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7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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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히즈키야의 죽음 / 남 유다의 멸망[2] / 2열왕기[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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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식 [big-llight] 쪽지 캡슐

2021-11-25 ㅣ No.151209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7. 히즈키야의 죽음(2열왕 20,12-21)

 

히즈키야가 회복된 후, 하느님께서는 유다에게 아시리아로부터의 평화를 찾도록 허락하셨다. 그의 소명이 성취되었다. 그렇다고 그가 그 평화를 끝까지 유지할 수가 있었을까? 산헤립이 예루살렘 바로 앞에서 퇴각한 소문에 여러 곳에 알려져 히즈키야는 위상이 높아졌다. 그들은 유다의 행운으로 시작하여 자신들도 아시리아의 위험에서 벗어나려했다. 히즈키야는 많은 국가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많은 예물이 들어왔고 한때는 산헤립 때문에 텅 빈 유다의 왕궁에는, 여러 보물들이 다시 가득하게 모아졌다. 그렇지만 그의 이 영광은 위협이 되어갔다.

 

그때에 발아단의 아들인 바빌론 임금 므로닥 발아단이, 히즈키야가 병들었다가 갑자기 이전 상태로 완전히 나아서 회복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편지와 예물을 보냈다. 히브리 말 본문에는 브로닥 발아단이라고 되어 있으나, 대부분은 므로닥 발아단이다. 그는 바빌론 임금 므로닥 아팔리따나를 가리킨다. 므로닥은 바빌론 국가의 신이다. 발아단은 기원전 721-711년에 다스렸다. 그는 아시리아의 사르곤 2세에게 나라를 양도해야 했으나, 기원전 705년 사르곤 2세가 죽고 난 다음 703년에 되찾는다. 그가 히즈키야에게 병문안 사절을 보낸 것은 히즈키야가 죽기 전에 아시리아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그의 도움을 보장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히즈키야는 그들을 반가이 맞아들이고, 그들에게 자기의 보물 창고 전체와 은과 금, 향료와 고급 기름, 병기고와 창고 안에 있는 것을 다 보여 주었다. 히즈키야가 자기 궁궐과 나라 안에 있는 것 가운데 그들에게 보여 주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왕궁의 모든 부를 이렇게 전시할 수가 있으려면, 히즈키야가 그것들을 산헤립에 넘기기 전이어야 한다(18,15-16 참조). 그러나 그 후라고 할지라도, 그만큼 왕궁의 전시품들이 그만큼 많이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였다.

 

그때에 이사야 예언자가 히즈키야 임금에게 와서 몇 가지를 물었다. “그 사람들이 여기에 와서는 무슨 말을 하였습니까? 그리고 어디에서 그들이 왔습니까?” 히즈키야가 대답하였다. “먼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오. 저 먼 근동의 바빌론에서 왔소.” 이사야가 다시 물었다. “그들이 임금님의 궁궐에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히즈키야가 대답하였다. “내 궁궐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보았소. 내 창고 안에 있는 것 가운데, 내가 그들에게 보여 주지 않은 것은 어디 단 하나도 없소.” 이사야의 중개는 두 가지로 정당화된다. 첫째는 부의 축적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둘째는 바빌론 사절단의 예의를 갖춘 문안에 내포된, 동맹협약의 정치적 선을 지지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사야가 히즈키야에게 말하였다. “주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보라, 네 궁궐 안에 있는 모든 것과 네 조상들이 오늘날까지 쌓아 온 것들이 바빌론으로 옮겨져, 하나도 남지 않을 날이 다가오고 있다. 주님이 말한다. 너에게서 태어날 아들들 가운데 더러는 끌려가서 바빌론 왕궁의 내시가 될 것이다.’” 사실 그즈음 이사야 예언자는 아마도 왕족과 유다의 모든 지도층이 바빌론으로 유배 갈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 유배는 거의 한 세기가 지난기원전 597년과 587년에 일어난다. 사실 이는 형제 국가인, 이스라엘의 패망과 같은 슬픈 미래의 이야기이다.

 

히즈키야가 이사야에게 말하였다. “그대가 전한 주님의 말씀은 지당하오.” 그러면서도 그는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평화와 안정이 지속되기만 한다면야.’ 하고 생각하였다. 아무튼 그는 하느님의 심판이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에 자신을 낮추었다. 나아가 하느님께서 계속적으로 당신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도록 강력히 믿었다.

 

히즈키야의 나머지 행적과 그의 모든 무용, 그리고 그가 저수지와 수로를 만들어 도성 안으로 물을 끌어들인 일에 관해서는 유다 임금들의 실록에 쓰여 있다. 사실 기혼 샘물을 성안으로 끌어들이려고 한 공사는 그가 벌인 성공적인 일이었다(2역대 32,30 참조). 오래 전에 바위틈 사이로 뚫어 놓은 유명한 히즈키야의 수로가 발견되었다. 그 수로 내부에 새겨진 글에는 이 굴착 사업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나온다. 히즈키야가 자기 조상들과 함께 잠들자, 그는 다윗 자손들의 무덤으로 가는 오르막에 묻혔고, 그의 아들 므나쎄가 그 뒤를 이어서 임금이 되었다.

 

히즈키야의 아들 므나쎄는 열두 살에 임금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무려 마흔여섯 해 동안 다스렸다(기원전 687-642).[계속]

 

[참조] : 이어서 ‘8. 므나쎄와 아몬 이 소개될 예정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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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즈키야,산헤립,므로닥 발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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