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에 대한 답은 회개뿐이다”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시편95;1.8)
수도원 자비의 집 숙소 문을 열 때 마다의 체험이 늘 새롭습니다. 집무실 문을 열때도 그렇습니다. 제가 제일 아끼고 사랑하는 ‘하늘나라 체험(?)’입니다.
“자비의 집
숙소 문 열 때 마다
한눈 가득 들어오는
가슴 가득 안겨오는
푸른 하늘
푸른 산
황홀한 풍경
향긋한 공기
그리운 당신
보고싶은 당신
이 기쁨에
이 행복에 산다
내 성명은 이 행복!”<2024.10.14.>
아마도 회개의 기쁨, 회개의 행복이 이러할 것입니다. 참 많이 강론에 인용했던 주제가 회개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회개입니다. 자기를 아는 겸손과 지혜도 회개의 열매입니다. 회개 없이는 겸손도 없습니다. 무지의 병, 무지의 악, 무지의 죄에 대해서도 참 많이 나눴습니다. 무지의 병이 얼마나 깊은지 우리는 주변에서 도대체 사과할 줄, 회개할 줄 모르는 이들도 무수히 만납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바로 문제는 나에게 있고 회개가 답임을 일깨웁니다.
“내가 어떻게 남을 비난하는지 살펴보면 나에게 가장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 알수 있다.”<다산, 정약용>
인도의 성자라는 간디는 그리스도교 신자는 아니었지만, 자주 “내가 잘못했다(I was wrong)”는 잘못의 고백에서 그가 얼마나 ‘회개의 달인’이었는지 알게 됩니다. 회개한 성인은 있어도 부패한 성인은 없다는 것이 프란치스코 교황의 지론입니다. 끊임없는 회개가 내적부패를 막아 부패인생을 발효인생으로 바꿔줍니다. 부패에서는 악취이지만 발효에서는 향기입니다.
결국 무지에 대한 답도 회개뿐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우선적 응답도 회개입니다. 하느님 안 제자리로 돌아와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게하는 회개입니다. 한 두번의 회개가 아니라 평생 회개이니 우리 삶은 회개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회개와 더불어 참된 겸손이요 무지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오늘 복음은 ‘요나의 표징’에 관한 내용인데 역시 주제는 회개입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라는 말씀, 시공을 초월한 진리입니다. 악한 세대는 무지한 세대입니다. 무지한 세대가 표징을 찾습니다. 예나 이제나 무지한 인간이요 새삼 답은 회개뿐임을 깨닫습니다. 오늘날 주님이 오셔도 똑같이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 악한 세대에 요나의 표징 하나 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요나의 표징뿐 아니라 눈만 열리면 온통 회개의 표징들입니다. 성인들은 물론 무수한 회개의 표징들이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세상에 널려 있는 하늘의 표징이요 회개의 표징들인데 새삼 무슨 표징이겠는지요. 예수님은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던 남방 여왕의 예를 통해, 또 요나의 설교를 들은 니느베 사람들의 신속한 회개의 예를 통해 당대 사람들은 물론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이 아주 결연합니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바로 오늘 우리 이 세대에 주시는 회개의 촉구입니다. 심판 때 단죄받기 전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회개하라 연장되는 인생이요 죽으면 회개도 끝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오늘 지금 여기서, 회개의 절박성을 말씀하십니다. 이어 오늘의 결론 같은 말씀입니다. 바로 솔로몬보다 요나보다 더 큰, 영원한 회개의 유일한 표징이 당신이심을 천명합니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그러니 솔로몬보다 더 큰 분, 요나보다 더 큰 분이신 주님과의 만남이 회개에 결정적입니다. 사실 우리가 평생 매일 거행하는 전례가 살아 계신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회개를 이뤄줍니다. 말그대로 회개의 선택이자 훈련이요 습관화입니다. 이런 선택-훈련-습관은 제가 늘 강조하는 지론이요, 이런 끊임없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점차 무지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로워지는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회개의 일상화’를 이뤄주는 ‘회개의 시스템’ 같은 수도원의 일과표에 따른 성전에서의 평생 공동전례가 참 고마운 것입니다. 새삼 엊그제 복음 말씀도 우리의 회개의 일상화, 생활화에 결정적 도움이 됨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수행 역시 평생 선택에 훈련이요 습관입니다. 이런 하느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수행이 끊임없이 우리의 회개를 촉발시키고 회개의 일상화를 이루어 줌으로 점차 무지로부터의 해방과 더불어 참자유, 참행복에 이르게 합니다. 새삼 값싼 자유, 값싼 행복은 없음을 깨닫습니다. 부단한 회개 은총과 노력의 열매가 참자유, 참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 갈라티아서 결론 부분도 바로 바오로 사도의 체험적 고백이자 회개의 열매임을 깨닫습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주님의 복음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갈라5,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