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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삶은 선택이다 “선택의 달인, 베드로와 열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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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5.10.부활 제3주간 토요일
사도9,31-42 요한6,60ㄴ-69
삶은 선택이다 “선택의 달인, 베드로와 열한 제자들”
“내게 베푸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구원의 잔 받들고, 주님의 이름 부르리라.”(시편116,12-13)
삶은 선택입니다. 삶은 선택이자 은총입니다. 우리가 수도생활을 선택한 것도 선택이전에 부르심의 은총이 선행했기에 가능했습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바 좋은 선택에 이어 훈련, 그리고 습관화입니다. 이에 해당되지 않는 수행은 하나도 없습니다. 기도도 침묵도 겸손도 믿음도 희망도 사랑도 선택이자 훈련이요 습관입니다. 세월흐르면 마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좋은 습관으로 삽니다. 습관의 힘, 습관의 고마움입니다.
오는 복음은 생명의 빵을 주제로 한 요한복음 6장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야 영원히 살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당대의 많은 제자들에게 이해 난망의 큰 걸림돌이 됐음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당대의 이런 처지에 놓인다면 우리 역시 장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듣기가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아마도 당대 제자들 대부분의 보편적 반응이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한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킵니다. 발상의 전환을 요구합니다. 참으로 주님의 이해 은총이 절실한 때입니다. 육적인 사고에서 영적인 사고로의 패러다임의 전환을 요구하는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주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입니다. 주님의 깨달음의 은총없이 기존의 육적 이해 차원으로는 참 받아들이기 힘든 말씀입니다. 다음 주님의 말씀이 아버지의 이끄시는 은총의 필요성을 분명히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너희에게 말한 것이다.”
어쨌든 이 일로 많은 제자들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는 상황에서 예수님은 열두 제자에게 선택을 요구합니다. 당대의 제자들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예수님을 선택하여 항구히 따를 것인지 묻습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열두 제자를 대변한 시몬 베드로의 선택이 탁월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시몬 베드로를 위시한 열두 제자를 선택의 달인이라 극찬하는 것입니다. 도저히 앞을 전망할 수 없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믿음의 눈으로 주님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열두 제자뿐 아니라 우리 믿는 이들 모두를 대변한 시몬 베드로의 답변입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는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얼마나 잘 훈련되고 습관화된 열두제자의 믿음인지 짐작이 갑니다. 자나깨나 어떤 상황에서든 한결같이 주님을 찾아, 주님을 따라 수도생활을 해온 우리 수도자들의 정주의 믿음도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제 좌우명시 첫째 연도 정주의 선택, 훈련에 한결같은 노력의 믿음을 보여줍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하늘 향한 나무처럼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덥든 춥든, 봄, 여름, 가을, 겨울 늘 하느님이 불러 주신 이 자리에서 하느님만 찾고 바라보며 정주의 나무가 되어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살다보니 작은 나무가 이제는 울창한 아름드리 하느님의 나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주님을 선택하여 항구했던 정주의 믿음을 상징하는 늘 거기 그 자리의 나무들을 닮은 여기 성 요셉 수도원의 베네딕도회 정주의 수도자들입니다. 주님을 선택한 베드로의 선택도, 주님만을 찾는 정주의 삶을 선택한 여기 수도자들의 선택도 옳았습니다. 물론 주님의 부르심의 은총이 선행한 덕분입니다.
보십시오! 시몬 베드로의 선택이 옳았음이 오늘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의 눈부신 활약상이 생생한 증거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완전히 하나된 베드로의 삶이요 베드로를 통해 일하시는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그동안 주님과의 일치를 위해 전심전력 노력을 다한 베드로의 항구한 믿음의 노력과 훈련을 능히 헤아릴 수 있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베드로의 눈부신 성과는 애네아스 중풍병자를 고치는 장면에서, 또 타비타라는 도르카스를 다시 살리는 장면에서 환히 드러납니다.
“애네아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고쳐 주십니다. 일어나 침상을 정돈하십시오.” “타비타, 일어나시오.”
베드로가 부활하신 주님과 얼마나 깊은 일치의 삶을 살고 있는지 입증하는 치유와 소생의 기적입니다. 좌절할 때마다 내 이름을 부르고 “일어나시오.” 외치고 즉시 타비타처럼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탁월한 믿음의 베드로를 통해 일하시는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새삼 예수님을 우리 삶에 동화시키는 것은 단지 ‘좋은 신자’(a good Christian)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사도행전의 베드로처럼 우리 삶의 영원한 모델인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신 그분 예수님과 함께 하나되어 ‘완전한 인간 존재’(a perfect human being)가 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그렇지만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믿기를 멈추고, ‘예수님의 길’(Jesus’ Way)을 더 이상 걷지 않는지요! 죽을 때 까지, 살아있는 그날까지 주님을 한결같이 믿어야 하고,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야하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이자 학인인 우리의 신원임을 절감합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을 선택한 우리 모두를 주님과의 온전한 일치의 삶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14,8). 아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