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7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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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과 박해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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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연 [fisherpeter] 쪽지 캡슐

2022-01-02 ㅣ No.151989

 

 

방금 전에 로마에서 수녀님으로부터 메일이 왔습니다. 오랜만이었습니다. 반가웠습니다. 무슨 내용인지 무척이나 궁금했습니다. 최근에 수녀님이 무척이나 바빴는데 지금은 한숨 돌릴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최근에 제가 올린 글 한편을 보고 또 제가 한 달 전에 메일을 보냈는데 컴퓨터와 인터넷에 문제가 있어서 겨우 며칠 전에 보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내용의 소식을 전하면서 저에게 조언을 하나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가 편의상 조언이라고 했는데 일부는 수녀님이 영어로 말씀하셨습니다. 한글 표현으로는 조금 애매한 부분이 있어서 그랬나 봅니다. 일부분만 그랬습니다. 최근 며칠 전에 저의 가슴 아픈 사연의 글을 보셨나 봅니다. 첫마디의 말씀이 인내하라입니다. 그다음으로 해 주신 말씀이 용기였습니다.

 

수녀님께서는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이라면 쉽게 말해서 박해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박해가 두려워 피하면 그 자체가 십자가를 피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를 피하면서 하느님의 길을 간다고 말하는 것은 넌센스라고 했습니다. 그건 이율배반이라고 했습니다. 죄악의 길을 가면서 선의 길을 간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어둠의 길을 가면서 또 파멸의 길을 가면서 빛의 길을 간다고, 성공의 길을 간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박해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겁니다. 옛날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받았던 박해와 순교자들이 받았던 박해와는 다른 것이라고 했습니다. 요즘은 새로운 영성이 도입되고 있다고 합니다. 예전의 박해의 개념과 다른 개념을 보려고 하는 신학자도 있다고 합니다. 쉽게 말해 우리가 말하는 십자가의 개념을 새로운 박해의 개념으로 확대 해석 하려고 하는 신학자도 있다고 합니다.

 

수녀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수녀님께서도 당신 본인 스스로가 저에게 말씀을 하시긴 하시지만 쉬운 것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내용은 바로 박해를 즐겨라입니다. 박해를 즐겨라는 이 말은 박해 그자체가 좋다는 뜻은 아니였습니다. 우리는 사실 이걸 단순하게 표현해서 시련이라고 표현합니다. 저는 언어적으로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알겠지만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쉽게 이해가 잘 되지 않은 측면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수녀님의 장문의 메일을 보내주신 글 전체를 다 읽어보고서야 조금 이해를 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 용어는 단순히 인간 세상의 단어의 의미로 접근하면 이해를 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국문학 교수나 철학 교수에게 질문을 해도 답을 얻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대한 해답은 신앙의 눈으로 봐야 해석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시련과 박해는 둘 다 피하고 싶다는 것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공통점이라고 하셨습니다. 시련과 박해의 미세한 차이는 은총으로 승화가 되느냐 단순히 고난으로 끝나느냐 그 차이입니다. 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정말 맞는 말씀입니다. 흔히들 우리도 세상에서 하는 말 있지 않습니까? 고생은 진탕하면서 그 보람은 아무런 어떤 보상이 없을 때 말입니다. 물론 시련도 견디고 이기면 은총으로 나아갈 수 있지만 그 효과는 박해와 비교했을 땐 그 차이가 엄청나다는 것입니다. 이런 표현도 하셨습니다. 극단적인 표현을 하면 시련은 누구나 이길 수 있어도 박해는 누구나 이길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잘 해석해야 합니다. 약간 문해력을 요구하는 말씀 같습니다. 액면 그대로 해석하면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제조건에 극단적인 표현이라는 전제조건이 따르는 것입니다.

 

이 표현은 시련도 사실 누구나 다 잘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박해라는 개념과 상대적으로 비교했을 때는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 시련도 그러하다면 박해는 그보다도 그걸 초월하는 무엇인가의 반대급부와 같은 은총이 따른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건 인간의 머리로 이렇게 이해를 돕고자 굳이 표현을 하자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얼핏 보면 동일하고 거의 비슷한 개념이라고 이해를 할 수 있는데 사실 이런 미세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오늘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수녀님은 박해를 즐겨라는 말씀으로 우회적인 표현을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아까 사용한 그 표현을 달리 역으로 말하면 이렇게 표현을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시련은 아무에게나 줄 수 있지만, 이 말은 그렇다고 어떤 절대적인 신의 존재(하느님)가 시련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표현을 하자면 상대적으로 봤을 때 박해는 아무나 감당할 수가 있는 게 아니고또 설령 가한다고 하더라도 그걸 아무나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어떤 뜻일 것 같습니까? 그 런 박해는 반대급부적인 은총이 그만큼 따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박해도 어쩌면 그만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에게는 은총이 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을 저는 하고 싶습니다만 여러분은 어떻게 해석이 되시는지요? 


이건 수녀님의 글로써만으로는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점이 조금 있습니다. 이 부분은 어디까지나 저의 개인적인 생각임을 말씀드립니다. 수녀님께서도 이걸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이걸 신학과 영성 신학적인 면에서 설명을 하게 되면 일반인은 이해를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런 한계점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수녀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그 의미를 조금은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 메일을 보자마자 떠오른 벅찬 단상을 타이핑하긴 하지만 좀 더 깊이 묵상해봐야겠습니다. 수녀님의 메일을 보면서 제가 다시 정리를 한번 해보면 아마 이럴 것 같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시련은 그 종류와 방식이 다를 뿐 없을 수는 없다. 하지만 누구나 시련 그 자체를 쉽게 받아들이고 환영을 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시련을 회피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는 것이다. 피하려고 한다고 해서 피할 수 없는 시련도 있을 수 있고, 또 그냥 피하기만 하면 외면할 수 있는 시련도 있을 수 있다. 이것도 신앙을 성숙된 신앙으로 발돋움할 수 있기는 하지만 그보다도 박해는 좀 더 차원을 달리하는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도 시련처럼 피하려고 하면 아니 애써 피하려고 하면 피할 수 있고 외면할 수도 있는 것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면 더 많은 값진 은총을 스스로 얻을 수 있고 공로를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박차고 나가는 것과 같은 모습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결과론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복을 스스로 또 은총을 스스로 거부하는 꼴이 되는 것이라고 이해를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이 내용은 수녀님의 메일을 본 후에 제가 저의 입장에서 소화한 내용을 독백 형식으로 정리를 한번 해 본 것입니다.

 

그다음은 용기입니다. 용기도 박해를 두려워하면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용기를 달리 표현하면 한마디로 백색순교와 같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만약 불의를 보고도 그만 눈감고 침묵을 지키면 그건 자신도 직접적으로 불의를 저지른 것은 아니지만 또 실제 고의적으로 불의를 방조한 것은 아니지만 묵시적으로는 방조한 결과와 같다는 것입니다. 세상 형법에서는 이를 법률용어로 미필적고의라고 표현합니다. 이 내용을 바탕으로 이해를 하면 이해가 훨씬 쉬울 것입니다. 

 

미필적고의를 쉽게 표현하면 이런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어떤 결과가 일어날 것을 내심 의도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소극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나도 할 수 없지 하는 형식으로 용인하는 모습을 가질 때 우리는 세상 형법에서는 이럴 때 미필적고의라고 합니다. 마치 불의를 보고도 침묵하는 것은 달리 표현하면 불의를 받아들이는 적극적인 고의는 없다고는 하더라도 미필적고의와 같은 불의를 방조하고 묵인했다는 비난은 피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마치 신앙에 비유하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수녀님께서는 이런 표현을 하시지는 않았지만 제가 이런 것을 법에 비유하면 설명이 좀 더 잘 이해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비유를 한 것입니다그렇기 때문에 불의를 보고서도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은 어쩌면 옛날 순교의 역사와 비교를 하면 그 탄압과 박해에 대해서 그들의 소리에 동조하는 것이 되지만 용기를 가지고 자신의 소신을 밝히는 누군가의 목소리는 그게 진실 여부를 떠나서 그것도 현대판 백색순교와도 같은 맥락이라고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결론입니다. 수녀님의 말씀 "용기를 내고 또 박해를 즐겨라."고 하신 그 조언의 말씀을 바탕으로 시련과 박해와의 미묘한 차이를 말씀하신 것을 제가 저의 입장에서 그 내용을 소화한 것을 다시 조금 더 재구성해서 묵상한 내용을 정리해 올린 것입니다. 전반부의 내용은 수녀님의 말씀이고 후반부는 저의 개인적인 생각을 부연 설명한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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