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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진 신부님_<변명과 합리화는 위선이고, 그것도 죄를 짓는 일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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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29-37)”
1)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실제 있었던 일이 아니라, ‘이웃사랑 실천’을 가르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만드신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등장인물들도 가르침을 좀 더 분명하고 생생하게 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설정한 인물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 실천을 하지 않고 그냥 가버린 사람들을 사제와 레위인으로 설정하신 것은, 성직자들의 ‘위선’을 꾸짖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하신 일입니다. <‘레위인들’은 성전에서 봉사하는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직자 대우를 받았습니다.> 성직자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모범적으로 ‘사랑 실천’을 잘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만일에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가르치기만 하고 실천을 하지 않으면, 그것은 ‘위선죄’를 짓는 것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대할 때 “사제와 레위인은 왜 그랬을까?”에 초점을 맞추고,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면서 “아마도 율법을 지키느라고 그랬을 것이다.” 라고 대신 변명해 주고 합리화해 준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의도를 무시하는 일이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는 일입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제와 레위인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라는 레위기 19장 18절의 율법을 어긴 자들입니다. 그 이상의 다른 뜻은 없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이 죽은 것으로 판단하고, 시체를 만지면 안 된다는 율법을 지키려고 그냥 지나가버렸을 것이라고 해석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은 억지 해석입니다.>
2) 예수님께서 사랑을 제대로 실천한 사람을 사마리아인으로 설정하신 것은, 사랑이란 무엇인지를 생생하게 나타내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하신 일입니다. 당시에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의 관계는 서로 상대방을 ‘원수’로 생각하는 관계였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의 사랑 실천은, 이웃을 사랑한 일이기도 하고, 원수를 사랑한 일이기도 합니다. 사마리아인이 다친 사람을 치료해 주는 일로 그치지 않고,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하룻밤을 함께 지내면서 돌보아 주고, 여관 주인에게 부탁도 하고, 비용도 자기가 부담하겠다고 약속한 것은, “사랑이란, ‘최소한’이 아니라 ‘최대한’으로 주는 일”이라는 것을, 즉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서 모두 하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또 “사랑은 ‘주는 나’가 아니라 ‘받는 너’를 기준으로 삼아서 실천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도 나타냅니다. 내가 주고 싶은 것만 주고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필요한 것을 아낌없이 전부 다 주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3) 강도당한 사람의 입장에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절박한 심정으로 하느님께 살려달라고 기도했을 텐데, 그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하느님께서는 우선 먼저 사제를, 그 다음에는 레위인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은 사랑을 실천하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를 거부하고 그냥 가버렸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 번째로 사마리아인을 보내셨고, 그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했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 사마리아인이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천사’로 보였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사마리아인의 도움은 받지 않겠다고 거부하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라고 물을 수도 있는데,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는 그런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고, 실제 상황이라면, 평소에 원수로 생각하고 있었던 사마리아인이 도와주는 것에 대해서 큰 감동을 받을 것이고, 더 크게 고마워할 것입니다.>
4) ‘강도당한 사람’을 ‘예수님’으로, ‘사마리아인’을 ‘나’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이,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는 다음 말씀들에 연결됩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5,45).” 사마리아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께’ 사랑을 드린 사람이고, 사제와 레위인은 ‘주님을 외면하고’ 그냥 가버린 사람들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출처] 연중 제15주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