언제나 인문학적 의견들과 단정들로 채워지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그것이다라고 할 수 있는 문제는 어디까지나 창조주로부터 직접 알지 못하는 한 언제까지나 그 직관이 빠진 학습과 경험을 통한 이해와 판단의 범주에서 머물 뿐이다
이 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사람들이 상상 속에서 이끌어 낸 그 괴물들과 좀비들은 악의 화신일까
아마도 아닐 것이고 그런 일들은 없을 것이다
과연 폭력과 파괴의 아이콘이 된다는 것이 그 존재 자신에게도 좋고 이로울까
과연 암적 존재가 된다는 것이, 공동체 속에 자기 자리와 자기 역할과 자기 사명과 자기 의무의 행복과 만족이 없는 그 공동체와 그 공동체 속의 모든 공존과 공생, 합의와 공감, 공동의 질서와 햡력이라고는 전혀 없이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무한 증식하고 확장시키는 그런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눈도 아니고 귀도 아니고 입도 아닌, 뇌도 아니고 심장도 아니고 허파도 아니고 간도 아닌, 장기도 아니도 손도 아니고 발도 아니고 머리카락도 아닌 오로지 그 공동체와는 전혀 상관도 없는 암이라는 이름, 한 가지로 자기 자신만을 확대시키는 그런 세포가 과연 필요라도 있어 처음부터 만들어졌을까
아닐 것이다
의사들이나 의학자들은 암의 발병도 연구하는데, 도대체 암이라는 악화의 산물이 어째서 사람 몸에서 생기는지를 알아 보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언제나 그렇듯 유전적이라든가 이 말은 쉽게 말하자면 DNA상의 문제가 있다는 말과도 같은 것인데 원래부터 그렇게 암이라는 것이 사람 몸에서 만들어질 가능성이 있거나 그렇게 생기도록 하는 의도가 있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악의 모든 것, 악화된 모든 산물은 그런 악을 포괄하고 의도하는 도그마 속에, 도그마 상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구약의 요셉은 말한다
형둘이 자신에게 악을 꾸몄다고 말이다
문제는 그런 일을 겪은 요셉이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처럼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자신을 스스로가 그런 복수심에 올인하고 몰빵한 존재로 만들거나 키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모든 리벤지 무비의 발단이 되는 무자비하고 잔인무도한, 피가 거꾸로 솟는 반인격적이고 반인륜적인 사건들과 사태들, 모든 느와르 무비의 참담하고 비루한, 진저리처지는 사건들과 사고들, 그리고 그런 악화된 진상을 겪은 주인공들이 느꼈을 그 처절한 심정과 애달픔, 괴로움과 그리움, 고통과 소외, 서글픔과 자기격리는 더한 복수심과 보복으로 그 주인공들을 이 세상의 그런 복수와 보복의 아이콘으로 만들어 낸다
요셉은 굳이 문자로 특정하지 않아도 그러한 악을 겪은 사람으로서 무엇을 더 어떻게조차 할 수 없는 입장과 처지였지만(요셉의 형제들은 처음에는 아예 요셉을 죽여 이 세상에서 없애버리자고 했지만 나중에는 요셉을 이집트 대상들에게 노예로 팔아 버렸다) 그런 삶 속에서도 복수심 하나만으로 일생을 담금질하고 그 일념 하나로 그 보복만을 바라보며 사는 이들도 있지만 요셉은 신앙과 겸손의 덕으로 그 모든 악화를 삶 속에서 잘 견디며 자신의 신앙과 겸손된 삶으로 그 나날들을 살아 나갔다는 것이다
그렇듯 자신의 삶을 바람직한 자신으로, 자신의 의식과 덕 속에서 산다는 것은 어렵기도 하지만 언제나 사람들에게는 귀감이 되는 일이기도 하다
악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는 성격도, 그런 범주의 일도 아니다
그리고, 그런 악에 대한 대응만으로, 사람들의 오만 행태에 대한 대응만으로 삶을 사는 것은 인생의 바람직한 방향에도, 경로에도, 노선에도 맞지만은 않다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주님의 기도의 마지막 구절은 그 모든 것을 충분히 알려 주고 있다
악은 언제나 도그마 속에 있는 것이다
악이 자신이 되어 그 주체로 모든 것을 부수고 파괴하는 일이란 이 세상에도, 저 세상에도 없다
언제나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도록 하는 것이 진리이다

악에 대한 대응만을 일삼고 사람들에 대한 대응에만 골몰하는 것들에게 신앙으로, 겸손으로 살 수 있는, 진정 자신이 살아있는 자신의 삶으로 행복하게 사는 일이란 영원히도 없을 것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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