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25일 (수)
(백) 주님 성탄 대축일 - 밤 미사 오늘 너희를 위하여 구원자가 태어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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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내 삶의 성경 “렉시오 디비나 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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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경 [forgod] 쪽지 캡슐

2024-12-24 ㅣ No.178722

2024.12.24. 12월24일                                                

 

2사무7,1-5.8ㄷ-12.14ㄱ.16 루카1,67-79

 

 

내 삶의 성경

 “렉시오 디비나 하기”

 

 

“주님의 자애를 영원히 노래하오리다.

 제 입은 당신의 진실을 대대로 전하오리다.”(시편89,1)

 

믿는 이들의 삶의 역사는 그대로 한 권의 성서요 하느님 자애와 진실의 발자취입니다. 삶의 중심이자 인도자이신 주님께 충실히 협조하여 우리 모두 각자 삶의 성경을 하루하루 평생 정성껏 써가야할 거룩한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갔을때 유일하게 바쳐야 할 것이 내 삶의 성경책입니다.

 

예전 요셉 수도원 설립 25주년을 맞이하여 썼던 글이 생각납니다. 수차례 나눴지만 늘 새롭습니다. 요셉수도공동체 역시 하나의 성서로 보고 렉시오 디비나해본 것입니다. 믿는 이들의 삶과 더불어 공동체 역시 저는 또 하나의 성경으로 간주합니다. 제가 위인들의 자서전, 평전, 회고록을 주로 즐겨 읽는 것도 하나의 성경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참 삶의 의미를 추구하면서 진실하게 산 이들의 삶은 성경처럼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닫게 합니다. 삶은 평생 죽을 때 까지 배워야 하는 배움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셉수도공동체라는 성서를 나름대로 렉시오디비나한 결과 넷으로 요약됨을 발견했습니다.

 

1.모든 것은 때가 있다.

2.모든 것은 필요했다.

3.모든 것은 지나간다.

4.그러니 현재를 살라(carpe diem).

 

넷의 요약 결론에 만족했고 많은 이들이 공감했습니다. 하나를 더 추가한다면 "모든 것이 감사했다"가 될 것입니다. 제 지론은 성경의 렉시오디비나도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신구약성서의 렉시오디비나가 기본이고, 다음에 자연성서, 다음엔 내 삶은 물론 공동체라는 성서입니다. 내 삶의 성서 렉시오 디비나 역시 얼마나 풍요로운지요! 이렇게 살 때, 결코 하루하루 충실히 살게 됩니다. 결코 함부로, 되는대로 막 살지는 못합니다. 

 

하루하루가 써가는 살아있는 성서의 한쪽으로 아직은 미와의 내 삶의 성서, 내 공동체의 성서라는 것입니다. 결코 무의미한 삶이 아니라 하느님과 우리가 협력하여 써내려 가야 할 의미 충만한 내 삶, 내 공동체의 성서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의 면담고백성사를 할 때는 성서를 렉시오디비나하는 마음으로 그들 삶의 이야기를 경청합니다. 옛 현자의 고백도 삶이 하나의 성서임을 입증합니다.

 

“진실한 삶으로 들어가본 사람만이 인생의 마지막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한다.”<다산>

“죽을 때가 되었을 때, 한 상자의 글도 전할 것이 없다면 헛되게 산 것이다.”<다산의 여유당전서>

 

생애 마지막 한 권의 내 삶의 성서가 없다면 헛산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평생 오래 살았어도 쓸 이야기가 없는 텅빈 공허와 허무, 무의미한 삶이었다면 얼마나 허전하고 쓸쓸할까요? 그 허기는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을 것입니다. 삶은 양이 아니라 질입니다. 하여 삶의 여정을, 삶의 성서를, 일일일생, 일년사계로 압축하여 어느 시점에 있는지 살펴보며 거품이나 허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짧은 세월, 기도하고 공부할 시간을 생각하면 때로 먹는 시간도, 잠자는 시간도 아깝다는 생각도 들 것입니다. 오늘 12월24일, 주님 오심의 성탄이 임박했음을 깨닫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과 독서가 내 삶의 성서, 내 공동체의 성서, 내 나라 공동체라는 성서를 잘 렉시오디비나하도록  우리를 일깨웁니다. 과연 이렇게 살아도 되나? 성찰하기에 참 절호의 오늘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나탄의 신탁이요 복음은 즈카르야의 찬가입니다. 두 독서의 특징은 동사들의 주어가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은 살아 움직이는 동사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 공동체를 통해 이루신 업적을 노래하는 것이요, 그대로 일종의 렉시오디비나입니다. 내가, 공동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해 주신 것이라는 것이요, 이런 깨달음이 더욱 회개를 촉진하고 겸손과 순종, 찬미와 감사의 삶을 살도록 마음을 움직입니다. 오늘 제1독서 나탄의 신탁도, 복음의 즈카르야의 찬가도 주어가 하느님이요 하느님의 위업을 나열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나탄에게 내렸다.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양떼를 따라다니던 너를 목장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웠다...나는 너의 이름을 세상 위인들의 이름처럼 위대하게 만들어 주었다...나는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평온하게 해 주었다.”

 

많이 생략했지만, 모두가 하느님이 주어가 되어 다윗을 위해 해주신 일의 나열임을 깨닫습니다. 다윗의 무지를 일깨우며 회개에로 인도합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주님이 하셨다는 자각이 겸손이자 믿음입니다. 일례로 내가 수도원에 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를 수도원에 보내 주셨다는 자각입니다. 새삼 우리 요셉수도원 수도자들 하나하나가 하느님이 보내주신 하느님의 선물이자 "신의 한수"임을 깨닫게 되니 저절로 회개와 겸손이요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게 됩니다.

 

즈카르야의 찬가 역시 이스라엘 공동체에 대한 렉시오디비나요 하느님에 대한 감사와 찬미의 노래가 됩니다. 가톨릭 교회가 수천년간 아침기도때 마다 즈카르야와 함께 이스라엘공동체는 물론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인 교회공동체를 렉시오디비나 하는 마음으로 부르는 찬가입니다. 성령으로 가득 차 노래하는 즈카르야의 노래가 참 은혜롭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루신 위업을 렉시오디비나하며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즈카르야와 우리들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모두가 바칠 찬가입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에게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

 

이어지는 모든 내용이 하느님이 주어가 되어 주도권을 잡고 이루신 위업에 대한 감사와 찬미로 가득한 즈카르야의 찬가입니다. 얼마나 역동적인 하느님이요 이스라엘 공동체요 교회공동체, 수도공동체인지요! 마지막 구절에서 구세주 탄생의 예고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시리라.”

 

영원한 현재진행형의 하느님의 구원활동이요, 오늘도 그대로 이뤄지는 구원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그러니 날마다 대림이요 성탄입니다. 주님은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찾아 오시어,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주시고, 오늘 하루도 당신 중심으로 당신께 최선을 다해 협조하며, 우리 삶의 성서 한쪽을 잘 쓰도록 도와주십니다. 

 

“떠오르는 별, 영원한 빛, 

 정의의 태양이신 주님, 어서 오소서. 

 어둠속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소서.” 아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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